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어쩌구 저쩌구

[스크랩] Re: 고조선부터 조선까지의 연표

칠봉인 2013. 8. 16. 20:24
  • 고조선부터 조선까지의 연표
  • - 숙종(1674년 ~ 1720년)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가 숙종때이다. 당시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숙종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기도 했다. 선조시대부터 시작된 신하들의 당파싸움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당파싸움에서 승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왕들이 자신을 지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이를 이용해서 한 당파가 세가 너무 커졌다 싶으면 그 당파를 싹 몰아내고, 다른 당파로 조정을 채웠다. 숙종의 이러한 행동은 왕권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당파들의 대립을 더욱 부채질한 측면도 있었다. 1680년 숙종은 남인을 내쫓고 서인을 불러들였는데, 이 때 서인이 남인을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노론과 그에 반대하는 소론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로써 조정에는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이렇게 네 개의 당파가 존재하게 되었다. ※ 당파싸움의 원인과 발생 당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면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 경종(1720년 ~ 1724년) - 영조(1724년 ~ 1776년) 탕평책이란 신하들을 공평하게 대하여 당파 싸움을 없애고자 하는 정책이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당파 싸움을 많이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나, 또한 슬픔도 맛봐야 했다. 영조가 왕이 된지 25년이 흘렀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아 세자가 영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자 남인과 소론 등이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고 했다. 이에 노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영조는 젊은 왕비(정순왕후)를 새로 들였다. 노론들은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세자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순왕후에게 접근하였다. 이에 정순왕후도 노론과 함께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들여 자꾸 꾸짖었고, 세자는 마음이 상해 함부로 행동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궁녀를 죽이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이로 인해 영조는 다시 나라 일을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1761년 세자가 영조 모르게 관서지방(평안도 지방)을 다녀왔다. 그러자 노론들은 관서지방에 다녀온 것은 사람을 모아 주상전하를 밀어 낼 음모를 꾸미기 위함이라고 세자...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lloRe지룡oll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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