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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차대전 秘史

칠봉인 2014. 12. 3. 09:41

2차대전 秘史   2005/04/30 21:46 추천 0    스크랩 7
http://blog.chosun.com/nagaduju/385885

아직도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켰다는 거짓말을 믿고 계십니까?

 

 

1933년 1월 31일, 히틀러의 제3제국 출범

 


총선 승리로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서구 근대사에서 독점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로 대변되는 유태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에 국가적 차원의 제동을 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NSDAP 정부의 일관된 목표는 일련의 차별적인 법적장치들을 통해 독일사회에 대한 유태인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키는 한편 독일 유태인 인구의 국외이민을 최대한 유도하는 것이었다. 유태인에 대한 일부 폭행사건들과 1938년 유태인 청년에 의한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의 암살로 촉발된 ‘Kristallnacht' 사건을 제외하고 1933년부터 2차대전 발발전까지 독일정부의 유태인 정책은 별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국가사회당 집권 직후 개설된 집단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바이마르 시대에 급증했던 공산주의자와 변태성욕자, 음란물제작자, 그리고 예외적인 중범죄자들로 국한되어 있었고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감금되는 일은 2차대전 발발 후인 1942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독일정부는 일부 시온주의 단체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유태인국가 건국을 위해 아프리카 동남부의 마다가스카르 섬을 세계시온주의의회에 공식제안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전쟁 발발 전 국가사회당 정부의 유태인 정책 주안점은 격리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 발발 후에는 게토수용(1939-1943)과 1943년 이후로는 집단수용소에서 강제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600만' 희생자를 주장했던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는 이런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유태인 지식인들의 선전과는 달리 제3제국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유신체제와 흡사한 권위주의-민족국가(authoritarian-national state)였다.

 

(세계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의 첫 삽을 뜨는 히틀러)

 

Rabbi Manfred Reifer  유대교 지도자 (獨)
“혁명은 우리의 소행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신의 선민을 자처하며 항상 민중의 선봉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 왔다. 우리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의 성경책인 ‘자본론’을 선사했으며 민중의 열정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칼 맑스는 전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또 다른 유태인 라쌀은 독일의 민중을 조직했다. 유태인 에두아르 번스타인은 공산주의 이념을 대중에게 유행시켰고 칼 리쁘끄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팔타쿠스단의 폭력혁명을 주동했다. 유태인 쿠르트 아이스너는 바이에른에서 독일 최초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고 그 정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민족은 이 모든 것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났다. 독일인들은 단지 그들 민족과 후세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 Czernowitz Allgemeine, September 2, 1933)

 

"유태인 상점에서 사지맙시다!"

 

DAILY EXPRESS  영국 일간지
"유대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 전 세계의 유태인이 단결하다"

 

 

(우드로 윌슨과 하우스: 돈과 협박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들을 부리는 청사진 'Philip Dru: The Administrator'의 저자 유태인 에드워드 만델 하우스;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창설)

 

 

유태인 금융재벌 버나드 바룩

“월스트릿 투자은행가 버나드 바룩은 1차대전 당시 미국의 산업계를 조율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윌슨 행정부 산하에 설치된 전시산업위원회의 총수였다... 바룩은 단 한 번도 선거에 의해 임용되는 공직에 선출된 바가 없었음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의 대통령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룩은 여섯 명의 미국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정부각료, 상하원의원, 군장성, 외교관, 정당인사들에 대한 ‘고문’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전시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는 미국의 산업계를 사실상 통치했다.” (Margaret L. Coit, Mr. Baruch, 1957)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건강상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호브카우에 있는 버니 바룩의 농장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바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도로시(Dorothy Schiff, 야콥 쉬프의 손녀로 뉴욕포스트 사주)는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엘레노어는 바룩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룩은 루즈벨트가 치른 선거전들에 대한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도로시 쉬프 역시 루즈벨트의 영향력있는 측근이었다... 그녀는 1938년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휴양중이던 루즈벨트를 방문했다... 도로시 쉬프의 회상에 의하면, 루즈벨트는 바룩이 자신을 불렀을 때만 그와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알게될까봐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한다.” (Jeffrey Potter, Biography of Dorothy Schiff, 1976)

 

(미국의 국익보다는 국제유태인을 위해 일했던 FDR;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날짜와 시간까지 알고 있었으나 현지 군 책임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1933-1945)
루즈벨트 행정부는 시작부터 유태인 용공세력의 온상이었다. 1950년, 조셉 맥카시 상원의원의 '맥카시선풍'으로 비화된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연방정부 침투는 루즈벨트 재임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의회의 비미국적행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던 텍사스의 마틴 다이스(Martin Dies) 민주당 하원의원은 1940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위직급을 포함하여 정부공직에 수천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용공분자들이 채용되어 있음을 알리고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사석에서 이렇게 대꾸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오. 허나 이 나라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소. 사실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어요...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이나 향후 이 나라에 위험한 존재가 될 거라고는 믿지 않아요. 사실 난 소련이 앞으로 이 나라의 훌륭한 맹방이 될 것으로 믿고있소. 전에도 얘기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이 나라에 있는 나치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을 조사하시오. 세계평화는 짜르정권 보다 지금의 소련 치하에서 더욱 안전해졌소.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짜르시대보다 지금 공산주의 밑에서 더 잘 살고 있어요.” - U. S. Congressional Record, September 22, 1950, pg. A6832

 

“사무엘 로센만, 벤자민 코헨, 필릭스 프랑크푸터, 데이빗 릴리엔탈, 버나드 버룩, 앤 로센버그, 시드니 힐먼, 데이빗 나일스,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헨리 모겐소 2세(미국 재무장관, 1933-1945), 그리고 허버트 리먼(뉴욕주지사) 등 루즈벨트는 누가봐도 유태인임이 분명한 인사와 참모들로 스스로를 둘러쌓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수우익은 루즈벨트가 주창한 ‘뉴딜' 정책을 ’쥬딜(Jew Deal, 유태인의 책략)'로 공격했다.” - Barbara Matusow, Washingtonian, May 2000

 

(운터마이어의 윌슨 대통령 협박으로 유태인 최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된 시온주의자 루이스 뎀니츠 브랜다이스; 브랜다이스는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으며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주의자로 지목되었던 딘 애치슨의 후원자였다.)

 

(허버트 리먼, 유태인 금융재벌 리먼가문(리먼브라더스) 일족, 뉴욕주지사, 상원의원, 1950년대초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세력 비호로 유명)

 

“확실한 출처에 의하면 72인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문들 가운데 52명이 유태인이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대다수가 외국에서 태어난 자들이란 사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현재 미합중국 부동산과 천연자원의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으며 워싱턴 관료층의 8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William Dudley Pelley, The Hidden Empire, 1937

 

 

 

                         
                         Father Charles E. Coughlin


Dedicated to young Americans-May you benefit from observing how certain shadowy forces contrive to
ruthlessly advance their own financial and ideological objectives at your expense. They select, then groom, and
ultimately control many of our highest government offic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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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plan the wars and through "foreign policy"
arrange to set the stage for incidents to initiate hostilities. They overwork the word "Peace" to mislead you and
create a plausible smoke screen in order to conceal their real operations. You can recognize who "they" are.
Hence, I say, young Americans, be alert!ed-be more effective than my unsuspecting and bemused
generation.. Sally-forth, defend and preserve for yourself and those who follow you our great heritage of
freedom and liberty.

 

- Curtis B. Dall, My Exploited Father-in-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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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s Jewish Cabal


 

Some of these Jews were directly responsible for plunging America into WWII by deliberately alienating America from anti-Communist countries such as Germany and Japan long before the outbreak of hostilities. These Jews also pioneered the idea of Big Egalitarian Government in America; some of them were later discovered to have been spies for the Soviet Union.

Franklin Delano Roosevelt (photo at righ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933-1945, was himself partly of Dutch-Jewish ancestry.

1. Bernard M. Baruch -- a financier and adviser to FDR.

2. Felix Frankfurter -- Supreme Court Justice; a key player in FDR's New Deal system.

3. David E. Lilienthal -- director of Tennessee Valley Authority, adviser. The TVA changed the relationship of government-to-business in America.

4. David Niles -- presidential aide.

5. Louis Brandeis -- U.S. Supreme Court Justice; confidante of FDR; "Father" of New Deal.

6. Samuel I. Rosenman -- official speechwriter for FDR.

7. Henry Morgenthau Jr. -- Secretary of the Treasury, "unofficial" presidential adviser. Father of the Morgenthau Plan to re-structure Germany/Europe after WWII.

8. Benjamin V. Cohen -- State Department official, adviser to FDR.

9. Rabbi Stephen Wise -- close pal of FDR, spokesman for the American Zionist movement, head of The American Jewish Congress.

10. Frances Perkins -- Secretary of Labor; allegedly Jewish/adopted at birth; unconfirm!ed.

11. Sidney Hillman -- presidential adviser.

12. Anna Rosenberg -- longtime labor adviser to FDR, and manpower adviser with the Manpower Consulting Committee of the 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and the War Manpower Commission.

13. Herbert H. Lehman -- Governor of New York, 1933-1942, Director of U.S. Office of Foreign Relief and Rehabilitation Operations, Department of State, 1942-1943; Director-General of UNRRA, 1944 - 1946, pal of FDR.

14. Herbert Feis -- U.S. State Department official, economist, and an adviser on international economic affairs.

15. R. S. Hecht -- financial adviser to FDR.

16. Nathan Margold -- Department of the Interior Solicitor, legal adviser.

17. Jesse I. Straus -- adviser to FDR.

18. H. J. Laski -- "unofficial foreign adviser" to FDR.

19. E. W. Goldenweiser -- Federal Reserve Director.

20. Charles E. Wyzanski -- U.S. Labor department legal adviser.

21. Samuel Untermyer -- lawyer, "unofficial public ownership adviser" to FDR.

22. Jacob Viner -- Tax expert at the U.S. Treasury Department, assistant to the Treasury Secretary.

23. Edward Filene -- businessman, philanthropist, unofficial presidential adviser.

24. David Dubinsky -- Labor leader, president of International Ladies Garment Workers Union.

25. William C. Bullitt -- part-Jewish, ambassador to USSR [is claimed to be Jonathan Horwitz's grandson; unconfirm!ed].

26. Mordecai Ezekiel -- Agriculture Department economist.

27. Abe Fortas -- Assistant director of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Department of the Interior Undersecretary.

