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어쩌구 저쩌구

명문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컴플렉스 타개

칠봉인 2013. 11. 5. 23:05

명문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컴플렉스 타개

        

영조는 자신의 자녀들은 쟁쟁한 가문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고

 

하나같이 노론의 명문가문과 연결을 맺는데

 

특히 사도세자의 혼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국혼(國婚)이었다.

 

먼저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昭裕映嬪) 이씨(李氏)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보다는 훨씬 나은 가문에서 태어난 후궁이었다.

 

영빈의 부친인 이유번(李楡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내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별제(別提, 정6품)를 지낸 무반(武班)출신이었다.

 

영빈의 외가는 예천김씨(醴泉金氏)로 외조부가 오위 부호군(五衛 副護軍, 종4품)을 지내어

 

그나마 반가(班家)의 체면을 지녔던 가문이었다고 한다.


외아들의 외가마져 그다지 이름 높은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조는 며느리는 훌륭한 가문에서 골라야겠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결국 사도세자가 10살 되던 해,풍산홍씨(豊山洪氏)의 가문에서 세자빈(世子嬪)을 들이게 된다.

 

당시 생원(生員)이었던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딸을 간택하게 되는데

 

이 집안은 상당히 혈통적으로 무게감을 지니는 노론(老論)의 명문이었다.


 

 

14대 선조가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적자녀(嫡子女)는

 

모두 2인이었는데 바로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와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으로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낳은

 

자녀들이다.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을 죽인 후, 선조의 정실부인 자손은

 

오로지 정명공주의 후손들이었다.

 

정명공주는 남동생의 죽음 이후 간신히 하가(下稼)하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풍산홍씨 집안으로 갔다.


풍산홍씨는 원래 당파적으론 남인(南人)에 속한 가문이었으나

 

부마가 되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진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집안만은 유일하게 서인(西人)에 분류되는 '흥미로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홍주원의 외조(外祖)가 그 유명한 연안이씨 집안의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인지라 홍주원 집안은 풍산홍씨 중에서

 

서인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이정구는 서인계열 핵심가문 중의

 

하나인 연안이씨(延安李氏)였는데, 특히 이정구의 고조부였던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후손들은 대부분 골수 '노론(老論)가문'으로 분류되었다.

 

성종때 좌리공신이었던 이석형의 자녀는 2남1녀였는데

 

그중 외동사위가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안의 송여해(宋汝諧)였으며

송여해의 6세손에서 노론의 영수'가 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나왔다.  

 

연안이씨 이석형의 자손들은 사림(士林)이 파당(派黨)으로 나뉠 때

 

대부분 서인(西人)으로 분류되었고,

 

훗날 다시 분당 때엔 노론의 핵심가문으로 떠올랐다.

 

홍주원은 이런 위세 높은 외가(外家) 덕분에 '선조의 부마(영안위)'가 되었고

 

엄청난 복록(福祿)을 누리다 죽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선조 정실 공주의 부마였던 '영안위 홍주원'의 현손(玄孫)이

 

바로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이다.

 적(敵)이었던 사도세자의 처가
 
사도세자의 세자빈이 된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뒤에 敬懿王后)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핵심가문 출신으로서

쟁쟁한 친족들을 두고 있었다.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담한 죽음을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살아 생전, 사도세자는 세자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홍씨를 세자빈을 둔 후 그는 바로 다른 여인들에게 관심을 돌렸고

 

곧 후궁들이 생겨 자녀들을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혜경궁은 2남2녀를 낳았는데

 

첫째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은 요절했고

 

둘째가 바로 정조(正祖, 1752~1800)였다.

 

뒤를 이어 두 명의 군주(郡主)를 낳았는데 모두 성인이 되었고

 

명문 집안에 하가하여 자손을 낳았다.

 

사도세자는 두 명의 세손을 낳아 자신의 임무를 다하였다.

 

거기다가 또 다른 자식들(서자 왕손 3인과 현주 1인)도 얻어서

 

영조는 후계의 근심을 어느정도 덜 수가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노론 핵심의 며느리에게서 정당한 후계자였던

 

정조를 얻음으로서 골치아픈 아들의 비행(非行)에 대해 단죄를

 

내릴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이었다.


1762년 그 해 여름은 격렬하였다.

 

집권세력인 노론은 사도세자의 정치적 방향에 엄청난 회의감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영조가 여러번에 걸쳐 세자에 대한 양위(讓位)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본의에 의한 말은 아니었고, 적어도 비대해진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에 대해

 

도전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 차원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이런 양위소동은 오히려 아들 사도세자의

 

정치적 목숨줄을 죄어놓는 결과로 나타났다.

 

세자는 왕권을 도전하는 노론보다는 소수파로 몰락해버린 소론에 대해

 

깊은 애정을 왕권의 대리(代理)기간에 표시하기 시작했기 따문이었다.

 

세자의 정치적 소신에 대해 노론은 극도의 도전감을 느꼈고

노론의 세자를 향한 인식에 대해서 영조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다 어느 한 쪽이 패배한다면

 

그 휴유증은 조선의 사회를 뒤엎고도 남음이 있는 엄청난 파장이 될 것이라는 걸

 

영조도 모를리가 없었다. 더구나 숙종 때처럼 '국왕의 정통성'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권이 당파로 인해 쪼개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노론 이외 정치마당을 대체할 세력은 이미 경종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이 시기 노론의 신권이 왕권과 부딪힌다면 양 편의 공멸은 뻔한 이치였다.

