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秘史 2005/04/30 21:46 | 추천 0 스크랩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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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켰다는 거짓말을 믿고 계십니까?
1933년 1월 31일, 히틀러의 제3제국 출범
(세계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의 첫 삽을 뜨는 히틀러)
Rabbi Manfred Reifer 유대교 지도자 (獨)
"유태인 상점에서 사지맙시다!"
DAILY EXPRESS 영국 일간지
(우드로 윌슨과 하우스: 돈과 협박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들을 부리는 청사진 'Philip Dru: The Administrator'의 저자 유태인 에드워드 만델 하우스;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창설)
유태인 금융재벌 버나드 바룩 “월스트릿 투자은행가 버나드 바룩은 1차대전 당시 미국의 산업계를 조율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윌슨 행정부 산하에 설치된 전시산업위원회의 총수였다... 바룩은 단 한 번도 선거에 의해 임용되는 공직에 선출된 바가 없었음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의 대통령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룩은 여섯 명의 미국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정부각료, 상하원의원, 군장성, 외교관, 정당인사들에 대한 ‘고문’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전시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는 미국의 산업계를 사실상 통치했다.” (Margaret L. Coit, Mr. Baruch, 1957)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건강상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호브카우에 있는 버니 바룩의 농장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바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도로시(Dorothy Schiff, 야콥 쉬프의 손녀로 뉴욕포스트 사주)는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엘레노어는 바룩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룩은 루즈벨트가 치른 선거전들에 대한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도로시 쉬프 역시 루즈벨트의 영향력있는 측근이었다... 그녀는 1938년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휴양중이던 루즈벨트를 방문했다... 도로시 쉬프의 회상에 의하면, 루즈벨트는 바룩이 자신을 불렀을 때만 그와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알게될까봐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한다.” (Jeffrey Potter, Biography of Dorothy Schiff, 1976)
(미국의 국익보다는 국제유태인을 위해 일했던 FDR;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날짜와 시간까지 알고 있었으나 현지 군 책임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1933-1945)
“사무엘 로센만, 벤자민 코헨, 필릭스 프랑크푸터, 데이빗 릴리엔탈, 버나드 버룩, 앤 로센버그, 시드니 힐먼, 데이빗 나일스,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헨리 모겐소 2세(미국 재무장관, 1933-1945), 그리고 허버트 리먼(뉴욕주지사) 등 루즈벨트는 누가봐도 유태인임이 분명한 인사와 참모들로 스스로를 둘러쌓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수우익은 루즈벨트가 주창한 ‘뉴딜' 정책을 ’쥬딜(Jew Deal, 유태인의 책략)'로 공격했다.” - Barbara Matusow, Washingtonian, May 2000
(운터마이어의 윌슨 대통령 협박으로 유태인 최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된 시온주의자 루이스 뎀니츠 브랜다이스; 브랜다이스는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으며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주의자로 지목되었던 딘 애치슨의 후원자였다.)
(허버트 리먼, 유태인 금융재벌 리먼가문(리먼브라더스) 일족, 뉴욕주지사, 상원의원, 1950년대초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세력 비호로 유명)
“확실한 출처에 의하면 72인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문들 가운데 52명이 유태인이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대다수가 외국에서 태어난 자들이란 사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현재 미합중국 부동산과 천연자원의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으며 워싱턴 관료층의 8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William Dudley Pelley, The Hidden Empire, 1937
Father Charles E. Coughlin
They plan the wars and through "foreign policy"
- Curtis B. Dall, My Exploited Father-in-law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s Jewish Cabal
Some of these Jews were directly responsible for plunging America into WWII by deliberately alienating America from anti-Communist countries such as Germany and Japan long before the outbreak of hostilities. These Jews also pioneered the idea of Big Egalitarian Government in America; some of them were later discovered to have been spies for the Soviet Union.
ONE MAN JEW MONEY COULDN'T BUY OFF
Long was buried on the grounds of the new State Capitol that he championed as governor, where a statue depicts his achievements. More than 100,000 Louisianians attended his funeral at the Capitol. The minister at the funeral service Gerald L. K. Smith, co-founder of Share Our Wealth and subsequently of the America First Party, later claimed that Long's assassination was ordered by "the Roosevelt gang, supported by the New York Jew machine." - Wikipedia
http://www.hueylong.com/
(영국 언론재벌, 로더미어 卿과 히틀러; 그의 동생 노스클립 卿은 '시온의정서'를 영국에서 최초로 출간한 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다)
Lord Rothemere
Samuel Untermeyer 유태인 월스트릿 변호사, 정계 거물
(루즈벨트 주변의 유태인 거물들: 운터마이어, 뒷줄 가운데; 자칭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 엘레노어 루즈벨트, 영부인, 앞줄 왼쪽)
"다른 민족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유대민족만은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어떤 박해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유태인이야말로 이 세상의 귀족이다.” - London Investigator, June, 1935
Emil Ludwig 유태인 역사가 (佛)
(이스라엘 리쿠드 운동의 거목 야보틴스키)
Vladimir Jabotinsky 시온주의 지도자 (팔레스타인)
Julius Streicher Der Sturmer(돌격병) 발행인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유태인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 유태인은 민주주의라는 가면 뒤에 숨어 이들 나라를 통치한다.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유태인의 지배를 은폐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유태인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만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유태인 은행가 하이에나들과 이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정상배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다시 한번,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는 유태인 국방상 호어 벨리샤(Hore Belisha)가 영국의 청년들을 유럽의 전장으로 내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유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은 필수적이다. 그들의 야심은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이끄는 민족들을 국제유태인이라는 세계적 범죄집단의 돌이킬 수 없는 노예들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유태인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일한 것이다. 셀수 없이 입증된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신디컬리즘 등의 파괴적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의 무정부상태, 인플레이션, 빈곤, 그리고 민중의 절망을 조장한다. 단합된 유대 금융자본이 조성하는 경제환경에 영합할 수 밖에 없는 개별적 산업자본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코민테른이 주창하는 똑같은 모순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의 의도하에 그 모순의 범위와 파괴력은 비할나위 없이 방대한 것으로 증폭된다... 그렇다면 유태인 맑스는 왜 금융자본이 만들어내는 모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여러분은 그 정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로 맑시즘은 유대 국제금융자본의 가장 유용하며 파괴적인 도구인 것이다.” - Weg zur Versklavung, Der Sturmer, No. 34