28. Isador Lubin -- Commissioner of Labor Statistics, unofficial labor economist to FDR.

29. Harry Dexter White [Weiss] -- Assistant Secretary of the Treasury; a key founder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and the World Bank; adviser, close pal of Henry Morgenthau. Co-wrote the Morgenthau Plan.

30. Alexander Holtzoff -- Special assistant, U.S. Attorney General's Office until 1945; [presumed to be Jewish; unconfirm!ed].

31. David Weintraub -- official in the Office of Foreign Relief and Rehabilitation Operations; helped create the United Nations; Secretary, Committee on Supplies, 1944-1946.

32. Nathan Gregory Silvermaster -- Agriculture Department official and head of the Near East Division of the Board of Economic Warfare; helped create the United Nations.

33. Harold Glasser -- Treasury Department director of the division of monetary research. Treasury spokesman on the affairs of 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34. Irving Kaplan -- U.S. Treasury Department official, pal of David Weintraub.

35. Solomon Adler -- Treasury Department representative in China during World War II.

36. Benjamin Cardozo -- U.S. Supreme Court Justice.

37. Leo Wolman -- chairman of the 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s Labor advisory Board; labor economist.

38. Rose Schneiderman -- labor organizer; on the advisory board of the 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

39. Jerome Frank -- general counsel to the 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 Justice, U.S. Court of Appeals, 1941-57.

40. Gerard Swope -- key player in the creation of the N.R.A. [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

41. Herbert Bayard Swope -- brother of Gerard

42. Lucien Koch -- consumer division, N.R.A. [apparently-Jewish]

43. J. David Stern -- Federal Reserve Board, appointed by FDR

44. Nathan Straus -- housing advisor

45. Charles Michaelson -- Democratic [DNC] publicity man

46. Lawrence Steinhardt -- ambassador to Soviet Union

47. Harry Guggenheim -- heir to Guggenheim fortune, advisor on aviation

48. Arthur Garfield Hays -- adviser on civil liberties

49. David Lasser -- head of Worker's Alliance, labor activist

50. Max Zaritsky -- labor adviser

51. James Warburg -- millionaire, early backer of New Deal before backing out

52. Louis Kirstein -- associate of E. Filene

53. Charles Wyzanski, Jr. -- counsel, Dept. of Labor

54. Charles Taussig -- early New Deal adviser

55. Jacob Baker -- assistant to W.P.A. head Harry Hopkins; assistant head of W.P.A. [Works Progress Admin.]

56. Louis H. Bean -- Dept. of Agriculture official

57. Abraham Fox -- research director, Tariff Commission

58. Benedict Wolf -- 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NLRB]

59. William Leiserson -- NLRB

60. David J. Saposs -- NLRB

61. A. H. Meyers -- NLRB [New England division]

62. L. H. Seltzer -- head economist at the Treasury Dept.

63. Edward Berman -- Dept. of Labor official

64. Jacob Perlman -- Dept. of Labor official

65. Morris L. Jacobson -- chief statistician of the Government Research Project

66. Jack Levin -- assistant general manager, Rural Electrification Authority

67. Harold Loeb -- economic consultant, N.R.P.

68. William Seagle -- council, Petroleum Labor Policy Board

69. Herman A. Gray -- policy committee, National Housing Conference

70. Alexander Sachs -- rep. of Lehman Bros., early New Deal consultant

71. Paul Mazur -- rep. of Lehman Bros., early consultant for New Deal

72. Henry Alsberg -- head of the Writer's Project under the W.P.A.

73. Lincoln Rothschild -- New Deal art administ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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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AN JEW MONEY COULDN'T BUY OFF

 

  •                 

Long was buried on the grounds of the new State Capitol that he championed as governor, where a statue depicts his achievements. More than 100,000 Louisianians attended his funeral at the Capitol. The minister at the funeral service Gerald L. K. Smith, co-founder of Share Our Wealth and subsequently of the America First Party, later claimed that Long's assassination was ordered by "the Roosevelt gang, supported by the New York Jew machine." - Wikipedia

 

http://www.hueylong.com/

 

(영국 언론재벌, 로더미어 卿과 히틀러; 그의 동생 노스클립 卿은 '시온의정서'를 영국에서 최초로 출간한 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다)

 

Lord Rothemere 
“나는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독일의 나치정권이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주의깊게 연구할 것을 권한다. 이에 있어 나치독일을 증오하는 자들의 거짓말과 흑색선전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될 것이다. 독일의 나치정권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하는 일부 언론은 실제로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는 집단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떠들썩하게 시작한 “나치스의 만행” 선전캠페인을 통해 알려진 사례들이 허무맹랑한 날조극이라는 것은 독일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배가 더 되는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유태인에 대한 그러한 폭력사건은 몇차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가들은 고립된 몇몇 사건을 일반적인 것으로 침소봉대하여 마치 나치정권이 피비린내나는 폭정을 자행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퍼뜨리려 한다. 나치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독일민족은 빠른 속도로 그들 국가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요소에게 종속되어 가고 있었다. 바이마르 정권 말기 독일의 관료층에는 1차대전 전보다 20배나 많은 유태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독일에 대한 애국심과 책임감보다는 국제적으로 다른 국가의 유태인들과 더욱 공고하게 연대되어 있었던 이들 유태인은 독일정부의 모든 요직에 파고들었다. 장관은 독일인이었는지 모르나 그들 뒤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국민에게 뉴스를 전달했던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이었다.” - The Daily Mail,  London, July 10, 1933

 

Samuel Untermeyer  유태인 월스트릿 변호사, 정계 거물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떠나 여러분 모두는 對 독일 聖戰에 지금 당장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 Radio Broadcast, New York City, August 6, 1933

 

(루즈벨트 주변의 유태인 거물들: 운터마이어, 뒷줄 가운데; 자칭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 엘레노어 루즈벨트, 영부인, 앞줄 왼쪽)

 

"다른 민족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유대민족만은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어떤 박해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유태인이야말로 이 세상의 귀족이다.” - London Investigator, June, 1935

 

Emil Ludwig  유태인 역사가 (佛)
“히틀러는 그 어떤 전쟁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는 강요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올해는 아니더라도 오래 지나지 않아...” - Les Annales, June, 1934

 

(이스라엘 리쿠드 운동의 거목 야보틴스키)

 

Vladimir Jabotinsky  시온주의 지도자 (팔레스타인)
“지난 수개월 동안 이념과 국적을 초월한 전세계의 유태인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對 독일 항전을 전개해왔다. 우리 개개인이 이 싸움에서 감당해야 할 몫은 막중한 것이다. 우리는 독일을 상대로 전세계에 걸쳐 정신적, 물질적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독일은 그들이 잃었던 영토와 식민지를 회복하여 다시 한번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유대민족의 국익은 독일의 절멸을 부르짖는다!” - Mascha Rjetsch, January, 1934

 

 

Julius Streicher  Der Sturmer(돌격병) 발행인
“유태인은 언젠가 이 곳에 사는 민족들을 말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유럽에 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적, 윤리적인 장치들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동원했다. 그들은 먼저 기만적인 사상들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들은 그들을 받아준 주인민족들에게 유태인도 그들 민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속삭였다. 마침내 사람들은 프랑스의 유태인은 프랑스인이, 영국의 유태인은 영국인이, 스페인의 유태인은 스페인인이, 그리고 이탈리아의 유태인은 이탈리아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게 되었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수구반동 야만인이라느니 인류의 적이니 하는 공격들이 쏟아졌다. 18세기 말 그들이 사주한 프랑스혁명으로 유태인은 프랑스에서 그들의 권리를 제한했던 제도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19세기 동안 그들이 주동한 혁명들로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그들을 견제했던 법들이 차차 사라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태인 해방은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세계대전의 결과로 마침내 유태인은 러시아와 독일의 주인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 산같이 쌓인 시체더미 앞에서 국제유태인은 마침내 지난 수백년 동안 그들이 꿈꾸왔던 유럽인들에 대한 복수와 승리를 자축하며 희희낙락했던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여러 나라들에서 그 나라와 민족을 이끌겠다고 나선 유태인들에게 감히 대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자신감에 충천했던지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유태인을 독일 지방정부 지도자와 제국정부 각료직에 앉혔다. 유태인 발터 라테나우는 독일이 배신당하고 굴종해야 했던 그 어두웠던 시절 독일을 발아래 누르고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국제유태인이 품은 야심의 표상이었다...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유태인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 유태인은 민주주의라는 가면 뒤에 숨어 이들 나라를 통치한다.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유태인의 지배를 은폐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유태인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만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유태인 은행가 하이에나들과 이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정상배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다시 한번,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는 유태인 국방상 호어 벨리샤(Hore Belisha)가 영국의 청년들을 유럽의 전장으로 내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유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은 필수적이다. 그들의 야심은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이끄는 민족들을 국제유태인이라는 세계적 범죄집단의 돌이킬 수 없는 노예들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유태인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일한 것이다. 셀수 없이 입증된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신디컬리즘 등의 파괴적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의 무정부상태, 인플레이션, 빈곤, 그리고 민중의 절망을 조장한다. 단합된 유대 금융자본이 조성하는 경제환경에 영합할 수 밖에 없는 개별적 산업자본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코민테른이 주창하는 똑같은 모순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의 의도하에 그 모순의 범위와 파괴력은 비할나위 없이 방대한 것으로 증폭된다... 그렇다면 유태인 맑스는 왜 금융자본이 만들어내는 모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여러분은 그 정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로 맑시즘은 유대 국제금융자본의 가장 유용하며 파괴적인 도구인 것이다.” - Weg zur Versklavung, Der Sturmer, No. 34

 

 

Stephen S. Wise  미국 수석랍비
“미국의 유태인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 행세를 하려했던 독일 유태인의 실수를 되풀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유대교를 믿는 미국인이 아니다. 나는 그저 유태인일 뿐이다. 나를 미국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60년간 미국인이었다면 나는 4천년 동안 유태인이었다. 히틀러는 이점 한가지에 대해서만큼은 옳은 소리를 했다. 그는 유태인을 하나의 민족이라 부른다. 맞는 얘기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 Address to American Jewish Congress, June 12, 1938

 

