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어쩌구 저쩌구

광복절날 해야할 일

칠봉인 2016. 4. 8. 07:50

우리는 광복절만 되면  70주년이니 뭐니 하면서 이런 저런 기획물과 기념행사로

요란스럽게 떠든다.

방송기획물들도 나라 잃은 슬픔 克服記 아니면 抗日鬪爭談


같은 것을 만들어 방송해 된다


말하자면, 아무개가 왜놈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독립군이 어느 전투에서 싸워 이겼다느니


하는 의 나라 잃은 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천배만배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즉 나라가 망한후의  이야기인 독립투쟁사나 우리가 일본놈으로 부터 당한 억울한 이야기 이런것들만 집중 조명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를 망하게한 원인이 된

 무능과 치욕과 비리로 얼룩진 구한말의 참담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규명하는 행사와 방송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당시 조정의 임금과 대신들이 그리고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기에


나라를 망쳤는가? 하는 점을 조명하여 무지몽매(無知蒙昧)함이 빚은 재앙을 상기시키는

일이 나라가 망한 후의 이야기인 독립 투쟁사 일본의 박해 이런것을 조명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즉 <한일합방>을 초래한 저 구한말 조선의 無能을  깨닫게 할 수 있는 행사나 방송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미래 세대들이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친일파보다  당시에 나라를 망하게 한 고관대작들 처벌이 우선이고 다음이 친일파다

이들이 나라를 깨끗하게 운영 했다면 친일파도, 위안부도 눈오는날 추운날 만주벌판에서 고생고생하면서 독립군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과 싸워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백성도 아예 생기지 않았다


위안부, 친일파, 만주 벌판에서 동상 걸려가며 독립군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속에서 일본군과 싸워야만 하는 고생하는 백성을  누가 만들었는가?



 무능과 치욕과 비리로 얼룩진 구한말의  임금과 대신들이다

이들을 친일파보다 먼저 척결하는 것이 진정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들이 원천적인 원인 제공자들이다

친일파와  위안부를 양산한 이들을 반드시 반드시 단죄해야한다 


 왜 친일파 명단처럼 나라를 망하게한 이들의 명단은 만들지 않는가

지금과 후세의 고관대작과 임금이 구한말의 작태를

또 따라해서 나라 잃으면 우짤라꼬 이카나


<구한말의  작태>

매천야록 구한말 <황현(黃玹)>이 고종 1(1864)부터 순종 4(1910)까지


47년 간의 역사를 지식인의 눈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는 1910合邦領이 반포(829: 국치일)되자 絶命詩남기고 자결했다.


원문은 한문으로 돼 있어 번역본(옮긴이: 연세대교수 허경진)읽고 참조한 것임을 밝힌다.


한 번쯤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란다.



[1]:


國必自伐而後人伐之(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뒤에 남이 치느니라)


고종 31년 갑오년(1894)에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동학란)이 일어났다.


동학교도들이 全州를 함락하자 기세에 눌린 조정은 <>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189455일에 청군이 아산만으로 상륙했고,


청일 양국 간에 맺은 천진조약에 의거 일본군도 하루 뒤인 56일에 인천항으로 출병했다.


이때, 왜국 함대를 이끈 왜국 공사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였다.


그는 휴가 차 본국으로 갔다가 함대를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우리 정부에 <516>의 개혁안을 내밀며 개혁을 요구했다.


분명한 내정 간섭이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우리 정세에 따라 처방해준 약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모두 스스로 할 수 있는 쉬운 것들을 에 의해서 하게 됨을 보고 <황현>이 탄식했다.


<우리가 힘써 행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화가 있었겠는가?


옛말에도 이런 것이 있으니, 아 실졍.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뒤에 남이 치느니라(國必自伐而後人伐之).”>


          ※≪孟子: (離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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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나라 공사가 임금의 매관매직을 비웃다.


고종 37년 경자년(1900) 12월에, 청나라 공사 <서수붕(徐壽朋)>이 본국으로 보고했다.


그가 처음 임금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運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임금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저의 본국은 벼슬을 팔아 먹은 지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 먹은 지 삼십 년이나 되었는데도 제위(帝位)가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


슬프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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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지용>그의 아내 <홍씨>의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다.


고종 43년 병오년(1906),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다.


이때 그의 아내 <홍씨><이홍경>이라 이름을 짓고 함께 갔다.


