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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는

칠봉인 2015. 5. 20. 00:11

공자(孔子)는 상가(喪家)집의 개였다』         

    
    40대 후반부터 주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공자는 
    어느 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점치는 괘를 뽑아보았는데,
    '화산려(火山旅)' 괘가 나왔다고 한다(황태연 '공자와 세계' 3권에). 
    '여(旅)' 는 나그네 신세를 뜻한다. 
    세상사의 이치에 통달한 성인으로 여겨지는 공자도 인생 후반부는 
    나그네를 뛰어넘어 '상갓집의 개'(喪家之狗)로 살았다.
    50대 중반부터 60대 후반까지 14년 동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낭인으로 살았던 것이 공자 팔자였다. 
    이 기간 동안 죽을 고비를 4번이나 넘겨야 했고, 
    그날그날 끼닛거리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였고, 
    강도에게 포위되어 열흘 이상 굶주리는 상황도 있었다.
    
    '상갓집의 개' 라는 표현은 사마천의 '사기' 에 나온다. 
    사마천의 이 대목이 없었으면 우리는 공자의 파란만장을 제대로 모를 뻔했다. 
    상갓집의 개는 밥을 줄 주인이 없는 개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음식 찌꺼기를 상황 되는 대로 주워 먹어야 하는 개다.
    
     
                                             
    
    
    
    사마 천(司馬 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로서 중국역사의 아버지라 불린다.
     
    주인이 없다는 것을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직장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지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이다. 
    공자는 되는 일도 없고, 운도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서글픈 팔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통상 성인 공자만 알지, '상갓집의 개'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쉽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고도 처절하게 살아야만 했던 사마천은 
    공자의 떠돌이 인생에서 깊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지 않았나 싶다. 
    '공자도 이렇게 고생을 하며 살았는데, 여기에 비하면 내 처지는 낫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지 않았을까! 
    '상갓집의 개' 라는 표현은 꼭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다고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굳이 적어 넣은 것은 
    삶이라는 것이 성인(聖人)에게도 쉽지 않았다는 점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한 의도였다.
    
    공자뿐만 아니라 "옛날 주 문왕은 감옥에 갇혔을 때 '주역'을 만들었고… 
    굴원은 초나라에서 추방되었을 때 '이소경(離騷經)'을 만들었다. 
    좌구명은 장님이 되고부터 '국어(國語)'를 만들었고, 
    손자는 다리를 끊기고서 '병법'을 만들었다" 고 사마천은 말한다. 
    천재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인물들도 감옥생활 하고, 
    추방당하고, 장님이 되고, 다리를 절단당하는 불운과 불행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사마천의 인생관이었다. 
                        [조용헌] 
    
     




宮刑을 당한 司馬遷의 <史記>이야기
 우리는 학창시절 '사마천=사기' 란 공식으로 공부했다.
남의 나라 역사이기 때문에 그 '史記' 라는게 어떤 내용이며
어떻게 해서 씌어 졌는지를 배운 기억이 별로 없다.
여기 '사마천의 사기' 얘기를 잠깐 올려 본다.


서력 기원전 99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100 여년전의 일.
중국의 한나라. 한무제 시절 이야기다.
지혜롭고 용병이 능하였던 두릉장군은 겨우 5천의 보병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를 토벌하기 위하여 떠났다.


두릉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며
적진 깊숙히 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용맹스럽게 전투에서 많은 적을 무찌르고 돌격한
두릉장군은 
적진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으니


자연 후미와 떨어지게 되었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잘 싸웠으나
말에서 떨어져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가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젆사했다는 소식이 왕에게 까지 전해졌고
많은 백성들은 이에 애도하였고
어떤 부하는 따라서 자결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되자,
두릉장군이 사실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오히려 적군의 중신으로 쓰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중국 역대의 영웅중에서, 
패한일이 없기로 유명한 무제가 이를 듣고 격노하였다.


그리고 즉시 중신회의가 소집되었다.
중신들은 무제앞에서 두릉장군을 욕하기 시작하였다.

"폐하,
그자는 혼자서 부대를 벗어났다는 것부터가 무책임한 자입니다."

"맞습니다. 폐하,
그자는 전에도 돌출적인 행동으로 고집이세고
잘난척을 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를 부하로 두었던 전 상관까지 입을 모아 욕을 하였다. 

"폐하 잠시나마 그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이 수치스럽습니다.
그자의 남은 삼족을 멸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고집불통에다 부하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왕이라는 것을
잘 아는 중신들이기에 아무도 감히 무제의 기분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이때, 말석의 젊은 남자하나가 불쑥 머리를 조아려 말했다.

"폐하, 두릉자군이 겨우 전투에 나간지 반년밖에는 안되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중신들은 그가 전투에 나갈때 배웅을 나가며
장군의 지략을 찬양하고,
또, 그가 전도유망한 장군이라고 칭찬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년도 안되어 그의 사정을 알지도 못한 채
그를 역적으로 모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평소 그의 품성과 충성심을 보건데,
그는 분명 적진에 홀로 남은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진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를 결코 욕해선 안될 것으로 압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마천이었다.
 
황제의 기분을 거스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그는 사형은 면했지만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
이라는 남자로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았다.


사람들은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남자답게 죽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기도 하였고,
어딜가나,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던중 임안장군이라는 사람이 사마천을 찾아왔다.

"사마천, 더이상 수치수럽게 살지 말고 이 독약으로 자결하시오"

"싫소"

"사내가 죽는 것이 그렇게 무섭소?
사나이답게 깨끗하게 자결하시오" 

"싫소, 나는 기필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소"

"황제에게까지 직언을 주저하지 않던 자네가
왜 그리 목숨에 연연하는 것인가"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0년 15년이 지난 후 말하리다"

"아니 그때까지 살아있겠다는 말인가. 어허,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 못 보았군" 



몇년 후,
임안장군은 누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죽기전에 사마천이 그의 감옥에 몰래 찾아왔다.

"아니 사마천이 이 감옥까지 웬일이시오"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난 사내답게 죽겠소, 당신처럼 그렇게 비굴한 연명은 하지 않겠단 말이오."

"보시오 임안장군, 내가 왜 연명하고 사는 지 아시오?
나는 살아서 역사를 쓸 것이오.
이 나라의 중신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쳐놓고,
황제가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열심히 살았는 지,

나는 분명 살아서 모든것을 역사에 남길 것이요.
난 살아서 수치스러웠지만, 이 나라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역사속에서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임안장군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사마천은 훗날 역사서를 완성하였는 데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史記"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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