Pierre Creange  유태인 언론인 (佛)
“독일은 必殺의 증오로 싸워야할 유대교의 적이다. 오늘날 유대교의 목표는 全독일국민에 대한 무자비한 군사행동이며 독일국가의 절멸이다. 우리는 독일과의 무역중단, 독일의 해역봉쇄,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독일인들에 대한 보복을 전세계에 요구한다... 독일과의 싸움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도 없다. 이스라엘이 공격받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수호하자! 깨어난 독일 앞에 우리는 깨어난 이스라엘을 제시한다. 그리고 세계는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 Epitres aux Juifs, 1938

 

Joseph Trimble  유태인 변호사 (美)
“영국, 소련, 프랑스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요직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다. 이스라엘의 세 아들은 곧 나치 독재자를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 American Hebrew, June 3, 1938

 

Karl Baumbock  독일 언론인
“유태인의 세계권력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다. 그들의 일관된 목표는 명백하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대두된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 인구를 통괄하여 그들 민족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모종의 지도부는 이 세계 어딘가에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가 이미 아는대로 세계에는 이스라엘만국협회(L'Alliance Israelite Universelle), 브나이브리스(Independent Order of B'nai B'rith), 유태인 에이젼시(Jewish Agency)를 비롯한 각종 시온주의 단체들, 대독일 국제보이콧 기구, 미국 유태인연합 자문회의(American Jewish Joint Consultative Council) 등의 많은 국제적 유태인 기구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조직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국제유태인의 세계적 의제를 진흥하고 실천한다.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계되어있으며 공조하는지, 또한 이 모든 조직들을 통제하는 중앙적인 핵심 지도세력이 존재하는지, 또한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질문이다. 전세계 모든 유태인에 의해 인정받는 하나의 유태인 정부가 존재하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적 권력을 지향하는 국제유태인의 의식적인 야심이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늘날 국제정치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만 주의깊게 관찰하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국제유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유태인의 근본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다. 그들의 행보는 현재의 전술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오늘날 이 전술적인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사회주의 정부의 지도하에 독일국민은 유대세계권력의 3대 거점(미국, 소련, 독일)들 중에 하나를 제거했다.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도 그 나라의 국민들은 차차 유태인의 지배야심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그러므로 국제유태인은 그들이 가진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숨겨진 지배를 직시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국가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민족주의적 정책들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려 한다. 지금 국제유태인은 역사속의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깨어나는 민족들을 향한 증오의 공세를 고조시키고 있다. 국제볼셰비즘과 민주주의는 그들이 가장 애용하는 두 가지 무기이다. 악마의 냉혈적인 계산으로 그들은 권위주의-민족국가들을 타도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대전을 터뜨릴 것이다. 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이들 국가의 절멸은 필수적인 것이다. 국제유태인의 정신나간 꿈은 주요 국가들의 요소에 침투하여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그들의 계획에 맞도록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 Juden machen Weltpolitik, 1938

 

 

 

Sir Oswald Mosely
“오직 영국인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영국인의 富와 여신은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을 통해 유태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으며 또한 국제고리대금업으로 착취한 돈으로 그들은 지금 우리 조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을 파괴하고 있다. 영국국민, 영국의 산업가들, 영국의 노동자들, 그리고 대영제국 전체는 국제유태인의 득세와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되어 왔으며, 우리 나라의 국제무역시스템, 양당정치제도, 그리고 외교정책이 오늘날과 같은 체제로 유지되는 까닭도 오직 유대인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국제 유대자본은 대영제국을 지배하고 대영제국을 통해 세계를 지배한다.”

 

 

Louis-Ferdinand Celine
“그 무엇보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 우리에게 전쟁은 역사의 종말, 유대인의 도살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우리를 전쟁으로 끌고가는데 유대인들이 보이는 집요함 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는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 젠타일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이론(異論)을 불허하는 탈무드적인 강팍함, 악마적인  냉혹함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고작 몇마디 신음소리로 대항한다... 나는 히틀러를 위해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다. 나는 그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유대인을 위해 히틀러와 싸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인이여, 당신들은 당신들의 절대군주인 로스차일드 남작과, 런던, 뉴욕, 그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제왕같은 사촌들이 정해놓은 시각에 전쟁터로 끌려나가게 될 것이다.”

 

 

에즈라 파운드

“그나저나 당신네 미국인들에게 무슨 자유가 있나? 미국은 데모크래시(democracy)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쥬데오크래시(judeocracy)의 수호자인가? 당신들의 통치자를 통치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국민의 책임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미국이 인종적으로 더럽혀지고 지적으로 무기력해지는데 대한 책임은? 통치자를 선택함에 있어 과연 당신들은 얼마나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정책을 결정하는 일은?... 전쟁이 계속되는 날 매일 하루는 죽은날이요 또한 죽는 날이다. 유대인이 일으킨 전쟁에서 더 많은 피를 뿌릴수록 앞으로 그들에 더욱 굴종할 수 밖에 없으며 자유는 갈수록 희귀한 것이 되어 갈 것이다.” (Italian National Radio broadcast, July 21, 1942)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나는 묻는다. 고리대금업(usury)의 메커니즘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계속 강탈하면서도 스스로를 ‘이웃’으로 생각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가 가당하기나 한 것인가? 고리대금업은 이 세상의 암적종양이다. 오직 파시즘이라는 외과의사의 칼만이 그 종양을 모든 국가들의 몸체에서 도려낼 수 있을 것이다.” (What Is Money For?)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1월30일)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유럽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는 원만한 합의에 이를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이라면서 다른 민족들의 몸체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생산적인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처럼 유태인도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유태 국제금융자본이 다시 한번 유럽의 국가들을 세계대전으로 내모든데 성공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전멸이 될 것입니다!"

 

 

조셉 케네디  駐英 미국대사 (JFK 부친)
“신임 미국대사로 1938년 초 런던에 부임한 조셉 케네디는 곧 미국태생의 낸시 비처 랭혼 애스터 자작부인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가까웠던 G.K. 체스터튼과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면 그것은 유대민족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이었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것만큼 반유대주의자였던 그들은 히틀러를 유태인 문제라는, 애스터 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적 골칫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환영했다. 사실 “클리이브덴 세트(Cliveden Set)” (애스터 부인의 저택에 자주 모였던 명사들의 모임)의 그 누구도 제3제국 치하에서 유태인이 당면하고 있었던 딜레마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스터 부인은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틀러는 이 “그리스도의 살인자들에게 단지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데 그쳐서는 안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에 케네디는 답장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부추기는 미국의 “쥬 미디어(Jew media, 유태인 소유의 대중매체)”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소위 국제정치 전문가라는 유태인들이 벌써부터 유럽에 둘러붙은 화약통에 불을 붙이기 위해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유태인이 대부분인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을 차단했다는 이유로 히틀러가 독일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주장한 미국 유태인 언론인 월터 리프먼)

 

“1938년 5월 케네디는 헤르베르트 폰 더크센 駐英 독일대사와 집중적으로 현안을 논의했다. 미국 국무성의 승낙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회동들을 통해 케네디는 폰 더크센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대적 영향력의 희생자”이며 히틀러 정권의 본질이나 독일국민의 염원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나치대사는 그후 케네디를 “런던에 있는 독일의 가장 좋은 친구”로 보고했다.)... 한편 미국의 칼럼니스트들은 독일에 우호적인 케네디의 행태를 비난했다. 후일 케네디는 그가 주영대사로 재임할 때 받았던 공격의 75퍼센트는 “특정집단의 유대계 발행인과 언론인들”에게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에 대한 중상모략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그의 장남인 죠 케네디 2세에게 마땅한 이유도 없이 “유태인 칼럼니스트들”에게 시달리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와 절친했던 찰스 코글린(카톨릭 신부로 반유대주의적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인물)과 함께 케네디는 유태인이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악성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1939년 말 그는 한 영국기자에게 “미국의 정부정책은 유태인들의 프로덕션”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2차대전 후 케네디는 FDR을 가리켜 “내 아들 조를 죽인 불구자 개자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 Edward Renehan, The Kennedys at War, 1937-1945, 2002

 

 

제임스 포레스탈  미국 해군성 장관
“오늘 조 케네디와 골프를 쳤다. 나는 1938년 이후 루즈벨트와 네빌 체임벌린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를 그에게 물었다. 그는 1938년 체임벌린의 입장은 모든 면에서 영국은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으며 영국은 히틀러와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케네디의 시각은 독일이 소련과의 일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으나, 만약 1939년 여름 폴란드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강경한 대응을 재촉한 뷸리트(William C. Bullit, 주프랑스 미국대사)만 아니었더라도 영국이 독일과 개전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워싱턴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간섭과 압력만 아니었다면 프랑스나 영국이 폴란드의 국경문제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케네디는 또한 뷸릿이 자신에게는 독일이 곧 유럽을 유린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반면 루즈벨트에게는 독일이 그들의 생각처럼 싸움에 응해주지 않고 있다고 계속 불평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체임벌린은 미국과 국제유태인이 영국을 독일과의 전쟁에 몰아넣었다는 심정을 피력했다고 한다. 1939년 여름 루즈벨트와의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은 케네디에게 영국이 좀더 강경하게 폴란드 문제에 대처하도록 체임벌린에게 압력을 가할 것을 집요하게 재촉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영국이 싸울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체임벌린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라는게 케네디의 일관된 대답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영국은 전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 December 27, 1945; The Forrestal Diaries: Foretaste of the Cold War

 

       

(영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안일한 정치인으로 매도되는 네빌 체임벌린) 

 