이홍경은 처음에 왜국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와 정을 통했고,


<쿠니와께 쇼타로(國分象太郞)>와도 통했으며,
나중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도 통했다.
모두 조선(통감부)을 드나든 고위층 왜놈 관리였다.
<萩原守一>이 귀국할 때, 이홍경이 배웅 나와 입을 맞추며
그의 입에 혀를 들이밀자 <추원수일>이 그 혀를 깨물었다.
이홍경이 아픔을 참고 돌아오자 장안 사람들이 작설가(嚼舌歌 )’지어 비웃었다.
그녀는 양장차림으로 이지용의 손을 잡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인력거를 타고 얼굴을 드러낸 채 권련을 물고 우쭐거리며 달렸는데, 행인들이 눈을 가렸다.
이지용이 이홍경과 찍은 사진을 사랑 대청에 걸어 놓았는데,
이따금 종놈이 막대를 들어 그 음부를 찌르며
여기가 왜놈의 구멍이다하면서 낄낄댔다.
왜놈들도 질시하여 이홍경이 왜놈들과 끌어안은 모습을 찍어서 팔았는데,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장안에 나돌았고 개항장까지 퍼졌다고 한다.
이지용은 허랑방탕하여 임금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는데,
이홍경이 <엄비>에게 드나들면서 임금의 뜻을 돌려 놓아 마침내 권세를 잡았다.
아내 덕을 입었으니 아내의 방자한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부대신이 된 이지용 또한 더욱 방자하여 乙巳五賊의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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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하자 아들이 자살하다.

순종 1년 정미년(1907), 이완용의 아들 <李明九>의 아내인 <임씨>임대준의 딸이다.
이명구가 왜국에 들어가 몇 년 간 유학하는 사이에 이완용이 간통했다.
그가 돌아와 어느 날 안방에 들어갔는데
이완용이 임 씨를 끌어안고 누운 것을 보고 나와서 탄식했다.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그가 자살하자 이완용이 독차지하여 뻔뻔하게 첩처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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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 박람회에서 한국인을 구경거리로 전시하다.

고종 44년 정미년(1907), 부산 백성 <정덕규>와 대구 여인 <박씨>

왜놈에게 유인당해 동경으로 갔다.

두 사람은 서른도 되지 않았고 모두 어리석었다.
왜놈들이 이들을 한국 옷차림으로 꾸몄는데,
정덕규는 상투에 망건으로 묶고 큰 삿갓을 씌워 소매 넓은 도포를 입게 했고,
박 씨는 쪽을 지고 좁은 소매의 적삼과 긴 치마를 입혔다.
그리고 의자에 묵묵히 앉아 있게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을 꿈틀거리는 동물 정도로 얕보고 박람회에 출품한 것이다.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두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다.
마침 그곳에 시찰 중이던 <민원식>이 그 광경을 보고 몸값을 내고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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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안중근><이등박문>을 죽이자 우리 정부의 대응은 이랬다.

순종 3년 기유년(1909), <안중근>이 할빈에서 <이등박문>을 죽이자,
우리 정부 측은 이렇게 대응했다.
- 이완용/윤덕영/조민희/유길준은, 양궁(兩宮)이라고 속여
대련(大連)으로 나아가 조문했고,
임금은 통감부에 나아가 친히 조문하고 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3만 원을 부의하고 유족에게는 10만 원을 주었다.
- <이학재> 등은 이등박문의 송덕비를 세우자고 건의했으며,
<민영우> 등은 이등박문의 동상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이놈들이 미치광이처럼 분주하게 돌아다니자 왜놈들이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 순종이 조문사로 <민병석>을 보냈고, 태황제 고종은 <박제빈>을 보냈다.
원로 대표로 <김윤식>이 함께 일본으로 갔다.
황태자 <이은>은 이등박문을 사부(師傅)로 모셨으므로
스승에 대한 예로 3개월간 상복을 입었다.
- <일진회>가 합방론을 제의하여 임금께 아뢸 것을 청했으나 <이완용>물리쳤다.
이완용은 자기가 합방론을 주장하려다가 일진회에 선수를 빼앗겨
시기심에서 물리친 것이다.
이상의 여섯 이야기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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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도 自伐行爲가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自伐이라는 말에서, 끊임없이 국가를 음해하고 利敵행위를 일삼는
從北左派모습이 떠오릅니다.

 

[
2]
우리가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
3] [4]는 권

권력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고

오만방자하게 만드는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5]

無知함의 悲哀를 느끼게 합니다.

일본 놈들이 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조선 백성이 우매한 탓이었을까요?
[6]

속의 면면을 보면, 영혼도 국가관도 없는 관료와 國害의원들을 생각하게 되고,

일진회의 망동(妄動)을 보면, 북한 노동당의 남한 2중대가 연상됩니다.
대한제국시절의 이야기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해당사항이 없을까요?
새겨 둡시다 -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뒤에 남이 치느니라!>
                          ​()
                ​글쓴이: 최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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