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史에서 살펴본 讓寧大君
★양녕대군은 1394년(태조3년)에 송경(松京)의
정안대군(靖安大君-太宗大王)사저에서 여흥 민씨(麗興閔氏-후일 元敬王后)
사이에서 장자로 탄생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조선왕조가 개국한지 3년이며,
송경(松京-개성)에서 한양(漢陽-서울)으로 천도(遷都) 했던 뜻 깊은 해다.
양녕대군은 1402년(태종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諱)을 받았으며,
같은 해 4월 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는데, 그때 원자의 나이는 9세이다.
11세인 1404년(태종4년) 8월 6일 조선조 4대 임금이 될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2년 후인 1406년(태종6년) 8월 태종대왕은
천재지변이 자주 있어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 하였으나,
왕세자는 극력 사양하므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수차에 걸쳐 태종대왕께서는 국새(國璽)까지 세자궁(世子宮)에
보내시어 전위하려 하였으나,왕세자께서는 그때마다
“신은 어리고 아는 것이 없음으로 감히 사양합니다.”하고
매번 정중하게 사양한 것이다.
왕세자는 1407년 7월 14일 김한로 정승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숙빈(淑嬪)으로 봉하였다.
왕세자는 천성이 효우하고, 학문에 영민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특별하였다.
“왕세자는 후일 큰 정치를 이룰 대인물” 이라며,
조야의 인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영명한 소문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明나라 황제인 성조(成祖)는
왕세자를 보기 위해 입조(入朝)시키라는 명을 내렸고,
그해 9월 25일 왕세자는 태종대왕과 만조백관의 전송을 받으며,
완산부원군 이천우, 단산부원군 이무, 계성군 이래, 재학 맹사성,
총재 이현, 서장관 집의 허조 등 신하들과 배종원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영서역(迎曙驛)을 출발, 明나라 서울(京師)에 진표사(進表使)로 떠나게 된다.
우리나라는 예로써 사대를 하여 중국과 통교(通交)하고,
공물(供物)을 바치며 세시(歲時)에 사신을 파견하니,
이것은 제후의 법도를 닦고 맡은 바의 직무를 보고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로 학문이 풍부하고, 사명(辭命)이 능란하여,
사신임무를 오로지 수행하고 국가의 아름다움을 선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러한 직책을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태종대왕이 즉위한 이래로 무릇 조정사(朝正使), 성절사(聖節使),
진표사(進表使), 진전사(進箋使)로 간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밖에도 조선조에서는 계품사(計稟使), 주문사(奏聞使), 사은사(謝恩使),
압마사(押馬使), 절일사(節日使),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 재진관(齎進官),
마적도자문재진관(馬籍都咨文齎進官), 관복사은사(冠服謝恩使) 등이 있었다.
이때 明나라 태종황제(成祖)는 왕세자를 상면한 후
학식과 예의범절이 특출하고, 비범한 인품에 감탄하여
“영명한 왕세자”란 극찬을 하게 되며, 明나라 조정대신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또 황제가 친히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어서 왕세자의 인품을 높이 기리었다.
반년이 넘도록 중국의 문물을 몸소 살피고, 15세 성동(成童)의 나이
이심에도 불구하고, 부여된 임무와 외교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한 후,
1408년 4월 2일 한양인 서울로 귀경할 때,
明나라 황제는 왕세자를 총애하여 인효황후권선서(仁孝皇后勸善書) 150本과,
효자황후전(孝慈皇后傳) 150本을 주었는데,
지금도 지덕사(양녕대군 봉사손의 집)에 그 서책 등 유품일부가 보존되어,
후손들에게 눈물겨운 감동을 주고 있다.
왕세자는 귀경하기 위해 강동역(江東驛)에 이르러, 비통해 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방황(彷徨)하였다.
이에 수행하던 明나라 조정의 대신인 예부상서 정사(鄭賜)는
“조선이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이미 일찍이 알았습니다.
행여 길이길이 있지 마소서” 하였다.
그 후 왕세자는 자주 감국(監國)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진정과 상소를 신하들이 막지 못하도록 강력히 조치 해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추호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이어 민원이 조정에 직접 보고 되도록 하여, 명쾌한 해결을 해 줌으로,
민본정치(民本政治)의 훌륭한 선례를 남겼다.
1409년 천재지변으로 태종대왕께서 상심하여, 청정(聽政)하지 않을 때,
의정부(議政府)가 스스로 재결할 수 없는 대사를 왕세자가 직접 결정 처리했고,
같은 해에 문소전(文昭殿)의 삭제(朔祭)를 섭행(攝行)했으며, 조계(朝啓)에 참석했다.
1411년 9월 중국 사신들을 영접한 왕세자는,
그들의 오만과 방자한 행위를 보고, 소국인 왕세자의 자리에 의구심을 느꼈는지,
그 후로부터 자주 서연(書筵)을 기피하고 결석하는 때가 많아졌다.