William C. Bullitt  프랑스 미국대사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립스키를 비롯한 폴란드 외무성 관료들이 내린 결정은 포톡키 백작이 1938년 11월21일 텔레그램으로 보낸 보고서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포톡키 駐美 폴란드 대사는 당시 본국에 잠시 귀국해 있었던 윌리엄 C. 뷸릿 駐佛 미국대사로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은 곧 일어날 유럽의 전쟁에 기필코 미국을 참전시킬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 뷸릿은 특히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을 포톡키에게 주지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뷸릿은 이제 곧 유럽에서는 장기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특히 “독일과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감정과 격렬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그는 이번 전쟁에 6년이 소요될 것이며, 독일이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는 시점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톡키는 전쟁과 파괴에 대한 뷸릿과 루즈벨트의 열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포톡키는 독일에게는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지적하며 그러한 전쟁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뷸릿은 먼저 독일과 다른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서방열강들(영국, 프랑스, 미국)이 反독일 전선에 개입하는 형태로 전쟁은 전개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시간문제로 받아들였던 뷸릿은 일단 소련과의 전쟁에서 힘을 소진한 독일은 결국 서방열강들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견했다. 그는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먼저 움직여준다면 미합중국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에 편에서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의사를 포톡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뷸릿은 폴란드의 對 독일 대응방안에 대해 질문했고 포톡키는 폴란드는 자국의 서부국경 문제에 독일이 간섭하도록 허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쟁을 택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폴란드에 대해 강한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뷸릿은 폴란드가 독일에 굳건하게 맞서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David L. Hoggan, President Roosevelt and The Origins of the 1939 War, 1983)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4월28일)
“독일-폴란드 관계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역시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은 독일에 가장 고통스런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폴란드에 해상접근로를 제공하기 위해 매우 기이한 형태로 조성된 ‘단치히 통로’는 그 무엇보다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우호선린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이 ‘단치히 통로’는 우리 독일이 해결해야만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폴란드 역시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적이 없으며 두 나라가 서로의 이웃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이상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이 전의 필수드스키 원수(Marshal Pilsudski)는 그러므로 두 나라의 이익이 관련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전쟁을 배제하자는 독일과 폴란드의 불가침 조약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양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예외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전시 상호지원조약에만 해당될 뿐 이 협정이 조인된 이 후에 폴란드와 프랑스가 맺을 수도 있는 조약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독일과 폴란드의 합의가 유럽의 긴장을 괄목할 수준으로 완화시켰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도시 단치히(Danzig) 문제 말입니다. 단치히는 독일의 도시이며 독일에 속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도시는 폴란드와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도 인정하듯이 이 계약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실세들이 단치히 시(市)에 강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분쟁을 심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국제연맹에 해법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국제연맹의 그 고등판무관이란 인물은 참으로 대단한 술수의 소유자였습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이 유럽의 긴장을 최종적으로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이 문제의 해결은 일부 정신나간 전쟁광들의 선동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개월 전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수 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 본인은 폴란드 정부에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본인은 이 제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이 유럽의 평화를 위한 최대한의 양보인지, 아닌지는 여러분께서 직접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던대로 본인은 폴란드도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으며 항상 이러한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입니다. 본인은 폴란드가 해상접근로를 원하는 것만큼 독일 역시 독일의 동부영토에 대한 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바르샤바 정부에 분명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폴란드 정부가 알아야 할 것은 독일이 이런 문제들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베르사이유의 농간꾼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였건, 생각없음에서였건 그들은 유럽에 꺼뜨리기 힘든 도화선이 달린 100개의 화약통들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문제들은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단치히 통로’라는 폴란드의 해상접근로와 이 통로를 가로지르는 독일의 단치히 접근로는 그 어떤 군사적인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통로의 중요성은 오직 상징적이며 경제적인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통로에 군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군사문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1) 단치히는 자치도시로서 독일제국에 귀속된다

 

(2) 독일은 독일과 단치히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부설권을 얻으며, 이들 시설에 대해서는
     폴란드 정부가 단치히 통로에 대해 행사하는 것과 동등한 치외법권적 권한을 누린다.

 

이에 대해 독일은;

 

(1) 단치히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경제적 권리를 인정한다.

 

(2) 폴란드가 원하는 목적과 규모의 자유항구를 단치히에 보장한다.

 

(3) 독일과 폴란드의 현재 국경을 받아들이며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4) 본인의 생애를 초월할 유효기간 25년의 불가침 조약을 폴란드와 체결한다.

 

(5) 독일은 폴란드, 헝가리와 공동으로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며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 헤게모니를 포기한다.

 

폴란드 정부는 나의 제안을 거부한 반면 첫 번째로, 국제연맹의 분쟁중재 고등판무관을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두 번째로 독일의 단치히 도로 및 철로 부설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볼 의사가 있다는 답변을 전달해 왔습니다. 본인은 폴란드 정부의 이러한 납득할 수 없는 태도에 유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 자체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1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전쟁선동꾼들의 대대적인 거짓말 공세 하에 폴란드가 군대동원령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독일은 단 한명의 병사도 징집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에 무력으로 대응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폴란드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에 후세의 사람들은 본인의 제안을 그들이 거절했던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를 판단할 것입니다. 본인이 그러한 제안을 했던 것은 독일 국민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문제를 독일과 폴란드 양국 모두의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인의 믿음에 의하면 단치히 문제에 대한 해법에 있어 폴란드는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치히는 결코 폴란드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려한다는 국제언론의 망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소위 폴란드 국경보장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의해 폴란드 정부는 프랑스나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경우 폴란드 역시 독일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폴란드가 받아들인 이러한 의무조항은 본인이 수년전 필수드스키 원수와 맺은 불가침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당시 폴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간의 의무사항이 명시되어 있는 바, 이 의무사항들을 자의적으로 연장확대하는 것은 독일-폴란드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의 의무조항들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상황이 지금과 같았더라면 본인은 그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에 그토록 많은 예외조항을 허락하는 불가침조약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사국들의 무력사용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명백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오직 집단적 안보, 아니 집단적 안보불안과 끊임없는 전쟁의 위험만이 상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필수드스키 원수와 체결했던 조약을 다시 검토한 바, 이 조약은 폴란드의 일방적인 위반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간주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뜻을 반영하는 전문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대응방침 수정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해법에 대한 본인의 원칙적인 시각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위해 폴란드의 새로안 제안에 언제든 귀를 기울일 것이며, 또한 독일은 동등한 조건 하에서 합의된 의무사항들을 철저하게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제르지 포톡키 백작  駐美 폴란드 대사
“오늘밤 본인은 저의 사저(私邸)에서 미국 대통령의 측근인 왓슨(Watson) 장군을 영접했습니다. 장군은 대통령의 지시로 방문하였으며 저를 통해 바르샤바  본국 외무성에 전달할 사항을 가지고 왔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은 히틀러 총통의 4월28일 제국의회 연설에 대단히 분노한 것으로 보이며 장군에 의하면 대통령은 히틀러 총통의 연설을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과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왓슨 장군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입니다. 장군은 또한 대통령의 가문이 친가와 외가 쪽으로 모두 유대계 혈통이 섞여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히틀러 총통과 독일인들을 증오할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살피건데 대통령은 올해 1월에 있었던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의 바르샤바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으며, 또한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듯 합니다. 대통령은 독일이 이전부터 그랬듯이 현재까지도 폴란드를 방공협정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은 비록 폴란드가 프랑스에 대해 호감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히틀러 총통과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다는 점을 장군에게 확답해 주었습니다. 지금 미국에는 유럽의 전쟁에 또 다시 참전하는 것에 대한 강한 국민적인 반대여론이 존재하는바, 미국의 대통령은 유럽의 전쟁을 부채질을 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본인이 왓슨 장군에게 제기한 질문을 통해 느낀 점이지만 본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유럽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오직 보복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왓슨 장군은 대통령이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폴란드가 독일과의 그 어떤 협상도 거부할 것과 독일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있어서 폴란드는 독일의 압력에 굴복할 생각이 없으며 현재 폴란드에 귀속되어 있는 독일의 舊영토에 대해서도 역시 한발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장군은 대통령도 폴란드의 이러한 입장을 알고 있으나, 이에 더해 폴란드 정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에는 불로 맞설 것”과 “히틀러 총통에 공개적으로 맞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왓슨 장군은 독일과 폴란드의 개전 시 소련이 폴란드의 편에서 독일을 공격한다는 요지의, 미국과 소련의 협정초안 사본을 본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은 더 나아가서 그러한 무력충돌을 유발하기 위한 빌미는 폴란드 정부에 의해 쉽사리 제공될 수 있으며, 그 뒤에 이은 독일의 공격은 폴란드군의 용맹과 소련의 강대함에 의해 반격받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소련에 대해 애정을 갖고 얘기한 장군은 스탈린은 폴란드 영토에 대해 욕심이 없으며 독일의 군사적 패배 직후 곧바로 폴란드 국경 밖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보면 대통령은 폴란드의 현 상황에 대해 매우 무지한 듯 하며, 또한 폴란드 대사관은 소련과 미국 사이의 그러한 잠재적인 협정에 대해 들은바도 없습니다. 장군이 보여주었던 협정 사본도 초안에 불과했으며 그 지면에는 그 어떤 책임자의 서명도 없었습니다. 본인에게 이러한 시도는 미국 대통령의 일종의 허세로 보이며, 한가지 부언하자면 현 상황에 대한 왓슨 장군의 인식부족 탓으로 그와는 현안에 정통한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대통령은 장군을 통해 그의 의사가 본국 외무성에 즉각 전달될 것을 부탁했습니다.”  - Report to Warsaw, April 30, 1939: Der erzwungene Krieg: Die Ursachen und Urheber des 2. Weltkriegs, Tuebingen: Grabert Verlag

 

"프로파간다는 미국의 라디오, 영화, 언론, 출판의 대중매체를 100퍼센트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극악무도한 전체주의 국가로 묘사하기 위해 매우 저속한 표현방법들까지 동원하고 있는데, 그들의 프로파간다는 유럽의 현 상황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미국의 일반대중에게는 매우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들 중에 언변이 뛰어난 자들은 수많은 강연기회를 통해 독일에 대한 각종 중상모략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폐악과 대비시켜 미국의 자유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매우 치밀하게 조직된 이 프로파간다 캠페인의 공격대상은 오직 국가사회주의 독일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소련에 대한 얘기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필요에 의해 어쩌다 언급되더라도 소련은 매우 진보적이며 선의로운 국가, 혹은 서방민주국 블럭의 동반자라는 인상을 주는 방향으로 언급됩니다. 교묘한 프로파간다 덕분에 지금 미국대중의 대부분은 심정적으로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들은 미국대중의 전쟁심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는 유럽의 평화가 나치독일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들이 매일같이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파시즘에 대한 증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을 비롯하여 독일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심과 중상모략은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이로인해 독일을 떠난 유대인들에 의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류에 있어 버나드 바룩, 뉴욕주지사 리먼, 대법원판사 필릭스 프랑크푸터, 재무장관 모겐소 같은 유대계 유력인사들은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들이자 私的으로도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이들은 미국의 대통령이 세계의 말썽꾼들을 벌주는, 인권, 종교, 언론의 자유를 위한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소위 ‘미국적 가치관’과 ‘자유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행세하는 이 그룹을 가까이서 관찰할 때, 이들은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국제유대인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이 유대 인터내셔널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인권의 수호자로 부각시킨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서반구를 증오와 적개심의 온상으로 만들어 놓았고 세계를 두 편의 적대적 진영으로 갈라 놓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일반인들이 감지할 수 없는 막후에서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결정되며 또 실행되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지금 국제유대인이 원하는 다음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을 폐기하려하고 있으며, 이와동시에 막대한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있습니다.” - Report to Warsaw, January 12, 1939: J. Fuller, Military History of the Western World, 1954