Stephen S. Wise 미국 수석랍비
Pierre Creange 유태인 언론인 (佛)
Joseph Trimble 유태인 변호사 (美)
Karl Baumbock 독일 언론인
“오늘날 국제유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유태인의 근본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다. 그들의 행보는 현재의 전술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오늘날 이 전술적인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사회주의 정부의 지도하에 독일국민은 유대세계권력의 3대 거점(미국, 소련, 독일)들 중에 하나를 제거했다.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도 그 나라의 국민들은 차차 유태인의 지배야심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그러므로 국제유태인은 그들이 가진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숨겨진 지배를 직시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국가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민족주의적 정책들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려 한다. 지금 국제유태인은 역사속의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깨어나는 민족들을 향한 증오의 공세를 고조시키고 있다. 국제볼셰비즘과 민주주의는 그들이 가장 애용하는 두 가지 무기이다. 악마의 냉혈적인 계산으로 그들은 권위주의-민족국가들을 타도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대전을 터뜨릴 것이다. 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이들 국가의 절멸은 필수적인 것이다. 국제유태인의 정신나간 꿈은 주요 국가들의 요소에 침투하여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그들의 계획에 맞도록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 Juden machen Weltpolitik, 1938
Sir Oswald Mosely
Louis-Ferdinand Celine
에즈라 파운드 “그나저나 당신네 미국인들에게 무슨 자유가 있나? 미국은 데모크래시(democracy)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쥬데오크래시(judeocracy)의 수호자인가? 당신들의 통치자를 통치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국민의 책임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미국이 인종적으로 더럽혀지고 지적으로 무기력해지는데 대한 책임은? 통치자를 선택함에 있어 과연 당신들은 얼마나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정책을 결정하는 일은?... 전쟁이 계속되는 날 매일 하루는 죽은날이요 또한 죽는 날이다. 유대인이 일으킨 전쟁에서 더 많은 피를 뿌릴수록 앞으로 그들에 더욱 굴종할 수 밖에 없으며 자유는 갈수록 희귀한 것이 되어 갈 것이다.” (Italian National Radio broadcast, July 21, 1942)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나는 묻는다. 고리대금업(usury)의 메커니즘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계속 강탈하면서도 스스로를 ‘이웃’으로 생각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가 가당하기나 한 것인가? 고리대금업은 이 세상의 암적종양이다. 오직 파시즘이라는 외과의사의 칼만이 그 종양을 모든 국가들의 몸체에서 도려낼 수 있을 것이다.” (What Is Money For?)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1월30일)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유럽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는 원만한 합의에 이를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이라면서 다른 민족들의 몸체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생산적인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처럼 유태인도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유태 국제금융자본이 다시 한번 유럽의 국가들을 세계대전으로 내모든데 성공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전멸이 될 것입니다!"
조셉 케네디 駐英 미국대사 (JFK 부친)
(유태인이 대부분인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을 차단했다는 이유로 히틀러가 독일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주장한 미국 유태인 언론인 월터 리프먼)
“1938년 5월 케네디는 헤르베르트 폰 더크센 駐英 독일대사와 집중적으로 현안을 논의했다. 미국 국무성의 승낙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회동들을 통해 케네디는 폰 더크센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대적 영향력의 희생자”이며 히틀러 정권의 본질이나 독일국민의 염원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나치대사는 그후 케네디를 “런던에 있는 독일의 가장 좋은 친구”로 보고했다.)... 한편 미국의 칼럼니스트들은 독일에 우호적인 케네디의 행태를 비난했다. 후일 케네디는 그가 주영대사로 재임할 때 받았던 공격의 75퍼센트는 “특정집단의 유대계 발행인과 언론인들”에게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에 대한 중상모략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그의 장남인 죠 케네디 2세에게 마땅한 이유도 없이 “유태인 칼럼니스트들”에게 시달리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와 절친했던 찰스 코글린(카톨릭 신부로 반유대주의적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인물)과 함께 케네디는 유태인이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악성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1939년 말 그는 한 영국기자에게 “미국의 정부정책은 유태인들의 프로덕션”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2차대전 후 케네디는 FDR을 가리켜 “내 아들 조를 죽인 불구자 개자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 Edward Renehan, The Kennedys at War, 1937-1945, 2002
제임스 포레스탈 미국 해군성 장관
(영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안일한 정치인으로 매도되는 네빌 체임벌린)
William C. Bullitt 프랑스 미국대사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4월28일)
"이미 언급했던대로 본인은 폴란드도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으며 항상 이러한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입니다. 본인은 폴란드가 해상접근로를 원하는 것만큼 독일 역시 독일의 동부영토에 대한 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바르샤바 정부에 분명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폴란드 정부가 알아야 할 것은 독일이 이런 문제들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베르사이유의 농간꾼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였건, 생각없음에서였건 그들은 유럽에 꺼뜨리기 힘든 도화선이 달린 100개의 화약통들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문제들은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단치히 통로’라는 폴란드의 해상접근로와 이 통로를 가로지르는 독일의 단치히 접근로는 그 어떤 군사적인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통로의 중요성은 오직 상징적이며 경제적인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통로에 군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군사문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1) 단치히는 자치도시로서 독일제국에 귀속된다
(2) 독일은 독일과 단치히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부설권을 얻으며, 이들 시설에 대해서는
이에 대해 독일은;
(1) 단치히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경제적 권리를 인정한다.
(2) 폴란드가 원하는 목적과 규모의 자유항구를 단치히에 보장한다.
(3) 독일과 폴란드의 현재 국경을 받아들이며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4) 본인의 생애를 초월할 유효기간 25년의 불가침 조약을 폴란드와 체결한다.