그러나 부왕과 모후가 편치 않으실 때는 왕세자가 몸소 탕약을 달여 바쳤으며,
밤잠도 거른 채, 그 곁을 항상 떠나지 않고, 극진한 정성과 간호를 다 하므로,
그 효성에 감동한 부왕(父王)과 모후(母后)의 병이 완쾌되도록 하신바가 수 없이 많았다.
1416년에도 태종대왕이 가뭄을 근심하여 정사를 보지 않게 되자,
왕세자가 계사(啓事)에 직접 참여하여 정치적 역량을 훌륭하게 발휘하게 된다.
1416년 1월 왕세자는 모후에게 충녕대군(후일-世宗大王)의 현명함을 칭찬하며
“국가대사를 장차 충녕과 함께 의논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충녕 아우에게 왕위를 이어지게 할 의향을
우회적으로 모후께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후로도 계속 모후께 자주 표명한 말은
“나는 백성의 집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고자 합니다.” 라고 했으니,
이 말의 근저(根柢)에는 왕세자 양위에 대한 뜻,
즉 왕위사양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왕세자는 왕세자의 자리를 충녕(忠寧)아우에게
넘겨주기 위한 가시적(可視的)인 방법으로 태학(怠學),
정강(停講), 응견(鷹犬), 종주(縱酒), 잡기(雜技) 등
세인의 눈에는 기행(奇行-이상한 행동)으로 비쳐져,
끝내는 부왕인 태종대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며,
1416년 태학(怠學), 소인친접(小人親接) 등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신(自新)할 것을 표명하였고, 1417년에는 개과천선할 것을
종묘에 고하는 서문(誓文)과 태종대왕에게 맹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1418년 5월에는 태종대왕이 왕세자에게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글을 직접지어 올렸는데, 결국 이 왕세자 수서사건(手書事件)은
직접적인 발단이 되어 황희, 이직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6월 3일, 미증유의 왕세자폐위(王世子廢位)라는
역사적인 날을 만들어 내게된다.
이때를 당하여 왕세자는 “옛날에 이미, 사양하기를 수차에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 뜻을 이루었다”하고
다른 말이 일체 없었다.
그리하여 왕세자의 자리에서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광주, 이천 등지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왕세자의 자리는 택현(擇賢)의
원칙아래 셋째인 아우 충녕대군에게 넘어갔으며,
황희, 이직 등도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1436년(세종18년)에 세종의 배려로, 이천에서 과천(果川)으로 양이(量移)되고,
1년 뒤인 1437년(세종19년)에 서울의 본가로 돌아왔다.
실로 서울을 떠난 후 19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위와 같이 살펴봤듯이 양녕대군은 왕세자로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하등의 미련이나 애착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극명하게 표출되었데,
절대 권력이 지배했던 왕권통치시대라고는 하나,
대국인 중국조정의 영향권에서 우리왕정이 좌우되던 그 당시의
외적인 정치현실과 아울러, 또 내적으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궁중암투,왕권수호를 위한 무자비한 피의숙청,선왕시절의
두차례에 걸친 살육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王子의 亂”등을
지켜보면서, 절대 권력의 냉혹함과 비정함, 그리고 허무함에
깊은 회의와 갈등을 느꼈으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결과적으로 권력에 대한 연민의 정은 급기야
정치권력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어졌으리라고 감히 상상해 보는 것이다.
천승(千乘)의 자리인 왕세자의 자리도 초개처럼 버리고,
스스로 백성이 되겠노라 모든 것을 사양하였던 거룩한 양녕왕세자!
신민(臣民)과 더불어 애환을 같이 나누던 애국애민의 극치를 이룬
성스런 왕세자가 있었기에, 5천년 우리역사에는 물론이요,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숭고한 사상과 철학을 남겼다.
오늘날도 권력을 잡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정치현실을 바라볼 때 양녕왕세자가 걸었던,그 위대한 생애는
역시 고매한 인격과 사상, 심오한 철학의 성인(聖人)만이
풍길 수 있는 영원한 향기이며,숭고한 그 뜻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값진 교훈으로 남아 청사를 빛내고 있다.
무위자연과 벗 하며 "大自由人"으로 영롱(玲瓏)하게 살아간
그 고결하고,청아한 대군의 참모습을 상상하면서········
대군으로 강봉(降封)되신 양녕대군은 백성의 행장(行裝)차림으로
모습을 감추고, 만백성의 생활형편과 민심의 동태를 파악하고,
아우인 세종대왕에게 소상하게 알려 만백성 모두가 바라는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좋은 나라 세우기에 심혈을 다 하였다.
그로인해 우리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정치(聖君政治)의 시대를 열어
그 열매를 맺도록 한 것이다.