 

 

요제프 베크  폴란드 외무상
"폴란드 외무장관인 요제프 베크는 다섯 개의 공을 가지고 노는 무모한 게임을 하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3의 유럽’을 위한 야심만만한 계획을 추진함으로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해에서 다다넬스 해협까지에 폴란드가 주도하는 중립적인 세력권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폴란드를 위해서는 히틀러의 공격적인 정책에서 이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대외적으로 조심스러운 그의 친독일 정책은 속으로는 ‘원칙적으로 도이치 사람들의 오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치히를 폴란드 영토에 조건없이 귀속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그렇다, 우리의 포메른’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런 말은 점점 더 자주 공개적으로 등장하였다... 베크가 히틀러의 제안을 뜻밖에도 냉담하게 거절하고 도전적으로 몇 개 사단을 국경지역에 배치한 일은 폴란드가 가진 은밀한 대국의 꿈이 그 배경이었다. 엄격하게 사태를 바라보면 그는 독일의 요구를 불공평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다. 폴란드에게 단치히는 오직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진다는 점을 그는 시인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양보도 모든 폴란드 정책의 가장 깊은 내면의 의도를 완전히 뒤집는 것과 마찬가지 작용을 할 것이다." - 히틀러 평전, 요아힘 페스트, 안인희 역

 

 

비버브룩 卿  영국 언론재벌
“지금 영국에는 히틀러의 집권 후 독일에서 건너온 유태인 2만명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영국이 독일과 평화적인 합의에 이르는 일에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유태인은 이 나라 언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금 우리를 전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 Beaverbrook papers, House of Lords record office

 

Robert Ley  독일 노동연맹 총수
“만약 유태인이 싸움을 원한다면 우리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싸움을 고대해 왔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유태인이 설 자리는 없다. 유태인이든 우리든,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 Wir oder die Juden, Die Hoheitstrager, May 3, 1939

 

리츠-스미글리  폴란드 육군원수
“폴란드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며 독일이 원치않더라도 독일은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The Daily Mail, August 6, 1939

 

ZENTRALVERLAG DER NSDAP
“이러한 상황들의 전개와 함께 폴란드 문제로 인한 긴장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총통은 1월 5일(1939년) Obersalzberg에서 베크 폴란드 외무장관을 영접했다. 그는 단치히가 독일 도시임을 주지시키는 한편 독일-폴란드 관계의 개선을 위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러한 제안들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런던과 파리가 이날의 만남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보호령이 설치된 직후인 3월 31일, 증오로 가득찬 런던의 일부 일간지들은 독일군대가 폴란드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보도했다.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영국-폴란드 관계와 관련하여 영국의 폴란드국경 보장을 선언했다. 그러므로 런던의 전쟁광 써클은 바르샤바 정부에 그들의 의지대로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자유행동권을 선사했다. 런던의 플루토크랫(Plutocrat, 金權정치가)들이 비밀리에 노렸던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제국에 대한 군사적 제재(制裁)의 빌미를 제공해줄 독일과 폴란드의 무력충돌이었다. 바르샤바 정부는 이를 이해했다. 4월부터 폴란드 국경내에 살고 있는 독일거류민들에 대한 테러와 가혹행위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4월 13일에는 단치히 국경부근에서 다수의 독일인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테러행위는 폴란드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사건들은 독일이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한 이 후에 더욱 늘어났다. 독일 영사관은 셀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매일같이 베를린에 보고했다. 5월 8일에는 300명의 독일주민들이 뉴토미셸 郡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5월 9일에는 브롬베르크 소재 독일극장이 강제 패쇄되었으며 5월 15일에는 로드시에서 두 명의 독일주민이, 5월21일에는 칼트호프에서 단치히 시민 한 명이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러한 추세는 5월15일 폴란드의 카스프리즈키 국방장관이 비밀회담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5월 8일경부터 폴란드의 서부국경이 Beuthen, Oppeln, Breslau, Stettin, 그리고 Kolberg를 넘어 독일영토로 확대된 것으로 표시된 지도들이 폴란드 도시들에 배포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단치히를 둘러싼 긴장은 폴란드 정부의 압박 하에 더욱 고조되었다. 6월15일 독일대사는 총통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비방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서한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다. 6월과 7월을 통해 국경침범을 비롯하여 反독일주민 테러사건들이 계속 증가했다. 8월4일 폴란드 정부는 단치히에 상주하는 폴란드 세관원들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낭설에 근거하여 그들의 요구에 불응할시 도시 외부로부터의 식료품에 의존하는 단치히의 국경을 봉쇄하겠다는 내용의 무례하며 도발적인 최후통첩을 단치히 시정부에 전달했다. 8월7일 단치히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독일정부는 8월 9일 이와 관련하여 폴란드 정부에 우려를 표시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막 아래서 오만해진게 분명한 폴란드 정부는 8월 10일 불성실한 답변서를 보내왔다. 이에 8월 18일 단치히 방어를 위해 친위대 방위군에 동원령이 발동되었고 일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돈 많은 전쟁광들은 이 모든 일로부터 손을 씻고 무죄를 주장하여 그들이 원했던 전쟁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조차도 영국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세관 문제를 둘러싼 단치히 市와 폴란드의 협상은 폴란드 정부의 무리한 요구탓으로 8월 24일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그러자 폴란드는 예비병력에 대한 확대동원령을 발동하고 국경에 대한 도발을 가중시켰다. 8월 25일 폴란드군은 국제영공을 비행하고 있는, 제국의 각료가 탑승한 비행기에 발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은 누구도 오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8월 25일 영국은 폴란드 보호동맹에 서명했고 바로 다음날 15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징집되었다. 8월27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총통은 양국의 평화를 보장하는 선에서 단치히, 단치히 통로, 그리고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천명했다. 이로인해 8월28부터 31일까지 베를린, 로마, 런던, 파리에서는 분주한 외교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더하여 총통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특사의 파견을 기대한다고 발표함으로서 다시 한번 평화적 해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8월 30일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8월 31일 폴란드 국영라디오는 양국간의 문제에 대한 독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독일 영사관은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55건의 독일주민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보고했으며 폴란드군은 8월 31일 중대한 국경도발 행위를 감행했다. 이에 맞서 독일은 9월 1일 폴란드와 개전했다. 이날 총통은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날 또한 단치히는 제국과의 연합을 선포했다." (Jahreswechsel 1939/40. Sylvesteransprache an das deutsche Volk, Die Zeit ohne Beispiel, 1941)

 

 

1939년 9월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상실한 舊영토를 둘러싼 분쟁 끝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국경을 보호하고 나치독일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동시에 동부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1939년 11월 소련이 다시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에도 양국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철회해달라는 히틀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독일의 서부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1940년 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英-佛 연합군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영국군의 덩케르크 탈출을 끝으로 두 주만에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Guenther von Blumentritt  독일 육군소장
영국군과 프랑스 잔여 병력을 생포할 수 있었으나 이들 병력의 영국 탈출을 허락했던 히틀러의 덩케르크 정지명령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Liddell Hart는 독일군 장성 블루멘트리트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인용했다: “영국군의 궤멸이 눈앞에 있는 시점에서 총통은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말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대영제국의 존재는 세계질서를 위해 필수적이며 영국이 이 세계에 가져온 문명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영제국은 대게 잔혹한 군사적 정복의 결과로 만들어졌으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영제국을 카톨릭 교회와 비교하며 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양자의 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가 영국에게서 바라는 것은 오직 영국이 대륙에서의 독일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이 독일의 舊식민지들을 반환해주면 좋은 일이나 그렇지 않다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으며, 만약 영국이 지구 어디서 곤경에 처해있다면 독일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도울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 Basil Liddell Hart, The Other Side of the Hill, 1948

 

30년대 내내 스포트라이트에서 밀려나 있었던 처칠은 1940년 5월 전시수상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처칠과 버나드 바룩과의 관계에 대해 영국 역사가 윌리엄 맨체스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이는 윈스턴이 바룩에게 지녔던 큰 호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바룩은 미국인이었고 또한 유태인이었으며 강대한 독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또한 처칠은 바룩이 베푼 각별하면서도 매우 계산적인 호의에 큰 빛을 진 일이 있었다. 윈스턴은 30년대 초의 대공황과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만약 바룩이 아니었다면 그는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빛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도박에 있어 타고난 승리자라기보다는 타고난 호구였다.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바룩의 5번가 맨션에 머물렀던 윈스턴은 대공황이 닥치기 몇 년전 바룩의 조언에 따라 주식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가 리비에라 도박장의 룰렛바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가의 등락 앞에서 노심초사하며 값이 떨어질때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결국 몬테카를로에서처럼 그는 월가에서도 실패했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 바룩과 대면했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었으며 차트웰의 저택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처분해도 빛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 울먹였다. 그는 빛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정계를 떠나 사업을 시작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거물 투자은행가는 그가 정계를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윈스턴이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다감하게 위로해주었다. 바룩은 처칠이 파는 주식은 무조건 사들이고, 그가 사려는 주식은 무조건 팔라는 지시를 그의 비서들에게 남겼다. 결국 윈스턴은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채 월가에서 고스란히 본전을 건져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바룩이 그의 수수료까지 대신 지불해주었기 때문이었다.” (William Manchester, The Last Lion: Winston Spencer Churchill; Alone 1932-1940, 1988)

 

 