(5) 독일은 폴란드, 헝가리와 공동으로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며 이 지역에 대한
폴란드 정부는 나의 제안을 거부한 반면 첫 번째로, 국제연맹의 분쟁중재 고등판무관을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두 번째로 독일의 단치히 도로 및 철로 부설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볼 의사가 있다는 답변을 전달해 왔습니다. 본인은 폴란드 정부의 이러한 납득할 수 없는 태도에 유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 자체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1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전쟁선동꾼들의 대대적인 거짓말 공세 하에 폴란드가 군대동원령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독일은 단 한명의 병사도 징집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에 무력으로 대응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폴란드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에 후세의 사람들은 본인의 제안을 그들이 거절했던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를 판단할 것입니다. 본인이 그러한 제안을 했던 것은 독일 국민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문제를 독일과 폴란드 양국 모두의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인의 믿음에 의하면 단치히 문제에 대한 해법에 있어 폴란드는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치히는 결코 폴란드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려한다는 국제언론의 망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소위 폴란드 국경보장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의해 폴란드 정부는 프랑스나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경우 폴란드 역시 독일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폴란드가 받아들인 이러한 의무조항은 본인이 수년전 필수드스키 원수와 맺은 불가침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당시 폴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간의 의무사항이 명시되어 있는 바, 이 의무사항들을 자의적으로 연장확대하는 것은 독일-폴란드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의 의무조항들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상황이 지금과 같았더라면 본인은 그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에 그토록 많은 예외조항을 허락하는 불가침조약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사국들의 무력사용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명백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오직 집단적 안보, 아니 집단적 안보불안과 끊임없는 전쟁의 위험만이 상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필수드스키 원수와 체결했던 조약을 다시 검토한 바, 이 조약은 폴란드의 일방적인 위반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간주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뜻을 반영하는 전문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대응방침 수정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해법에 대한 본인의 원칙적인 시각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위해 폴란드의 새로안 제안에 언제든 귀를 기울일 것이며, 또한 독일은 동등한 조건 하에서 합의된 의무사항들을 철저하게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제르지 포톡키 백작 駐美 폴란드 대사
"프로파간다는 미국의 라디오, 영화, 언론, 출판의 대중매체를 100퍼센트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극악무도한 전체주의 국가로 묘사하기 위해 매우 저속한 표현방법들까지 동원하고 있는데, 그들의 프로파간다는 유럽의 현 상황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미국의 일반대중에게는 매우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들 중에 언변이 뛰어난 자들은 수많은 강연기회를 통해 독일에 대한 각종 중상모략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폐악과 대비시켜 미국의 자유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매우 치밀하게 조직된 이 프로파간다 캠페인의 공격대상은 오직 국가사회주의 독일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소련에 대한 얘기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필요에 의해 어쩌다 언급되더라도 소련은 매우 진보적이며 선의로운 국가, 혹은 서방민주국 블럭의 동반자라는 인상을 주는 방향으로 언급됩니다. 교묘한 프로파간다 덕분에 지금 미국대중의 대부분은 심정적으로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들은 미국대중의 전쟁심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는 유럽의 평화가 나치독일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들이 매일같이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파시즘에 대한 증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을 비롯하여 독일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심과 중상모략은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이로인해 독일을 떠난 유대인들에 의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류에 있어 버나드 바룩, 뉴욕주지사 리먼, 대법원판사 필릭스 프랑크푸터, 재무장관 모겐소 같은 유대계 유력인사들은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들이자 私的으로도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이들은 미국의 대통령이 세계의 말썽꾼들을 벌주는, 인권, 종교, 언론의 자유를 위한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소위 ‘미국적 가치관’과 ‘자유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행세하는 이 그룹을 가까이서 관찰할 때, 이들은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국제유대인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이 유대 인터내셔널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인권의 수호자로 부각시킨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서반구를 증오와 적개심의 온상으로 만들어 놓았고 세계를 두 편의 적대적 진영으로 갈라 놓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일반인들이 감지할 수 없는 막후에서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결정되며 또 실행되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지금 국제유대인이 원하는 다음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을 폐기하려하고 있으며, 이와동시에 막대한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있습니다.” - Report to Warsaw, January 12, 1939: J. Fuller, Military History of the Western World, 1954
요제프 베크 폴란드 외무상
비버브룩 卿 영국 언론재벌
Robert Ley 독일 노동연맹 총수
리츠-스미글리 폴란드 육군원수
ZENTRALVERLAG DER NSDAP
“영국의 돈 많은 전쟁광들은 이 모든 일로부터 손을 씻고 무죄를 주장하여 그들이 원했던 전쟁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조차도 영국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세관 문제를 둘러싼 단치히 市와 폴란드의 협상은 폴란드 정부의 무리한 요구탓으로 8월 24일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그러자 폴란드는 예비병력에 대한 확대동원령을 발동하고 국경에 대한 도발을 가중시켰다. 8월 25일 폴란드군은 국제영공을 비행하고 있는, 제국의 각료가 탑승한 비행기에 발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은 누구도 오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8월 25일 영국은 폴란드 보호동맹에 서명했고 바로 다음날 15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징집되었다. 8월27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총통은 양국의 평화를 보장하는 선에서 단치히, 단치히 통로, 그리고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천명했다. 이로인해 8월28부터 31일까지 베를린, 로마, 런던, 파리에서는 분주한 외교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더하여 총통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특사의 파견을 기대한다고 발표함으로서 다시 한번 평화적 해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8월 30일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8월 31일 폴란드 국영라디오는 양국간의 문제에 대한 독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독일 영사관은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55건의 독일주민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보고했으며 폴란드군은 8월 31일 중대한 국경도발 행위를 감행했다. 이에 맞서 독일은 9월 1일 폴란드와 개전했다. 이날 총통은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날 또한 단치히는 제국과의 연합을 선포했다." (Jahreswechsel 1939/40. Sylvesteransprache an das deutsche Volk, Die Zeit ohne Beispiel, 1941)
