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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운다

칠봉인 2013. 1. 22. 10:36

克己人과 捨己從人(극기인 사기종인)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를 통제한다(self-control)는 것은 매우

중요시해야할 덕목(德目)이라 이야기들 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실행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충동(衝動)에 의하여 발현되기 쉽고, 충동은 비교우위적(比較優先的)

정서자극에 따라서 유발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관해서 이율곡선생은 말하기를, 우리들 가슴속에는 늘 두 개의 적(敵)이

서로 싸우고 있다면서 하나는 감성(感性)이요, 다른 하나는 이성(理性)이라 했다.

일반적인 경우 그 양자의 승패율을 보면 감성의 승율(勝率)이 거의 압도적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현자(賢者)보다는 우자(愚者)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賢者는 어떤 사람이고 愚者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어진 사람은 스스로 느끼는 욕구의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의 훌륭한 의견을 따를 줄 아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유형의 인물을 일컬어 극기인(克己人) 그리고 사기인(捨己人) 이라고 한다.

 

우자(愚者)는 그렇지 못한 이들을 말한다.

극기(克己)를 할 줄 아는 사람과 사기(捨己)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겸허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최우선의 실천덕목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겸(謙)은 오기(傲氣)와 사기(邪氣)가 없다는 뜻이며,

허(虛)는 공자의 말대로 우주와 인간이 하나 되는 혼연지기(渾然之氣)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겸허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마음쓰임의 틀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마음을 크게 지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물을 포용할 수 있고 (大其心, 容天下之物).

둘째는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있기 때문에 세상 어느 누구의 의견도 경청할 수 있으며

           (虛其心, 受天下之言),

셋째는 마음을 늘 평온하게 지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으며

           (平其心, 論天下之事).

넷째는 마음을 늘 잠겨놓고 지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관찰할 수 있으며

           (潛其心, 觀天下之理),

다섯째는 마음의 갈 바를 분명히 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定其心, 應天下之變).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보았을 때 극기인(克己人)과

사기인(捨己人)의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살펴본다.

 

첫째 사례로서 한고조(劉邦)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한나라의 역사에는 임용삼걸(任用三傑)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장량(張良)과 소하(蕭何)와 한신(韓信)을 중용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라를 세운 다음에 한고조는 다음과 가은 말을 남겼다.

       장량은 천리 밖의 일까지 예측해서 작전수행을 했다.

       나는 장량의 그런 지혜를 따를 수가 없다 (我不如張良).

       소하는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전략 및

       식량 확보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나는 그의 지략을 따를 수가 없다 (我不如蕭何).

       한신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략적 승리는 물론 적을 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그의 전법을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我不如韓信).

 

      이 세 사람은 당대의 영웅이며 나로서는 그 세 사삼을 임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천하를 얻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방은 “겸허의 승리자”라는 것을 귀띔해주고 있다.

둘째 사례로서는 제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을 임용할 수 있었던 일이다.

      제환공의 이름은 소백(小白)으로서 둘째 왕자였고

      그의 형인 첫째 왕자는 규(糾)이었다. 관중은 규를 주군으로 받들면서

      주군을 해치려는 자는 그 누가 되었던 간에 서슴없이 제거하려했다.

      따라서 소백은 언제나 관중의 극심한 경계대상자이었다.

      그리고 관중의 벗인 포숙(鮑叔)은 소백을 주군으로 하여

      관중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드디어 규와 소백은

      왕위승계문제로 왕자란을 일으켰다(糾與小白 爭爲齊君).

      그 때 관중은 소백에 대하여 화살을 겨누었다.

      그러나 소백은 그의 형 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관중은 투옥되고 말았다(公子 糾 被殺, 管仲 被囚).

      그 때 소백을 주군으로 받들며 규를 살해하고 그의 주군을 왕위에 올려 앉힌

      포숙은 소백(齊桓公)에게 관중을 중용할 것을 간청했다.

      그 때 제환공은 나를 죽이려했던 자를 중용하라는 것이냐 하면서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포숙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제환공을 설득했다.

첫째, 따듯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며(寬惠愛民).

둘째, 나라를 튼튼히 다스릴 수 있으며(治國 不失秉).

셋째, 충성과 신의로써 제후를 결속시킬 수 있으며(忠信 可結於諸候).

넷째, 예의로써 사방을 통치해갈 수 있을 것이며(制禮義 可法於四方).

다섯째, 군기강을 세워 백성들에게 용기를 더해줄 것이다(使百姓 皆加勇).

 

이 사람 포숙은 그 5가지 면에서 관중과 견줄 수 없다(臣不如也) 하였다.

그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 제황공을 받들게 된 관중은 승상으로 40년간 봉직하면서

제나라를 사유(四維:禮義廉恥)의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고를 넉넉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의 정책을 써서 제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시대 최초의 패권자로 등장시켰다,

관중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고대 제1위의 정치가요, 군사가요,

사상가라는 명예를 이어가고 있다.

 

셋째 사례로서는 천하대성이라고 존경 받고 있는 공자의 경우를 빼놓을 수 없다.

공자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라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겸허함을 잃지 않고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 자공(子貢:賜)의 민첩함은 나보다 뛰어난다고 했다(賜之敏 賢於丘).

군자는 민어행이눌어언(敏於行而訥於言)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자로(子路:由)는 그 용맹함이 나보다 뛰어난다. (由之勇 賢於丘).

인자무구(仁者無懼)라는 말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자장(子張:師)의

장중(莊重)함은 나보다 뛰어난다고 했다(師之莊 賢於丘).

 

돌이켜 생각해보면 춘추시대에 있어서 가장 먼저 패주(覇主)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관중을 중용할 수 있었다는

제환공의 국기심(克己心)과 관중이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본 포숙의 사기종인(捨己從人)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고조가 겸허한 자세로 인재를 구하고 그 인물들의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기에

중국의 문화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강한성당(强漢盛唐)이라는 용어 한마디로서 가히 짐작이 간다.

뿐만 아니라 만고의 스승이며 대성인(大聖人)인 공자의

극기, 서기, 사기, 추기, 진기(克己復禮, 恕己之心恕人, 捨己從人, 推己及人, 盡己謂忠)의

가르침이 도의관념을 생활화 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옛 것을 오늘에 활용한다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슬기를 키워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