Lothrop Stoddard  미국 언론인
“독일인들은 이 전쟁을 혐오한다. 이런 인상은 제 3제국에 머무는 동안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얘기는 한결 같았다. 전쟁에 대하여 내가 접한 베를린 시민들의 생각은 라인란트에 이르는 중서부 독일과 북해연안의 도시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비엔나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나치당원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이 전쟁을 혐오하는 감정은 정치적 신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들 자신이 서방국가들과의,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싸움에 휘말려 있음을 발견한 독일인들이 느낀 감정은 대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이 전쟁에 대한 철저한 혐오감과 이 전쟁이 전혀 필요가 없는, 매우 어리석은 전쟁이라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 이 전쟁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만났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전쟁을 비극적인 실책으로 낙인을 찍었고 일부는 그들 정부의 섣부른 대응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들은 좀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독일이 성취하려는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비록 그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히틀러도 그에게 열려 있었던 유일한 길을 선택한 것이며, 결국에는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했던 열렬한 나치당원들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이 전쟁에 대한 침울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한창 새 나라를 만드는 일로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때문에 우리가 구상했던 계획들을 모두 옆으로 밀쳐두고 저 빌어먹을 영국놈들과 싸우러 가게 되었으니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독일인들의 지금 심정은 이제 막 포커게임에서 큰 돈을 따기 시작했는데 누군가가 들어와 테이블을 겆어차버리는 일을 당한 사람의 그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들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법적장치들과 차별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상점과 레스토랑의 출입구에는 ‘유대인 사절’, 혹은 ‘유대인 입장불가’라고 적힌 표지판들이 붙어있었다. 이러한 유대인 금지조치는 독일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쇼핑을 하거나 집 밖에서 외식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직능조합에 등록을 하면 일정시간 동안 이들 상점이나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독일인들에게 지급되는 것과 똑같은 식료품 구매권이 지급되지만 내가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유대인들에게 의류품 구매권은 지급되지 않았다... 보통 독일인들은 억압받는 이 소수민족에 대해 외국인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내키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가혹행위나 폭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만큼 그들은 유태인들이 그들의 나라를 떠나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필자가 받은 인상이었다.” (Lothrop Stoddard, Into the Darkness, 1939)

 

 

찰스 린드버그  미국 비행사
“우리는 라디오, 영화, 신문 등, 우리 나라의 대중매체들에 유태인들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의 그러한 영향력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풀턴 루이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한 유대계 광고회사는 뮤츄얼 방송국이 독일에 호의적인 어떤 프로그램을 방송할 경우 모든 광고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 한다. 그들의 압력에 결국 그 프로그램은 전파를 타지 못했다.” - August 23, 1939

 

"유럽의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언론의 선동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국민들은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FDR 정부의 의도는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 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유태인 이익단체들은 막후에서 미국의 참전을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나라 언론과 라디오, 대부분의 영화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 May 1, 1941, The Wartime Journals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 일본대사 쿠루수, 히틀러)

 

진주만  

"진주만을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스텝은 1941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행정부는 미국을 전쟁이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공 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미국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다양한 도발적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루즈벨트 정부는 미국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했고 파나마 운하 사용을 금지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점증적인 무역봉쇄는 결국 영국과의 공조하에 무제한적 봉쇄조치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석유 및 기타 전략자원의 수급이 불가능해졌다. 미국정부는 또한 수차례에 걸쳐 도쿄를 상대로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11일 전인 11월26일 미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내기에 이른다. 최후통첩에서 미국은 무역봉쇄 해제에 대한 조건으로, 중국,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과 독일 이탈리아와의 추축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前해군성장관 보좌관을 지냈던 프랭크 비티는 후일 이렇게 섰다, “1941년 12월7일(진주만 공습일) 전까지 미국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본을 코너에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요구한, 예를 들어 일본군의 중국 철수는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기를 바랬다.” 전시 영국 생산성장관 올리버 리틀튼은 1944년 좀더 솔직하게 시인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취한 도발적인 조치들에 연유한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어설픈 코미디다.”... 많은 사람들은 FDR이 일본과의 전쟁을 원했던 이유는 일본이라는 “뒷문”을 통해 미국의 지배적인 반전여론을 무력화시킨뒤 더욱 중요한 유럽전선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한다. 루즈벨트의 내무장관(Secretary of the Interior) 해롤드 아이크스의 1941일 10월 발언은 그와같은 의도를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유럽의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일본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실로 미국의 대통령은 독일의 군사적대응을 촉발시키기 위한 도발행위들도 서슴치 않았다. 진주만공습으로 인한 독일과의 개전 전부터 루즈벨트 행정부는 미국 내 독일의 자산을 동결했으며 미군을 동원해 아이슬란드를 점령했다. 또한 미국의 중립법(Neutrality Act)을 위반해가면서 까지 랜드리스 법안을 통과시켜 50척의 구축함등, 막대한 전쟁물자를 영국에 지원했다. 또한 루즈벨트는 미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수중폭뢰로 독일의 잠수함을 공격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독일은 철저하게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독일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독일은 미국의 참전으로 1차대전에서 패한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이를 되풀이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FDR은 만약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3국동맹의 의무사항으로 인해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수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전쟁기간 동안 네바다의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주만공습이 일어나기 이미 수개월 전부터 미국의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이 루즈벨트의 지시 하에 서부지역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명단과 주소를 확보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운명의 날이 오기 전 대통령은 이미 천만명의 병력동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타일러 켄트)


“루즈벨트의 의도는 1940년 거의 국민들에게 공개될 뻔 하기도 했다. 런던의 미국대사관에서 암호해독요원으로 근무했던 타일러 켄트(Tyler Kent)는 루즈벨트와 처칠 사이에 오간 비밀교신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문서들에는, 미국은 결코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국민 선전과는 달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루즈벨트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통령의 거짓말에 속고있는 국민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들 문서의 일부를 대사관 밖으로 유출한 켄트는 그러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워싱턴의 동의 하에 켄트는 영국의 비공개 법정에 회부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영국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사유없이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뚜렷한 명분도 없이 그들의 아들들을 외국의 전쟁터에 보낼 생각이 없었던 보통 미국인들 사이에서 반전여론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1941년 10월16일,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했던 국방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섬세한 기술을 요하는 외교적 펜싱게임을 진행중이다. 우리의 목적은 이러한 게임을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먼저 惡手를 두도록 몰아가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 駐美 일본대사에 전달되기 하루 전인 11월 25일 대통령은 스팀슨을 비롯한 각료들과 회의를 가졌다. 스팀슨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날 논의된 주제는 어떻게 일본을, 그들이 우리에게 먼저 총을 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가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알려진바와 같이 미국과 영국은 이미 1941년 초반부터 각각 독일과 일본의 암호코드에 대한 해독시스템인 ‘Enigma'와 ’Magic'을 가동중이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7일 아침, 진주만 상공 위에 날아든 일본해군의 폭격기들이 미국의 항공모함들을 비롯한 신형 전함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제국이 되어 東亞의 맹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일개 섬나라로 남을 것인가... 일본의 절망적 도박)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일시에 무력화시킴으로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했다)

 

(침몰하는 1차대전 드레드넛형 고물전함 아리조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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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Japanese postcard showing the destruction of HMS Prince of Wales and HMS Repulse.
The translation reads; (bottom of card) "Sea Battle off Malaya 10 December 1941"
(left side) "Our Sea Eagles deliver a crushing blow to the main strength
of the English Far Eastern Fleet, Prince of Wales and Repulse"

 

 

 

AMERICAN HEBREW  미국 유대계 유력지
“맥아더의 지휘 하에 바탄이나 코레히도르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미국인 장병과 필리핀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독일에서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 July 24, 1942

 

 

CENTRAL BLAD VOOR ISRAELITEN  네덜란드 유대계 일간지
“물론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영국, 프랑스, 러시아,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우리 유태인은 최후의 그날까지 對 독일 절멸 전쟁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 September 13, 1939

 

Schalom Asch  유태인 작가 (佛)
“비록 유태인들이 참호에서 육체적으로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며 여러분은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 Les Nouvelles Litterairres, February 10, 1940

 

Rabbi Felix Mendlesohn  유대교 지도자 (美)
“2차세계대전은 유대교의 근본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 Chicago Sentinel, October 8, 1942

 

 

카임 바이츠만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우리는 이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 전쟁이 유대민족의 해방을 위해 치러지고 있는 것임을 고백함에 있어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모든 나라를 합친 것 보다 더 강력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은 우리 유태인이다. 우리는 단지 이 전쟁에 우리의 경제력만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뛰어난 프로파간다 능력으로 이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도덕적인 명분을 제공하는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 승리의 관건은 우리가 얼마나 적을 그들의 내부로부터 무력화 시킬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예를 들면 레지스탕스 운동 등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면에 있어 우리야말로 적군의 요새안에 들어가있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 있는 수십만의 우리 유태인 동포들은 우리의 적을 멸하는데 있어 1차적인 몫을 담당할 요소이다. 우리의 전선은 바로 그곳에 있으며 그들의 활약은 최종적 승리에 대한 가장 값진 기여가 될 것이다.” (Speech on December 3, 1942, in New York City)

 

(Henry Morgenthau, Jr)

 

헨리 모겐소 2세  유태인 미국 재무장관
“30년전쟁이 끝난 뒤 그러했듯이 독일을 다시 한번 허허벌판 황무지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The Morgenthau Diary)

 

 

 

디어도어 카우프만  유태인 작가 (美)
“그들이 반나치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유태인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자이건 간에 모든 독일인은 살려둘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나면 2만명의 의사를 동원하여 하루에 25명씩 독일인들의 생식능력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3개월 이내로 독일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것이며 독일민족은 60년 안으로 완전히 멸종될 것이다.” (Germany Must Perish, 1942)

 

 