1939년 9월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상실한 舊영토를 둘러싼 분쟁 끝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국경을 보호하고 나치독일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동시에 동부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1939년 11월 소련이 다시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에도 양국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철회해달라는 히틀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독일의 서부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1940년 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英-佛 연합군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영국군의 덩케르크 탈출을 끝으로 두 주만에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Guenther von Blumentritt 독일 육군소장
30년대 내내 스포트라이트에서 밀려나 있었던 처칠은 1940년 5월 전시수상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처칠과 버나드 바룩과의 관계에 대해 영국 역사가 윌리엄 맨체스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이는 윈스턴이 바룩에게 지녔던 큰 호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바룩은 미국인이었고 또한 유태인이었으며 강대한 독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또한 처칠은 바룩이 베푼 각별하면서도 매우 계산적인 호의에 큰 빛을 진 일이 있었다. 윈스턴은 30년대 초의 대공황과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만약 바룩이 아니었다면 그는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빛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도박에 있어 타고난 승리자라기보다는 타고난 호구였다.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바룩의 5번가 맨션에 머물렀던 윈스턴은 대공황이 닥치기 몇 년전 바룩의 조언에 따라 주식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가 리비에라 도박장의 룰렛바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가의 등락 앞에서 노심초사하며 값이 떨어질때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결국 몬테카를로에서처럼 그는 월가에서도 실패했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 바룩과 대면했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었으며 차트웰의 저택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처분해도 빛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 울먹였다. 그는 빛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정계를 떠나 사업을 시작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거물 투자은행가는 그가 정계를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윈스턴이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다감하게 위로해주었다. 바룩은 처칠이 파는 주식은 무조건 사들이고, 그가 사려는 주식은 무조건 팔라는 지시를 그의 비서들에게 남겼다. 결국 윈스턴은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채 월가에서 고스란히 본전을 건져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바룩이 그의 수수료까지 대신 지불해주었기 때문이었다.” (William Manchester, The Last Lion: Winston Spencer Churchill; Alone 1932-1940, 1988)
Lothrop Stoddard 미국 언론인
“그들이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들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법적장치들과 차별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상점과 레스토랑의 출입구에는 ‘유대인 사절’, 혹은 ‘유대인 입장불가’라고 적힌 표지판들이 붙어있었다. 이러한 유대인 금지조치는 독일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쇼핑을 하거나 집 밖에서 외식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직능조합에 등록을 하면 일정시간 동안 이들 상점이나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독일인들에게 지급되는 것과 똑같은 식료품 구매권이 지급되지만 내가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유대인들에게 의류품 구매권은 지급되지 않았다... 보통 독일인들은 억압받는 이 소수민족에 대해 외국인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내키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가혹행위나 폭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만큼 그들은 유태인들이 그들의 나라를 떠나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필자가 받은 인상이었다.” (Lothrop Stoddard, Into the Darkness, 1939)
찰스 린드버그 미국 비행사
"유럽의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언론의 선동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국민들은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FDR 정부의 의도는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 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유태인 이익단체들은 막후에서 미국의 참전을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나라 언론과 라디오, 대부분의 영화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 May 1, 1941, The Wartime Journals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 일본대사 쿠루수, 히틀러)
진주만 "진주만을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스텝은 1941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행정부는 미국을 전쟁이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공 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미국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다양한 도발적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루즈벨트 정부는 미국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했고 파나마 운하 사용을 금지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점증적인 무역봉쇄는 결국 영국과의 공조하에 무제한적 봉쇄조치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석유 및 기타 전략자원의 수급이 불가능해졌다. 미국정부는 또한 수차례에 걸쳐 도쿄를 상대로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11일 전인 11월26일 미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내기에 이른다. 최후통첩에서 미국은 무역봉쇄 해제에 대한 조건으로, 중국,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과 독일 이탈리아와의 추축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前해군성장관 보좌관을 지냈던 프랭크 비티는 후일 이렇게 섰다, “1941년 12월7일(진주만 공습일) 전까지 미국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본을 코너에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요구한, 예를 들어 일본군의 중국 철수는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기를 바랬다.” 전시 영국 생산성장관 올리버 리틀튼은 1944년 좀더 솔직하게 시인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취한 도발적인 조치들에 연유한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어설픈 코미디다.”... 많은 사람들은 FDR이 일본과의 전쟁을 원했던 이유는 일본이라는 “뒷문”을 통해 미국의 지배적인 반전여론을 무력화시킨뒤 더욱 중요한 유럽전선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한다. 루즈벨트의 내무장관(Secretary of the Interior) 해롤드 아이크스의 1941일 10월 발언은 그와같은 의도를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유럽의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일본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실로 미국의 대통령은 독일의 군사적대응을 촉발시키기 위한 도발행위들도 서슴치 않았다. 진주만공습으로 인한 독일과의 개전 전부터 루즈벨트 행정부는 미국 내 독일의 자산을 동결했으며 미군을 동원해 아이슬란드를 점령했다. 또한 미국의 중립법(Neutrality Act)을 위반해가면서 까지 랜드리스 법안을 통과시켜 50척의 구축함등, 막대한 전쟁물자를 영국에 지원했다. 또한 루즈벨트는 미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수중폭뢰로 독일의 잠수함을 공격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독일은 철저하게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독일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독일은 미국의 참전으로 1차대전에서 패한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이를 되풀이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FDR은 만약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3국동맹의 의무사항으로 인해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수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전쟁기간 동안 네바다의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주만공습이 일어나기 이미 수개월 전부터 미국의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이 루즈벨트의 지시 하에 서부지역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명단과 주소를 확보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운명의 날이 오기 전 대통령은 이미 천만명의 병력동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타일러 켄트)
(제국이 되어 東亞의 맹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일개 섬나라로 남을 것인가... 일본의 절망적 도박)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일시에 무력화시킴으로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했다)
(침몰하는 1차대전 드레드넛형 고물전함 아리조나호)
A Japanese postcard showing the destruction of HMS Prince of Wales and HMS Repulse.
