鶴의 울음소리 들을 줄 알아야 民意가 보인다
(鶴鳴之聲 聞于天)
시경 소아편(詩經小雅篇)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높은 곳에서 우는 학의 울음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세(鶴鳴于皐 聲聞于天).
그리고 주역 계사편(繫辭篇)에서 보면 학의 울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학은 밤에 운다(鶴鳴在陰). 여기에서 말하는 학은 출사(出仕)하지 않은 재야의 군자와
현인을 말한다. 그런 인물을 일컬어 학에 비유해서 학명지사(鶴鳴之士)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시경소아편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하늘애서 들려온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와 상통하는 군자와 현인의 말은 방안에서 한 말이지만 그 말이
선(善)함으로 천리 밖에서까지 호응한다고 했다.(君子居室 言善 則千里之外 應之),
왜 그러냐하면, 학명지사(鶴鳴之士)는
첫째, 스스로 몸을 닥아 깊은 소양을 함양하였고(修身),
둘째는 스스로 한 말을 반드시 몸소 실천하며(踐言).
셋째는 시의(時宜)에 적절한 생각을 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時中).
우리는 학명지사(鶴鳴之士)라는 그 명사 속에서 엄청난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학명지사는 재야에 묻혀있으면서도 이치에 합당한 말로써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고, 사회적 상황의 변화추세에 관하여 정곡(正鵠)을 제시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실천책임을 다할 줄 알라는
경고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2월 19일 대선일정을 앞두고 있다.
경선에 나선 후보자들과 그와 관련된 정당관계자 및 추종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과 말은 다시 주어서 되 담을 수 없는
내용의 막말을 비롯하여 본전도 찾기 어려운 말들을 마구 내뱉는가하면,
어느 정당에서는 동일내용의 말을 창당 이래 계속 되풀이하며 듣기 실증
날만큼 반추(反芻)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한 말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기 한 말은 제쳐놓고 남의 말만 꼬집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남의 마음과 입과 붓을 빌려서 쓴 글을 그 진의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내 것인 것처럼 사용하다가 논리모순 혹은 논리비약이라는
덜미를 잡히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더 많은
말을 하고 다니는 몰골은 참으로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모두가 학명지사(鶴鳴之士)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양태(樣態)일 뿐만 아니라
학명지사가 지니는 이른바 수신(修身), 천언(踐言), 시중(時中)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그런 수준의 말과 말이 어떻게 학의 울음소리처럼 천리 밖에서까지 반응을
일으킨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일례를 들면 욕설은 비록 전파를 타고 천리 밖에까지 전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류의 말은 수신자(修身者)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시경에서
말하는 청승(靑蠅:똥파리)이 좋아하는 구린 냄새가 풍기는 말일지언정,
선비가 좋아하는 사군자(四君子:梅蘭菊竹)의 향내음일 수는 없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을 편술한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흥체(興替)를 거듭한 중국사의 30여 왕조는
다음 6가지의 어려움(六難)을 극복하지 못해서 흥망성쇠의 쓰라린
과정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천언(踐言)이요,
둘째는 방기(防欺)요,
셋째는 거사(去邪)요,
넷째는 임현(任賢)이요,
다섯째는 득인심(得人心)이요,
여섯째는 순천도(順天道)라고 밝히고 있다.
그 여섯 가지 덕목 중 학명지사(鶴鳴之士)와 가장 관련시켜서 살펴보아야할 요목은
“득인심(得人心)”이다. 이 말은 인심을 지지표 얻듯이 점유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득자(得字)는 터득(攄得)한다는 뜻이다.
인심의 소재를 알고, 인심의 귀추를 알고, 인심의 부동성과
가변적 요인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환공(齊桓公)을 가장 먼저 패왕(覇王)으로 등장시킨 과중(管仲)은
긴 안목(長目)과 멀리 들을 줄 아는 귀(飛耳)와 밝은 미래를 열어간다는
수명(樹明)등 세 가지 요목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을 제환공에게 주청한바 있다.
그와 같은 덕목을 바탕으로 하여 인심을 터득한다면 힘으로 얻은
패권(覇權)이지만 인정(仁政)을 펴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도자일수록 득인심(得人心)할 줄 아는 소양을 더 많이 길러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패도현창(覇道顯彰)의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의 이곳저곳에서 학처럼 고결하게
지내는 학명지사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겸허함을 더욱 몸에 익혀가야 할 것이다.
인심은 천심으로 통한다고 했다(人心卽天心).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의
성립근거가 여기에서 찾아진다. 자연을 대우주(大宇宙)라 하고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는 것을 이퇴계선생은 일직이 정리해서 발표한 바 있다.
주역 건괘(乾卦)에서 천명하고 있는 자연의 천행건(天行健)과 인간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의
대칭논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대우주와 소우주의 합일화(合一化) 가능성을 가르쳐주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민심(民心)은 국심(國心)으로 통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민유방본(民唯邦本)이요, 본고방녕(本固邦寧)이라 했기 때문이다.
즉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뜻이다.
자연은 유상(有常)한 천도(天道)에 의하여 운행 되고, 나라는 정명(正明)한
정치(政治)에 의하여 운영 된다. 천도와 정치의 공통성은 공명정대(公明正大)함을
그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공명정대는 정직(正直)이다.
정직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학명지사와 어울릴 수 있다.
논어에서 이르기를, 정(政)은 정야(正也)라 하였거니와 정치인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정직해야한다. 만약 정직하지 않으면 사물(事物)을 순리적으로 다루어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원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 맹자는 유물유칙(有物有則)이라 했다.
그럼으로 정직한 사람만이 사물의 원칙에 적응할 수 있는 바른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정직에는 어떤 경우에도 후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왜냐? 정직이 후퇴하면 사회정의는 혼미(昏迷)해지기 시작하고
유물유칙이라는 사물의 존재원칙은 무너져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정(政)이 정(正)을 잃은 난정국(亂政局)이라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불행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학명지사(鶴鳴之士)의
학덕(學德)에서 찾으라고 귀띔해주고 있는 것이 시경 소아편의 학명장(鶴鳴章)이 아닌가싶다.
인간의 지보(至寶)는 정직(正直)이요,
나리의 대보(大寶)는 신의(信義)라고 하는 것이
왜 불멸의 정훈(政訓)으로 전해가고 있는가를 세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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