조셉 괴벨스
"우리를 절멸하려는 연합국들 배후에 국제유대인이 있다는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전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은 흑암의 권세로 그들에게 항거하는 국가들을 파괴하고 전 세계를 기만하여 인류를 어둠 속에 감금하려 한다. 말하자면 유대인은 계층과 이데올로기의 차이, 그리고 각국의 국익과는 상관없이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일한 유대적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똑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유대인은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그들에게 종속시켜 두기 위해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연합국과 많은 중립국의 대중여론에 대한 국제유대인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는 이들 국가의 언론들이 유대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유대인들이 가진 권력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 신문과 강연회,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유대인 문제가 공론화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소련에는 소위 '반유대주의'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법이 있는데, 이는 쉽게 말하자면 그 누구든 유대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뜻이다. 이런 행태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은 따라서 이 '반유대주의' 금지법이 전 세계에 확립될 때까지 소련은 쉬지 않을 것이라는 크레믈린 대변인의 신년사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적은 이 전쟁이 이 땅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유대인의 지배를 제도화하기 위한 것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이러한 야비한 책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죽음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플루토크랫들(plutocrats)이 통치하는 서방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조금 다르다. 유대민족의 방약 무도한 국권탈취에 대한 투쟁은 사형집행자에 의해 처벌되는 대신, 경제, 사회적 보이콧이나 知的테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는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스탈린과 처칠, 루즈벨트는 유대인에 의해 오늘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국제유대인의 아낌없는 성원을 받는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철저한 보호로 보답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슨 대단한 용기의 애국자들로 포장하지만 그들의 조국에 수많은 병폐를 야기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 그들의 국가들에서조차 이번 전쟁으로 유대인에 대한 정당한 반감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도 말이다. 유대인 문제는 이들 국가에는 금기시되는 주제이다. 유대인은 이들 국가의 모든 법과 제도 위에 존재하며 따라서 주인민족 위에 군림하는 폭군이 된다. 연합국의 병사들이 전선에서 피를 흘릴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희생을 담보로 주식시장과 암시장에서 돈을 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이 앞에 나서 유대인들의 범죄를 고발하면 그는 유대 언론의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에 시달리다가 시중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또는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사업체의 문을 닫아야 하는 등 빈곤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겐 이것도 충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어떤 법에 의해서도 처벌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절대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전 세계에 소련의 상황을 불러 오는 것이다. 이를 입에 담거나 조금이라도 항거하는 사람은 뒤통수에 총을 맞거나 목에 칼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폭정도 없을 것이다. 이야말로 마땅히 그들만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국가들 위에 유대인이 강요하는 오욕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아직까지 외부로부터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제국에서 유대인의 권력을 꺾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 세계를 독일과의 전쟁에 몰아넣을 때까지 쉬지 않았다. 안에서 독일을 정복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밖으로부터의 정복을 시도하고 있다. 모든 러시아, 영국, 미국 병사들은 이 기생충 민족이 획책하는 세계지배 음모의 희생양들이다. 진정 이 전쟁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이들이 그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모든 나라의 국민들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를 반대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 세계인들이 이 전쟁의 배후에 그들이 있다는 진실에 눈을 뜨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의 가면이 벗겨질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밤이 지나면 낮이 오듯 진실의 순간은 올 수 밖에 없다. 이를 보면 유대인들이 왜 우리를 그토록 증오하지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증오심의 뿌리는 그들이 가진 두려움과 열등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증오심으로 그토록 요란법석을 떠는 것은 만인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야기하는 그들의 독소적인 본질에 대한 교육이나 지식을 폄하하는 것은 국제유대인의 고전적인 술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인과 결과를 곧 잘 혼동하는 대중의 무지에 의존한다. 유대인들은 또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 세계적 통신사들과 언론을 통한 대중여론 조작의 천재들이다. 그들은 소위 '자유언론'이란 터무니없는 환영(幻影)으로 적국 국민들의 지각을 마비시킨다. 만약 적국의 언론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자유롭다면 한번 유대인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찬반(贊反) 논쟁을 벌여 볼 것을 그들에게 요구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제외한 모든 것에 냉소를 퍼붓고 조롱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 누구보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적국에서 말하는 소위 '자유언론'은 바로 여기에서 끝난다. 신문, 의회, 정치인,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인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닫고 살아야 한다. 그들은 유대인의 범죄와 그들이 퍼뜨리는 사회악과 추잡한 문화를 사랑과 똘레랑스라는 이불로 감싸줘야 한다. 적국들의 대중여론은 철저히 유대인들의 통제 하에 있다. 그리고 그런 통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은 모든 공공적(公共的) 일상의 군주가 된다. 오로지 이런 상황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들이 딱할 뿐이다. 유대인은 이들 나라의 국민들로 하여금 독일이 후진적인 나라라고 믿게끔 오도(誤導)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우리의 후진성이란 실제로는 우리가 성취한 진보이다. 일찍이 유대인이 우리 조국에 대한 위협이자 세계평화의 적임을 직시했던 우리는 이와 관련된 지식을 근거로 많은 유용한 결론들을 얻어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전 세계인의 지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이런 지식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인류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아둔하고 원초적인 상태로 가라  앉을 것이다. 유대인은 우리가 고귀하며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말살하기 위한 이번 전쟁으로 적국의 수뇌부를 유도한 죽음과 파괴의 화신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때문에 우리를 증오한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하찮은 유랑민족의 정신세계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우리의 문화와 학문을 증오한다. 유대인은 그들을 우리의 사회로부터 추방한 뒤 독일이 이룩한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상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의 무정부주의적인 기질로 인하여 국가에서 축출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질서의 적이었다. 독일은 세계에서 유대인의 악성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첫 번째 근대국가이다. 이는 우리가 이룬 정치와 경제의 균형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독일의 공공적 일상으로부터 추방당한 뒤 내부로터 이 균형을 파괴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그들이 기만한 국가들을 우리와의 전쟁에 내몰아 외부로부터 다시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 모든 일들이 전개되는 동안 유럽은 그들이 물려받은 문화적, 정신적 유산의 큰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 유산의 창조에 있어 유대인이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유럽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뿌리 깊은 민족적 본능에 의해 그들은 그들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인류의 창의성을 증오심을 안고 공격한다. 유럽, 아니 전 세계가 이렇게 외칠 날도 머지않았다, '유대인은 인류의 불운이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물론 국제유대인은 알리바이를 준비해두고 있다. 독일민족이 마침내 깨어나기 시작했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척, 독일인들에게는 속죄양이 필요한데 힘없는 그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 혁명기에 그랬던 것처럼 그런 연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크고 작은 죄상들은 너무도 명백하기에 그 어떤 간교한 거짓말과 위선으로도 그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백만의 러시아, 영국, 미국 병사들을 내몰아 때죽음을 강요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는 기사나 군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그들에게 속은 국가의 청년들은 살육의 도가니로 내몰린다. 우리 유럽인의 일상과 경제, 교육, 문화에 대한 엄청난 자해행위요 자기파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이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해 날마다 새로운 계략을 꾸며내고 증오에 찬 선전선동에 광분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유대인이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볼셰비즘이란 괴물의 만부당(萬不當)한 결혼을 주선한 자들은 누구인가? 또한 소련에 돈과 무기를 대주고 이 볼셰비스트 괴물을 기필코 살려내려는 자들은? 변태적인 정치놀음과 냉소적인 위선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엄청난 인간비극을 초래한 자신들의 죄상이 천하에 드러나게 될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유대인, 오직 유대인이다! 그들은 모겐소나 리먼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루즈벨트를 배후에서 조종한다. 그들은 메셰트(Mechett)와 사순(Sassoon)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처칠의 물주요 명령자들이다. 그들은 카가노비치와 에렌버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스탈린의 속도조정자요 지적(知的) 대변인이다. 어디를 보든 그곳에는 항상 유대인이 있다. 그들은 정치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따라다니며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테러와 대량학살을 조직한다. 그들은 또한 안전한 후방인 파리, 브뤼셀, 로마, 그리고 아테네에 앉아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불운한 국가의 국민들에게서 벗겨낸 가죽으로 만든 채찍으로 그들 위에 군림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이런 진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들이 가진 권세와 그들이 거둔 승리에 흠뻑 취해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항상 벗어나 있기를 바라는 평상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지배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착각으로 때 이르게 오만방자해지는 그들 특유의 실수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유대인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뿌리내린 나라에서 신의 섭리에 의해 유대인은 자신들의 탐욕으로 항상 제 무덤을 파는 일을 되풀이 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건강한 민족을 죽이지 못했다. 대신 그들의 기생적인 독소는 전 국가와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를 자각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기필코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어느 시점에 있어 유대인은 항상 惡을 원하지만 종국에는 善을 초래하는 존재였다.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독일이 유대인이라는 위협을 자각하고 우리 민족의 유기체로부터 축출한 첫 번째 근대국가라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건강한 본능을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독일은 국제유대인에 맞선 세계적 투쟁을 선도할 것이다. 전 세계 유대인들이 그들의 탈무적인 증오와 원한을 우리에게 퍼붓는 다해도 우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독기(毒氣)는 오직 우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들은 우리를 좌절시킬 수 없다. 극도의 경멸감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1933년 그 운명의 날이 오기 전까지 그들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퍼부었던 증오와 모욕과 흑색선전과 조롱을 기억하고 있다. 1933년 1월30일은 독일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나라들을 위협하는 국제유대인에 대한 세계혁명이 시작된 날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그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거짓말이나 폭력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결국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들은 오늘 우리의 이런 예언을 보고 비웃겠지만 그들의 교만 끝에는 항상 파멸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원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만큼 뭘 원하지 않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속고 있는 지상의 국가들에는 이들과의 싸움에 필요한 지식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이 지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장기적으로 유대인들이 우리의 이런 노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유대인은 그들의 권세가 지금 반석위에 서 있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진흙발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강력한 한 방이면 그것은 모든 불운의 근원인 그들을 그 폐허 속에 묻어버리며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 Die Urheber des Unglucks der Welt, Das Reich, January 21, 1945

 

 

일리야 에렌버그 (Ilya Ehrenburg)  유태인 소련 선전상
“독일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지금부터 독일놈이라는 말은 가장 끔찍한 욕설이다. 지금부터 독일놈이라는 말은 우리의 빠른 행동을 재촉하는 단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말로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흥분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죽일 것이다. 만약 하루내내 독일놈을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면 그 날은 허비한 날이다... 만약 독일놈을 쏴죽일 수 없다면 찔러 죽여라. 너희가 있는 전선이 조용하여 쉬고 있을 때는 그 시간을 이용해 독일놈 한 명을 죽여라. 독일놈 한 명을 살려두면 그 놈은 러시아인 한 명을 목매달 것이고 러시아 여자 한 명을 겁탈할 것이다. 독일놈 한 명을 죽인 다음에는 또 한 명을 죽여라. 집채만한 독일놈들의 시체더미를 보는 것만큼 흥겨운 일도 없다. 지나간 날을 세지말고 전진한 킬로미터를 세지말라. 오로지 너희가 죽인 독일놈들의 숫자만 세어라. 독일놈을 죽여라, 그것이 너희 할머니들의 요구다. 독일놈을 죽여라, 그것이 너희 아이들의 기도다. 독일놈을 죽여라, 그것이 너희들에 대한 조국의 가장 큰 부탁이다. 한 발도 빗나가게 하지 말라. 한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죽여라!” (Alfred de Zayas, Nemesis at Potsdam, 1979)

 