AMERICAN HEBREW 미국 유대계 유력지
CENTRAL BLAD VOOR ISRAELITEN 네덜란드 유대계 일간지
Schalom Asch 유태인 작가 (佛)
Rabbi Felix Mendlesohn 유대교 지도자 (美)
카임 바이츠만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Henry Morgenthau, Jr)
헨리 모겐소 2세 유태인 미국 재무장관
디어도어 카우프만 유태인 작가 (美)
조셉 괴벨스
플루토크랫들(plutocrats)이 통치하는 서방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조금 다르다. 유대민족의 방약 무도한 국권탈취에 대한 투쟁은 사형집행자에 의해 처벌되는 대신, 경제, 사회적 보이콧이나 知的테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는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스탈린과 처칠, 루즈벨트는 유대인에 의해 오늘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국제유대인의 아낌없는 성원을 받는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철저한 보호로 보답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슨 대단한 용기의 애국자들로 포장하지만 그들의 조국에 수많은 병폐를 야기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 그들의 국가들에서조차 이번 전쟁으로 유대인에 대한 정당한 반감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도 말이다. 유대인 문제는 이들 국가에는 금기시되는 주제이다. 유대인은 이들 국가의 모든 법과 제도 위에 존재하며 따라서 주인민족 위에 군림하는 폭군이 된다. 연합국의 병사들이 전선에서 피를 흘릴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희생을 담보로 주식시장과 암시장에서 돈을 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이 앞에 나서 유대인들의 범죄를 고발하면 그는 유대 언론의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에 시달리다가 시중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또는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사업체의 문을 닫아야 하는 등 빈곤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겐 이것도 충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어떤 법에 의해서도 처벌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절대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전 세계에 소련의 상황을 불러 오는 것이다. 이를 입에 담거나 조금이라도 항거하는 사람은 뒤통수에 총을 맞거나 목에 칼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폭정도 없을 것이다. 이야말로 마땅히 그들만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국가들 위에 유대인이 강요하는 오욕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아직까지 외부로부터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제국에서 유대인의 권력을 꺾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 세계를 독일과의 전쟁에 몰아넣을 때까지 쉬지 않았다. 안에서 독일을 정복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밖으로부터의 정복을 시도하고 있다. 모든 러시아, 영국, 미국 병사들은 이 기생충 민족이 획책하는 세계지배 음모의 희생양들이다. 진정 이 전쟁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이들이 그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모든 나라의 국민들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를 반대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 세계인들이 이 전쟁의 배후에 그들이 있다는 진실에 눈을 뜨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의 가면이 벗겨질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밤이 지나면 낮이 오듯 진실의 순간은 올 수 밖에 없다. 이를 보면 유대인들이 왜 우리를 그토록 증오하지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증오심의 뿌리는 그들이 가진 두려움과 열등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증오심으로 그토록 요란법석을 떠는 것은 만인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야기하는 그들의 독소적인 본질에 대한 교육이나 지식을 폄하하는 것은 국제유대인의 고전적인 술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인과 결과를 곧 잘 혼동하는 대중의 무지에 의존한다. 유대인들은 또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 세계적 통신사들과 언론을 통한 대중여론 조작의 천재들이다. 그들은 소위 '자유언론'이란 터무니없는 환영(幻影)으로 적국 국민들의 지각을 마비시킨다. 만약 적국의 언론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자유롭다면 한번 유대인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찬반(贊反) 논쟁을 벌여 볼 것을 그들에게 요구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제외한 모든 것에 냉소를 퍼붓고 조롱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 누구보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적국에서 말하는 소위 '자유언론'은 바로 여기에서 끝난다. 신문, 의회, 정치인,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인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닫고 살아야 한다. 그들은 유대인의 범죄와 그들이 퍼뜨리는 사회악과 추잡한 문화를 사랑과 똘레랑스라는 이불로 감싸줘야 한다. 적국들의 대중여론은 철저히 유대인들의 통제 하에 있다. 그리고 그런 통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은 모든 공공적(公共的) 일상의 군주가 된다. 오로지 이런 상황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들이 딱할 뿐이다. 유대인은 이들 나라의 국민들로 하여금 독일이 후진적인 나라라고 믿게끔 오도(誤導)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우리의 후진성이란 실제로는 우리가 성취한 진보이다. 일찍이 유대인이 우리 조국에 대한 위협이자 세계평화의 적임을 직시했던 우리는 이와 관련된 지식을 근거로 많은 유용한 결론들을 얻어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전 세계인의 지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이런 지식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인류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아둔하고 원초적인 상태로 가라 앉을 것이다. 유대인은 우리가 고귀하며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말살하기 위한 이번 전쟁으로 적국의 수뇌부를 유도한 죽음과 파괴의 화신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때문에 우리를 증오한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하찮은 유랑민족의 정신세계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우리의 문화와 학문을 증오한다. 유대인은 그들을 우리의 사회로부터 추방한 뒤 독일이 이룩한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상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의 무정부주의적인 기질로 인하여 국가에서 축출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질서의 적이었다. 독일은 세계에서 유대인의 악성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첫 번째 근대국가이다. 이는 우리가 이룬 정치와 경제의 균형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독일의 공공적 일상으로부터 추방당한 뒤 내부로터 이 균형을 파괴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그들이 기만한 국가들을 우리와의 전쟁에 내몰아 외부로부터 다시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 모든 일들이 전개되는 동안 유럽은 그들이 물려받은 문화적, 정신적 유산의 큰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 유산의 창조에 있어 유대인이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유럽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뿌리 깊은 민족적 본능에 의해 그들은 그들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인류의 창의성을 증오심을 안고 공격한다. 유럽, 아니 전 세계가 이렇게 외칠 날도 머지않았다, '유대인은 인류의 불운이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물론 국제유대인은 알리바이를 준비해두고 있다. 독일민족이 마침내 깨어나기 시작했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척, 독일인들에게는 속죄양이 필요한데 힘없는 그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 혁명기에 그랬던 것처럼 그런 연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크고 작은 죄상들은 너무도 명백하기에 그 어떤 간교한 거짓말과 위선으로도 그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백만의 러시아, 영국, 미국 병사들을 내몰아 때죽음을 강요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는 기사나 군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그들에게 속은 국가의 청년들은 살육의 도가니로 내몰린다. 