 
  

 아들을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보존한 아버지

특히 몰락한 소론에 동정을 가지는 세자를 두고서

 

노론도 서서히 분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론 중에서 세자의 편에 서는 자는 아주 극소수였다.

 

세자의 정치논리는 노론의 중심부와는 전혀 맞지 않았고

 

갈등의 끝은 영조의 결단에 달렸었다.

 

영조는 결국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보존하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결단의 끝은 부자간의 비극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인 세자는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도 아사(餓死) 당하게 되었다.

 

아들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영조는 엄청난 후회를 한들

 

현실은 이미 비극으로 종결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현실 정치 논리에 원망을 가했고,

 

그 감정을 사도(思悼, '잘못이 있어 일찍 죽은 것을 애도한다'라는 뜻이다)라는

 

시호에 넣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는 다시 고달픈 신경전을 펼쳐야했다.

 

피를 먹어 본 권력은 다시 아들 뿐만 아니라

 

손자의 피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유일하게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은 '세손 이산' 뿐이었다.

 

그러나 노론의 핵심부 눈에는 '세손 이산'이라는 인물은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였다.

 

언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복의 칼날을

 

집권세력인 노론에게 겨눌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조는 노론으로부터 어린 세손를 살리기 위해 족보를 바꾸기로 한다.

 

바로 어린 나이로 죽은 백부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정조를 계(出系) 시켜

사도세자와의 인연을 끊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정조 행차도 속의 '혜경궁 홍씨의 가마')

 

 

할아버지의 결단으로 '세손 이산'은 아버지를 바꾸게 되었는데

 

조선시대 양자(養子)의 개념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죽을 때까지 양부가 아버지가 되고 족보에도 그렇게 기록되는 것이다.

 

세손 생부였던 사도세자를 '숙부'라 불러야했고

 

백부인 효장세자를 '아버지'로 부름으로서 노론의 예봉을 피해나갔다.

 

그러자 다시 권력다툼은 어이없게도 세손의 이복동생들까지

 

끼어들이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영조가 죽었을 때 후손은 세손과 그 3명의 이복동생들 뿐이었다.

 

즉 총 네 명의 왕손들만이 왕위후보자였는데,

 

그들은 정조와 은언군(恩彦君)과 은신군(恩信君)

 

그리고 은전군(恩全君)이라 불린 3명의 서출(庶出) 왕손들이었다.

 

서2남이던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이었던 연령군(延齡君)의 후사로 나가서

 

사도세자의 족보에서 빠졌고 유력 후보는 역시 은언군과 은전군이었는데,

 

특히 은전군이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 당하는 대상인물이었다.

 

은전군의 어머니가 사도세자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른 형제와는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英,正組 시대 이후의 조선 왕실

 

사도세자의 후궁 아들들은 제 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갔다.

 

정치적인 변동에 항상 약자로서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는데

 

워낙 왕손이 없다보니 툭하고 터지는 역모사건에

 

그들의 이름이 안 올려지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왕손의 숫자가 뻔하다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직계후손을 남긴 왕손은 오직 은언군 뿐이었다.

 

  그 은언군의 자식들도  부친처럼 계속 정치적인 이용만 당하다가

 

  종국엔 비명에 목숨을 잃어갔고

 

  겨우 손자대인 철종(哲宗, 1831~1863)만이 억세게 운좋게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보상을 받게 되지만,

 

  철종이 후사없이 죽음으로서  그를 마지막으로 효종의 직계 후사는 단절되고 만다.

 

 그토록 간신히 이어져 내려오던 효종의 남계 자손은 철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되고

 

 마지막 조선의 명맥을 이어준 고종과 순종은 유전적으로는

 

 인조의 3남이었던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후손들이다.


 

  고종의 조부였던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은 인평대군의 7세손으로

 

  은신군의 양자(養子)로 입적되면서 근친 왕손으로 인정받은 사례이다

.

 참고적으로 고종의 계통은 족보상 영조의 계통이기보다는

 

  숙종의 6남인 연령군(延齡君)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이 소목(昭穆)의 차례를 벗어나

   

 조부뻘인 연령군의 계자(系子)가 되었고

 

 이어 남연군이 은신군의 계자로 집안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철종은  순조의 계자로 입적되어 대통을 이어나갔는데

 

 순조는 철종의 당숙(堂叔, 5촌 아저씨)이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 왕실은 상당히 어려운 난국에 봉착한 상태였다.

 

 점점실의 권위가 혈통적인 면에서부터 잃어가면서

 

 그에 따라 권력의 힘은 약화되었다.

 

 숙종의 사후 정실(正室)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정조와 헌종(憲宗, 1827~1849) 뿐이었다.

 

 정조조차도 왕비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결국 여러 후궁을 들여

 

 간신히 후사 순조(純祖, 1790~1834)을 얻었고,

 

 순조 또한 아들이라고는 문조(文祖, 1809~1830) 뿐이었으며

 

 문조 또한 자식이라곤 헌종 밖에 두지 못했다.

 

 

 왕자의 수 만큼이나 왕권의 힘은 점차 줄어갔고

 

 결국 '방계 중의 방계'였던 철종과 고종이 연이어 들어옴으로서

 

 왕조의 권위와 왕권은 땅에 떨어졌으며

 

 서서히 황혼(黃昏)이 지는 왕조로서 그 이름만 남아

 

 1910년까지 그 명맥을 다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