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先烈)들의 절명시(絶命詩)
"선열(先烈)들의 절명시(絶命詩)
[ 김 중 위]
오늘에 우리가 누리는 번영은 어쩌면 우리 순국선열들이
뿌린 혼백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선열들의 절명시를 되짚어 보고자 함이다.
이 시들이야 말로 오랫동안 잊혀 진 우리의 영혼의 메아리라 여겨진다.
我生五百末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
赤血滿腔腸 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
中間十九歲 19년 동안을 헤매다보니/
鬚髮老秋霜 머릿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네
國亡淚末己 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
親沒痛更張 어버이마저 가시니 슬픈 마음 더더욱 섧다/
獨立故山碧 홀로 고향 산에 우뚝 서서/
百計無一方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가이 없다./
欲觀萬里海 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
七日當復陽 7일만에 햇살이 돋아오네/
白白千丈水 천길 만길 저물속에 뛰어 들며는/
足吾一身藏 내 한몸 파묻기 꼭 알맞겠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적이 있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
자결하기 1년 전인 1913년에 쓴 절명시(絶命詩)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순사(殉死)하려 하였으나
부친이 있어 뜻을 미루어 오다가 부친상을 다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1914년에 절명시에서 밝힌 대로 도해순국(蹈海殉國)을 결행하였다.
도해순국이란 무엇인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 죽었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자!
가족과 친지들이 통곡으로 전송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유유히 바다 물속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들어가 마지막
손을 흔들며 죽었을 그 장엄한 모습을 말이다.
요즈음처럼 더운 여름철도 아니다.
칼바람에 찢긴 파도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내고
짐승처럼 울어 대던 동지날,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앞바다에서다.
그는 죽기 벌써 1년 전에 이 시를 통해 스스로 그렇게 죽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번에 죽지 못하는 질긴 목숨을 끊기 위해
세 번씩이나 아편을 먹고서야 목숨을 끊을 수 있었던 매천(梅泉)황현(黃玹)과
어찌 그리도 한 마음이었을까?
五十年來判死心 오십 평생 죽기를 다짐했던 이 마음
臨難豈有苟求心 국난을 당하여 어찌 살 마음을 먹으리
盟師再出終難復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끝내 나라를 찾지 못하니
地下猶餘冒劍心 지하에도 남아 있을 칼날 같은 이 마음
이 시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이강년(李康秊)이 1908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쓴 절명시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면서 이런 격문을 발표 하였다.
“~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욕뵈니 원수를 어찌남겨두겠는가?”하고 말이다.
難復生此世上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
幸得爲男子身 다행히 장부의 몸을 얻었건만/
無一事成功去 이룬 것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
靑山嘲綠水嚬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
母葬未成 어머님 장례마치지 못하고/
君讐未復 임금의 원수도 갚지 못했네/
國土未復 나라의 땅도 찾지 못했으니/
死何面目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 가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그 사령관으로 무장투쟁을 벌렸던
박상진(朴尙鎭)이 1921년 8월 대구감옥에서 사형당하는 날
아침에 쓴 시와 사형당하기 하루 전에 쓴 시다.
박상진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 근무발령을 받았으나
그 즉시 사퇴하고 그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석주 이상룡 및 일송 김동삼과
같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다가 1915년에 대구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밀고한 칠곡의 부호
장승원을 광복회 이름으로 처단한 사례는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훗날 우리정부가 친일인사 청산에 게을리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부호의 아들이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정부 요직에 있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登樓遊自却行路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可歎檀墟落木橫 낙목이 가로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男子二七成何事 남아 27세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慨生 잠시 가을바람에 감회가 이는구나
위의 시는 신화적인 인물 신돌석(申乭石)이 남겨 놓은 시다.
얼마나 잘 싸웠으면 별명이 ‘태백산 호랑’이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지자 18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중에서 유일한 평민출신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8년 11월의 어느 날 그에게 붙은
현상금에 눈이 먼 조선인의 손에 의해 살해 되었다.
순국선열들이 토해 내는 단심의 애국충정이 새삼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