우리 유럽인의 일상과 경제, 교육, 문화에 대한 엄청난 자해행위요 자기파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이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해 날마다 새로운 계략을 꾸며내고 증오에 찬 선전선동에 광분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유대인이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볼셰비즘이란 괴물의 만부당(萬不當)한 결혼을 주선한 자들은 누구인가? 또한 소련에 돈과 무기를 대주고 이 볼셰비스트 괴물을 기필코 살려내려는 자들은? 변태적인 정치놀음과 냉소적인 위선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엄청난 인간비극을 초래한 자신들의 죄상이 천하에 드러나게 될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유대인, 오직 유대인이다! 그들은 모겐소나 리먼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루즈벨트를 배후에서 조종한다. 그들은 메셰트(Mechett)와 사순(Sassoon)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처칠의 물주요 명령자들이다. 그들은 카가노비치와 에렌버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스탈린의 속도조정자요 지적(知的) 대변인이다. 어디를 보든 그곳에는 항상 유대인이 있다. 그들은 정치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따라다니며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테러와 대량학살을 조직한다. 그들은 또한 안전한 후방인 파리, 브뤼셀, 로마, 그리고 아테네에 앉아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불운한 국가의 국민들에게서 벗겨낸 가죽으로 만든 채찍으로 그들 위에 군림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이런 진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들이 가진 권세와 그들이 거둔 승리에 흠뻑 취해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항상 벗어나 있기를 바라는 평상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지배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착각으로 때 이르게 오만방자해지는 그들 특유의 실수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유대인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뿌리내린 나라에서 신의 섭리에 의해 유대인은 자신들의 탐욕으로 항상 제 무덤을 파는 일을 되풀이 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건강한 민족을 죽이지 못했다. 대신 그들의 기생적인 독소는 전 국가와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를 자각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기필코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어느 시점에 있어 유대인은 항상 惡을 원하지만 종국에는 善을 초래하는 존재였다.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독일이 유대인이라는 위협을 자각하고 우리 민족의 유기체로부터 축출한 첫 번째 근대국가라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건강한 본능을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독일은 국제유대인에 맞선 세계적 투쟁을 선도할 것이다. 전 세계 유대인들이 그들의 탈무적인 증오와 원한을 우리에게 퍼붓는 다해도 우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독기(毒氣)는 오직 우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들은 우리를 좌절시킬 수 없다. 극도의 경멸감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1933년 그 운명의 날이 오기 전까지 그들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퍼부었던 증오와 모욕과 흑색선전과 조롱을 기억하고 있다. 1933년 1월30일은 독일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나라들을 위협하는 국제유대인에 대한 세계혁명이 시작된 날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그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거짓말이나 폭력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결국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들은 오늘 우리의 이런 예언을 보고 비웃겠지만 그들의 교만 끝에는 항상 파멸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원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만큼 뭘 원하지 않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속고 있는 지상의 국가들에는 이들과의 싸움에 필요한 지식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이 지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장기적으로 유대인들이 우리의 이런 노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유대인은 그들의 권세가 지금 반석위에 서 있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진흙발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강력한 한 방이면 그것은 모든 불운의 근원인 그들을 그 폐허 속에 묻어버리며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 Die Urheber des Unglucks der Welt, Das Reich, January 21, 1945
일리야 에렌버그 (Ilya Ehrenburg) 유태인 소련 선전상
유럽의 古都 드레스덴, 1945년 2월 하룻밤 폭격으로 20만명 사망
Gotterdammerung - 신들의 황혼 1945년 1월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연합군은 제3제국 독일의 국경선을 따라 집결해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미군과 영국군이 라인강을 따라 포진해 있었고 프랑스군은 아르덴 숲의 끝자락에서 공격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의 670만 붉은군대가 북으로는 발틱연안으로부터 남으로는 아드리아 해까지 늘어서 있었다. 소련군의 병력수는 1941년 6월 소련침공에 동원되었던 독일군의 두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즈음 독일군은 전쟁초기 전격전(blitzkrieg)으로 단시일 내에 유럽을 유린했던 그 독일군이 아니었다. 군수물자 고갈로 야포 한대당 하루 포탄 배정량도 단 두발 뿐이었다. 막강한 소련군의 대공세를 목전에 둔 4만명의 베를린 방위군은 주로 노약자와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부전선에서 차출된 12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히틀러는 직접 최후의 방어전을 준비했다. 100만명의 소련군이 동원된 베를린 공세 3주간 동안 약 200만 발의 포탄과 로켓탄이 베를린에 퍼부어졌고 그 폭음만으로도 독일 병사들은 귀에서 피를 흘렸다. 그러나 초토화된 베를린의 폐허 속에 몸을 숨긴 독일 소년병들의 악착같은 응전으로 5월 2일 제국청사 정상에 적기(赤旗)를 계양하기까지 소련군은 8만명의 사망자와 27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 무렵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고 괴벨스와 그의 부인은 자식 여섯명과 함께 음독 자살했다. 실로 제3제국 최후의 날은 바그너가 그의 오페라들에서 보여줬던 결말보다 더 음울한 것이었다. 영국 역사가 Anthony Beevor의 'Berlin: the Downfall 1945' (2002)에 의하면,1945년 소련군의 독일본토 공세기간 동안 12세에서 80세에 이르는 약 200만명의 독일 여성들이 윤간당했으며 피해자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이 그 상흔으로 목숨을 잃거나 자결했으며 상당수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ENEMY AT THE GATE',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Red Army
오늘날 서구의 주류 역사가들이 언급하지 않는 2차대전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당사국 국민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유럽의 절반이 억압적인 공산치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연합국이 내건 명분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였음을 상기할 때 이는 꽤나 모순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축동맹의 일본과 이탈리아 외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가 독일 편에서 싸웠으며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노르웨이, 우크라이나, 발틱3국 출신의 많은 자원병들이 무장친위대 사단들에서 전투병으로 복무했다. 전후, 공교롭게도 연합국 측에서 싸웠던 폴란드, 체코, 세르비아는 다른 동구유럽국가들과 함께 소련의 공산주의 위성국들로 전락했다. 미국과 영국이 내걸었던 명분이 진실된 것이었다면 그들은 독일 대신 소련과 싸웠어야 했을 것이다.
2차대전으로 인한 주요 참전국들의 인명손실(군, 민간 포함)은 다음과 같다:
소련: 2천만명 - 독일: 9백만명 - 일본: 4백만명 - 중국: 9백만명 - 폴란드: 3백만명 - 영국: 80만명 - 프랑스: 60만명 - 미국: 60만명
The End of the Old World Order
戰後 소련과 동구권의 주요 유태인 권력자들
SOVIET UNION
1. Zdanov (Yadanov), who in reality was called Lipshitz, former commander in the defense of Leningrad during the 2nd World War. Member of the Politburo up to 1948 and one of the instigators of the decision which excluded Tito from the Cominform in the year 1948 and who shortly afterwards died.