대군의 아우이신 세종대왕이 이토록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고,
수많은 업적을 쌓게 한 배후에는 언제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의
숨은 노력과 도움 있었고,세종대왕은 큰 형님 양녕대군 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을 잘 받들어 현실정치에 조화롭게 잘 반영하였기에,
그러한 훌륭한 일들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녕대군은 어린 시절부터 천성이 매우 활달하고 대범하여
활쏘기 등 무예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문과 서예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났기에 1412년(태종12년) 경회루(慶會樓-국보224호)의
편액을 왕세자시절에 이미 부왕의 지시로 크게 써서 걸게 하였으며,
남대문위에 걸려있는 현판인 숭례문(崇禮門-국보1호)과,
초서체인 후적벽부(後赤壁賦)도 양녕대군이 직접 쓴 친필로써,
숭례문현판 탁본(拓本),후적벽부팔폭병풍과 그 초서체 목각판이
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안에 잘 보전되어 대군의 특출한
서도(書道)의 진면목을 측량케 한다.
또 양녕대군이 지은 제향산승축(題香山僧軸),유별정향구난가(留別丁香九難歌),
희증서관기(戱贈西關妓),증별정향(贈別丁香), 속리산문영월흉보(俗離山聞寧越凶報) 등의
詩가 만인의 심금을 울리며,지금까지 애송(愛誦)되어 전하고 있는데,
그 시들은 대군이 얼마나 절세(絶世)의 대 문장가였던 가를
시공을 초월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다.
山霞朝作飯 산허리 걸친 노을은 아침을 짓는 연기인가
蘿月夜爲燈 칡넝쿨에 걸쳐있는 달은 밤을 밝히는 등불이네
獨宿孤菴下 외로운 암자 아래서 나홀로 머물고 있으니
猶存塔一層 사찰의 탑 하나만 저만치 서있네
양녕대군은 향년 69세인 1462년(세조8년) 9월 7일에 서세(逝世)하였으며,
그때 유언을 남기시기를“나라에서 예절을 갖추어 치르는 예장(禮葬)은
받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고 상석도 놓지 말고 묘소를 극히 검소하게
백성들과 똑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때 조정에서는 양녕대군의 부음(訃音)을 전달받고,
임금인 세조가 슬피 애도하여 3일간이나 정사를 폐하고,
또 강정(剛靖-마음이 곧고 뜻이 굳세며 과감한 것을 강(剛)이라하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즐겁게 생활하시다가 아름답고 편안하게
생을 마치는 것을 정(靖)이라함)이라는 시호(諡號)를 정했다.
묘소는 금천 강적동이니,지금의 서울 동작구 상도동
산 65-42번지 곤좌간향(坤坐艮向)이다.
이 묘소 터는, 대군이 서세(逝世)하시기전에 직접 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군은 순성군, 함양군, 서산군, 고정정, 장평정, 계천정(무후),
봉산정(무후), 안창정, 돌산정, 금지정(무후),등
열명의 아들과 열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대군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대군의 8대 후손 공조참판 만(曼)과 9대손 부사 성환(性桓)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한일합방의 경술국치일 전야인 야밤에, 뇌음과 함께
무고자괴(無故自壞)하였으니,이는 대군의 우국충정과
기상의 발로로써,망국의 울분을 표출한 생생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부러진 비는 영구세전(永久世傳)하고자 대군의 20대 봉사손(이 황)과
유지종친들이 뜻을 모아 1988년 음력10월 10일 복원하여
사당 북쪽에 잘 간직하고 있다.
본문용어해설
천도(遷都-도읍을 옮기는 일.
원자(元子-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왕세자(王世子-왕위를 이을 왕자.
전위(傳位-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줌.
국새(國璽-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세자궁(世子宮-왕세자가 거처하던 궁전.
입조(入朝-외국의 사신이 조정의 조회에 들어가던 일.
어제시(御製詩-황제나 임금이 지은 詩.
성동(成童-열다섯 된 사내아이를 이르는 말.
사대(事大-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
감국(監國-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보살피고 지키는 일.
청정(聽政-정사에 관하여 신하가 아뢰는 말을 임금이 듣고 처리함.
의정부(議政府-백관을 통솔 서정을 통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
문소전(文昭殿-태조 고황제와 신의황후 위패를 모신 사당.
삭제(朔祭-왕실에서 매월 음력 초하루마다 조상에게 지내던 제사.
조계(朝啓-중신과 시종신이 편전에서 관원의 罪를 논하고
단죄내리기를 임금에게 아뢰는 일.
서연(書筵-왕세자가 글을 읽던 곳.
계사(啓事-임금에게 사실을 적어 올리는 서면.
자신(自新-스스로 지난허물을 뉘우쳐 깨닫고 새 길로 들어섬.
택현(擇賢-어진 사람을 고름.
양이(量移-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
천승(千乘-1천대의 兵車라는 뜻으로 제후를 이르는 말.
서세(逝世-별세의 높임말.
시호(諡號-帝王이나 宰相, 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곤좌간향(坤坐艮向-묏자리나 집터가 곤방(坤方)을 등지고
앉은 좌향,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한 위치를 일컫는다. 풍수지리설
영구세전(永久世傳-오랫동안 세상에 전하는 것.
李 承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