2. Lavrenty Beria, Chief of the M.V.D. Police and of Soviet heavy industry, member of the Soviet Atom industry, who was executed upon orders of Malenkov, and in fact for the same reason for which Stalin liquidated Yagoda.
3. Lazar Kaganovich, director of Soviet heavy industry, member of the Politburo from 1944 to 1952, then member of the Presidium and President of the Supreme Presidium of the USSR.
4. Malenkov (Georgi Maximilianovich Malenk), member of the Politburo and Orgburo until 1952, then member of the Supreme Presidium, President of the Ministerial Council after the death of Stalin; Minister in the government of Bulganin since 1955
5. Nikolaus Solomon Khruschchev, chief (1963)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member of the Politburo since 1939, i.e. since the year when Malenkov was chosen member of the Orgburo
6. Marshal Nikolaus Bulganin, Soviet minister, former bank official, was one of the ten Jewish members of the Commissariat for the liquidation of private banks in the year 1919.
7. Anastasio Josifovich Mikoyan, member of the Politburo since 1935, member of the Supreme Presidium since 1952, Trade Minister and Vice-President in the Malenkov government
8. Kruglov, chief of the M.V.D. after Beria
9. Alexander Kosygin, member of the Politburo up to 1952, afterwards deputy in the Supreme Presidium and Minister for light industry and food in the Malenkov government.
10. Nikolaus Schvernik, member of the Politburo up to 1952, the member of the Supreme Presidium and member of the Presidium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11. Andreas Andreievich Andreiev, who was known as the "Politbureaucrat" of 3 A, member of the Politburo between 1931 and 1952
12. P.K. Ponomarenko, member of the Orgburo in the year 1952; afterwards member of the highest Presidium and culture minister in the Malenkov government.
13. P.F. Yudin, deputy member of the highest Presidium and titulary of the Ministry for Building Material in the Malenkov governement in the year 1953.
14. Mihail Pervukin, member of the Presidium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since 1953.
15. N. Schatalin, official in the sub-secretariat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16. K.P. Gorschenin, Justice Minister in the government of Malenkov.
17. D. Ustinov (Zambinovich), Soviet Ambassador in Athens (Greece) up to the Second World War; Defense Minister in the Malenkov government
18. V. Merkulov, Minister for State Control at the time of Malenkov.
19. A. Zasyadko, Minister for the Coal Industry under Malenkov.
20. Cherburg, Soviet Propaganda chief.
21. Milstein, one of the Soviet espionage chiefs.
22. Ferentz Kiss, chief of the Soviet espionage Service in Europe.
23. Postschreibitscher (Poschebicheve), former private secretary of Stalin, chief of the secret archives of the Kremlin.
24. Ilya Ehrenburg, delegate for Moscow in the Supreme Soviet, communist writer
25. Mark Spivak, delegate from Stalino (Ukraine) in the Supreme Soviet of Moscow.
26. Rosalia Goldenberg, delegate from Birobidzhan in the Supreme Soviet.
27. Anna E. Kaluger, delegate of Bessarabia in the Supreme Soviet, her brother, not Kaluger, but Calugaru in Rumanian, is a communist official in the government of Rumania. (Also Kalinin, one of the great Soviet officials under Stalin, who died some time ago, was a Jew.)
28. Maxim Maximovich Litvinoff,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up to 1939, when he was replaced by Molotov. He afterwards occupied high offices in the same ministry up to his death in February 1952.
29. Andreas Januarevich Vishinsky, foreign minister of the USSR before the death of Stalin and afterwards permanent representative of the Soviet Union in the UNO.
30. Jakob Malik, Soviet representative in the UNO and a great personality in the Soviet diplomatic hierarchy
31. Valerian Zorin, for a time ambassador in London and likewise a great figure of Soviet diplomacy, who changes his post according to necessity.
32. Andrei Gromyko,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since 1958.
33. Alexander Panyushkin, former Soviet ambassador in Washington, ambassador in Peking during the year 1955
34. Zambinovich (Ustinov), ambassador in Athens up to 1940
35. Admiral Radionovich, ambassador in Athens between 1945 and 1946
36. Constantin Umansky, ambassador in Washingt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nd afterwards official in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in Moscow
37. Manuilsky, former representative in the Ukraine and in the UNO, President of the Ukraine
38. Ivan Maisky, ambassador in London during the war, afterwards high official of the Foreign Ministry in Moscow
39. Madame Kolontay, ambassadress in Stockholm until her death in March 1952; Jewess
40. Daniel Solod, ambassador in Cairo in the year 1955
41. Yuri Andropov, KGB Chief, General Secretary of Soviet Politburo
HUNGARY
1. The most important Communist leader since the occupation of this land by Soviet troops is Mathias Rakosi, an Israelite, whose real name is Mathew Roth Rosenkranz, who was born in the year 1892 in Szabadka.
2. Ferenc M?nnich, first minister in Hungary in the year 1959 after Janos Kadar.
3. Erno Gero, Minister of the Interior until 1954.
4. Szebeni, Minister of the Interior before the Jew Gero.
5. General Laszlo Kiros, Minister of Interior since July 1954, simultaneously chief of the A.V.O., that is to say the Hungarian police, which corresponds to the Soviet M.V.D.
6. General Peter Gabor, chief of the Communist political police of Hungary up to 1953
7. Varga, State Secretary for Economic Planning and President of the Supreme Economic Council
8. Beregi,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9. Julius Egry, Agriculture Minister of the Hungarian Peoples Republic.
10. Zoltan Vas, President of the Supreme Economic Council
11. Josef Reval!, dictator of the Hungarian press and director of the red newspaper "Szabad Nep" (The Free People)
12. Reval! (another), Minister for National Education
13. Josef Gero, Transport Minister
14. Mihaly Farkas, Minister for National Defense
15. Veres, Minister of State.
16. Vajda, Minister of State.
17. Szanto, Commissar for purging of enemies of the State, in the year 1951 sent by Moscow
18. Gyula Dessi, Justice Minister up to 1955 and chief of the Secret Police
19. Emil Weil, Hungarian ambassador in Washington; he is the doctor who tortured Cardinal Mindszenty.
Among other important Jewish officials to be mentioned are:
1. Imre Szirmay, director of the Hungarian radio company.
2. Gyula Garay, judge of the Communist "Peoples Court of Budapest".
3. Colonel Caspo, subchief of the secret police.
4. Professor Laszlo Benedek, Jewish dictator for educational questions.
The sole important Communist of Gentile origin was the Freemason Laszlo Rajk, former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who was sentenced and executed by his Jewish "brothers" for his "betrayal".
CZECHOSLOVAKIA
1. Clemens Gottwald, one of the founders of the Communist Party in Czechoslovakia and president of the country between 1948 and 1953
2. Vladimir Clementis, former Communist minister of Czechoslovakia for Foreign Affairs, "sentenced and executed" in the year 1952
3. Vaclav David, foreign minister of Czechoslovakia
4. Rudolf Slansky, former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Czechoslovakia, "sentenced" in the year 1952
5. Firi Hendrich,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6. General Bendric Reicin, "convicted" in 1952
7. Andreas Simon, sentenced in the year 1952
8. Gustav Bares, assistant of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9. Josef Frank, former assistant of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sentenced" in the year 1952
POLAND
1. Boleslaw Bierut, President of Poland up to 1954
2. Jakob Berman,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Poland
3. Julius Kazuky (Katz),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of Poland, who is well known for his violent speeches in the UNO
4. Karl Swierezewsky, former vice-minister for National Defense, who was murdered by the Anti-Communist Ukrainian country population in south Poland (the mass of the people is not always amorphous)
5. Josef Cyrankiewicz, first Minister of Poland since 1954, after Bierut
6. Hillary Mink, Vice Prime Minister of Poland since 1954
7. Zenon Nowak, Second Prime Minister of Poland since 1954
8. Zenon Kliszko, Minister of Justice
9. Tadeus Kochcanowiecz, Minister of Labour
The sole important Polish Communist of Gentile origin is Wladislaw Gomulka, who was removed from political leadership since 1949, when he lost his post as first minister
RUMANIA
1. Anna Pauker, Jewess, former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of the "Rumanian Peoples Republic", and spy No. 1 of the Kremlin in Rumania up to the month of June 1952
2. Ilka Wassermann, former private secretary of Anna Pauker and the real directress of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3. Josef Kisinevsky, the agent No. 1 of the Kremlin in Rumania,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and vice-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4. Teohari Georgescu, Minister for Internal Affairs in the Communist government of Bucharest between 1945 and 1952
6. Lotar Radaceanu, another Minister of the Communist government of Bucharest "deposed" in the year 1952, but who in 1955 reappeared on the honorary tribune
8. Lieutenant General Moises Haupt, commander of the military district of Bucharest
9. Colonel General Zamfir, Communist "security chief" in Rumania and responsible for thousands of murders, which the secret police have perpetrated.
10. Heim Gutman, chief of the civil secret service of the Rumanian Peoples Republic
11. Major-General William Suder, chief of the information service and of counter-espionage of the Rumanian Communist Army
12. Colonel Roman, former director of the E.K.P. service (education, culture and propaganda) of the Rumanian Army up to 1949 and Minister in the Communist government
13. Alexander Moghiorosh, Minister for Nationalities in the red government
14. Alexander Badau, chief of the Control Commission for Foreigners in Rumania
15. Major Lewin, chief of press censorship and former officer of the Red Army
16. Colonel Holban, chief of the Communist "Security" of Bucharest, and former Syndicate (Union) chief.
17. George Silviu, general governmental secretary of the Ministry for Internal Affairs
18. Erwin Voiculescu, chief of the Passport department in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19. Gheorge Apostol, chief of the General Labour Union of Rumania
20. Stupineanu, chief of economic espionage
21. Emmerick Stoffel, Ambassador of the Rumanian Peoples Republic in Switzerland
22. Harry Fainaru, former legation of the Rumanian Communist Embassy in Washington up to 1954 and official in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in Bucharest
23. Ida Szigally, the real directress of the Rumanian Embassy in London; Jewess; friend of Anna Pauker
24. Lazarescu, the "Charge d'affairs" of the Rumanian government in Paris
25. Simon Oieru, State under-secretary of the Rumanian State
26. Aurel Baranga, inspector general of arts
27. Liuba Kisinevski, president of the U.F.A.R. (Association of anti-Fascist Rumanian women)
28. Lew Zeiger, director of the Ministry for National Economy
29. Doctor Zeider, jurist of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30. Marcel Breslasu, Director General of Arts
31. Silviu Brucan, chief editor of the newspaper "Scanteia", official party organ
32. Samoila, governing director of the newspaper "Scanteia"
33. Horia Liman, second editor of the Communist newspaper "Scanteia"
34. Engineer Schnapp, governing director of the Communist newspaper "Romania Libera" (Free Rumania), the second Communist newspaper on basis of its circulation
35. Jehan Mihai, chief of the Rumanian film industry, Communist propaganda by means of films
36. Alexander Graur, director general of the Rumanian radio corporation, which stands completely and solely in the service of the Communist Party
37. Mihail Roller, President of the Rumanian academy, is a sinister professor
39. Professor Lewin Bercovich, another tyrant of the Bucharest university, who with his spies controls the activity of Rumanian professors and their social connections
40. Silviu Josifescu, the official "literary critic", who censures the poems of the best poets like Eminescu Alecsandri, Vlahutza, Carlova, etc., who all died centuries ago or more than half a century ago, and alters form and content, because these poems are "not in harmony" with the Communist-Marxist ideas
41. Ioan Vinter, the second Marxist "literary critic" of the regime and author of a book with the title "The problem of literary legacy"
The three former secretaries of the General Labour League up to 1950, Alexander Sencovich, Mischa Levin and Sam Asriel (Serban), were all Jews.
YUGOSLAVIA
1. Moses Pijad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and in reality the "grey eminence" of the Tito regime
2. Kardelj,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Yugoslav Communist Party and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3. Rankovic,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Yugoslav Communist Party and Minister for Internal Affairs
4. Alexander Bebler,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and permanent representative of Yugoslavia in the UNO
5. Ioza Vilfan (Joseph Wilfan), economic advisor of Tito, in reality the economic dictator of Yugosl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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