유럽의 古都 드레스덴, 1945년 2월 하룻밤 폭격으로 20만명 사망

 

 

 

 

 

Gotterdammerung - 신들의 황혼

1945년 1월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연합군은 제3제국 독일의 국경선을 따라 집결해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미군과 영국군이 라인강을 따라 포진해 있었고 프랑스군은 아르덴 숲의 끝자락에서 공격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의 670만 붉은군대가 북으로는 발틱연안으로부터 남으로는 아드리아 해까지 늘어서 있었다. 소련군의 병력수는 1941년 6월 소련침공에 동원되었던 독일군의 두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즈음 독일군은 전쟁초기 전격전(blitzkrieg)으로 단시일 내에 유럽을 유린했던 그 독일군이 아니었다. 군수물자 고갈로 야포 한대당 하루 포탄 배정량도 단 두발 뿐이었다. 막강한 소련군의 대공세를 목전에 둔 4만명의 베를린 방위군은 주로 노약자와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부전선에서 차출된 12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히틀러는 직접 최후의 방어전을 준비했다. 100만명의 소련군이 동원된 베를린 공세 3주간 동안 약 200만 발의 포탄과 로켓탄이 베를린에 퍼부어졌고 그 폭음만으로도 독일 병사들은 귀에서 피를 흘렸다. 그러나 초토화된 베를린의 폐허 속에 몸을 숨긴 독일 소년병들의 악착같은 응전으로 5월 2일 제국청사 정상에 적기(赤旗)를 계양하기까지 소련군은 8만명의 사망자와 27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 무렵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고 괴벨스와 그의 부인은 자식 여섯명과 함께 음독 자살했다. 실로 제3제국 최후의 날은 바그너가 그의 오페라들에서 보여줬던 결말보다 더 음울한 것이었다. 영국 역사가 Anthony Beevor의 'Berlin: the Downfall 1945' (2002)에 의하면,1945년 소련군의 독일본토 공세기간 동안 12세에서 80세에 이르는 약 200만명의 독일 여성들이 윤간당했으며 피해자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이 그 상흔으로 목숨을 잃거나 자결했으며 상당수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ENEMY AT THE GATE',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Red Army

 


 

오늘날 서구의 주류 역사가들이 언급하지 않는 2차대전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당사국 국민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유럽의 절반이 억압적인 공산치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연합국이 내건 명분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였음을 상기할 때 이는 꽤나 모순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축동맹의 일본과 이탈리아 외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가 독일 편에서 싸웠으며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노르웨이, 우크라이나, 발틱3국 출신의 많은 자원병들이 무장친위대 사단들에서 전투병으로 복무했다. 전후, 공교롭게도 연합국 측에서 싸웠던 폴란드, 체코, 세르비아는 다른 동구유럽국가들과 함께 소련의 공산주의 위성국들로 전락했다. 미국과 영국이 내걸었던 명분이 진실된 것이었다면 그들은 독일 대신 소련과 싸웠어야 했을 것이다.

 

2차대전으로 인한 주요 참전국들의 인명손실(군, 민간 포함)은 다음과 같다:

 

소련: 2천만명 - 독일: 9백만명 - 일본: 4백만명 - 중국: 9백만명 - 폴란드: 3백만명 - 영국: 80만명 - 프랑스: 60만명 - 미국: 60만명

 

The End of the Old World Order

 

 

 

 

 

 

 

 

 

 

 

 

 

戰後 소련과 동구권의 주요 유태인 권력자들

 

SOVIET UNION

 

1. Zdanov (Yadanov), who in reality was called Lipshitz, former commander in the defense of Leningrad during the 2nd World War. Member of the Politburo up to 1948 and one of the instigators of the decision which excluded Tito from the Cominform in the year 1948 and who shortly afterwards died.

 

2. Lavrenty Beria, Chief of the M.V.D. Police and of Soviet heavy industry, member of the Soviet Atom industry, who was executed upon orders of Malenkov, and in fact for the same reason for which Stalin liquidated Yagoda.

 

3. Lazar Kaganovich, director of Soviet heavy industry, member of the Politburo from 1944 to 1952, then member of the Presidium and President of the Supreme Presidium of the USSR.

 

4. Malenkov (Georgi Maximilianovich Malenk), member of the Politburo and Orgburo until 1952, then member of the Supreme Presidium, President of the Ministerial Council after the death of Stalin; Minister in the government of Bulganin since 1955

 

5. Nikolaus Solomon Khruschchev, chief (1963)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member of the Politburo since 1939, i.e. since the year when Malenkov was chosen member of the Orgburo

 

6. Marshal Nikolaus Bulganin, Soviet minister, former bank official, was one of the ten Jewish members of the Commissariat for the liquidation of private banks in the year 1919.

 

7. Anastasio Josifovich Mikoyan, member of the Politburo since 1935, member of the Supreme Presidium since 1952, Trade Minister and Vice-President in the Malenkov government

 

8. Kruglov, chief of the M.V.D. after Beria

 

9. Alexander Kosygin, member of the Politburo up to 1952, afterwards deputy in the Supreme Presidium and Minister for light industry and food in the Malenkov government.

 

10. Nikolaus Schvernik, member of the Politburo up to 1952, the member of the Supreme Presidium and member of the Presidium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11. Andreas Andreievich Andreiev, who was known as the "Politbureaucrat" of 3 A, member of the Politburo between 1931 and 1952

 

12. P.K. Ponomarenko, member of the Orgburo in the year 1952; afterwards member of the highest Presidium and culture minister in the Malenkov government.

 

13. P.F. Yudin, deputy member of the highest Presidium and titulary of the Ministry for Building Material in the Malenkov governement in the year 1953.

 

14. Mihail Pervukin, member of the Presidium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since 1953.

 

15. N. Schatalin, official in the sub-secretariat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16. K.P. Gorschenin, Justice Minister in the government of Malenkov.

 

17. D. Ustinov (Zambinovich), Soviet Ambassador in Athens (Greece) up to the Second World War; Defense Minister in the Malenkov government

 

18. V. Merkulov, Minister for State Control at the time of Malenkov.

 

19. A. Zasyadko, Minister for the Coal Industry under Malenkov.

 

20. Cherburg, Soviet Propaganda chief.

 

21. Milstein, one of the Soviet espionage chiefs.

 

22. Ferentz Kiss, chief of the Soviet espionage Service in Europe.

 

23. Postschreibitscher (Poschebicheve), former private secretary of Stalin, chief of the secret archives of the Kremlin.

 

24. Ilya Ehrenburg, delegate for Moscow in the Supreme Soviet, communist writer

 

25. Mark Spivak, delegate from Stalino (Ukraine) in the Supreme Soviet of Moscow.

 

26. Rosalia Goldenberg, delegate from Birobidzhan in the Supreme Soviet.

 

27. Anna E. Kaluger, delegate of Bessarabia in the Supreme Soviet, her brother, not Kaluger, but Calugaru in Rumanian, is a communist official in the government of Rumania. (Also Kalinin, one of the great Soviet officials under Stalin, who died some time ago, was a Jew.)

 

28. Maxim Maximovich Litvinoff,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up to 1939, when he was replaced by Molotov. He afterwards occupied high offices in the same ministry up to his death in February 1952.

 

29. Andreas Januarevich Vishinsky, foreign minister of the USSR before the death of Stalin and afterwards permanent representative of the Soviet Union in the UNO.

 

30. Jakob Malik, Soviet representative in the UNO and a great personality in the Soviet diplomatic hierarchy

 

31. Valerian Zorin, for a time ambassador in London and likewise a great figure of Soviet diplomacy, who changes his post according to necessity.

 

32. Andrei Gromyko,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since 1958.

 

33. Alexander Panyushkin, former Soviet ambassador in Washington, ambassador in Peking during the year 1955

 

34. Zambinovich (Ustinov), ambassador in Athens up to 1940

 

35. Admiral Radionovich, ambassador in Athens between 1945 and 1946

 

36. Constantin Umansky, ambassador in Washingt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nd afterwards official in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in Moscow

 

37. Manuilsky, former representative in the Ukraine and in the UNO, President of the Ukraine

 

38. Ivan Maisky, ambassador in London during the war, afterwards high official of the Foreign Ministry in Moscow

 

39. Madame Kolontay, ambassadress in Stockholm until her death in March 1952; Jewess

 

40. Daniel Solod, ambassador in Cairo in the year 1955

 

41. Yuri Andropov, KGB Chief, General Secretary of Soviet Politburo

 

HUNGARY

 

1. The most important Communist leader since the occupation of this land by Soviet troops is Mathias Rakosi, an Israelite, whose real name is Mathew Roth Rosenkranz, who was born in the year 1892 in Szabadka.

 

2. Ferenc M?nnich, first minister in Hungary in the year 1959 after Janos Kadar.

 

3. Erno Gero, Minister of the Interior until 1954.

 

4. Szebeni, Minister of the Interior before the Jew Gero.

 

5. General Laszlo Kiros, Minister of Interior since July 1954, simultaneously chief of the A.V.O., that is to say the Hungarian police, which corresponds to the Soviet M.V.D.

 

6. General Peter Gabor, chief of the Communist political police of Hungary up to 1953

 

7. Varga, State Secretary for Economic Planning and President of the Supreme Economic Council

 

8. Beregi,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9. Julius Egry, Agriculture Minister of the Hungarian Peoples Republic.

 

10. Zoltan Vas, President of the Supreme Economic Council

 

11. Josef Reval!, dictator of the Hungarian press and director of the red newspaper "Szabad Nep" (The Free People)

 

12. Reval! (another), Minister for National Education

 

13. Josef Gero, Transport Minister

 

14. Mihaly Farkas, Minister for National Defense

 

15. Veres, Minister of State.

 

16. Vajda, Minister of State.

 

17. Szanto, Commissar for purging of enemies of the State, in the year 1951 sent by Moscow

 

18. Gyula Dessi, Justice Minister up to 1955 and chief of the Secret Police

 

19. Emil Weil, Hungarian ambassador in Washington; he is the doctor who tortured Cardinal Mindszenty.

 

Among other important Jewish officials to be mentioned are:

 

1. Imre Szirmay, director of the Hungarian radio company.

 

2. Gyula Garay, judge of the Communist "Peoples Court of Budapest".

 

3. Colonel Caspo, subchief of the secret police.

 

4. Professor Laszlo Benedek, Jewish dictator for educational questions.

 

The sole important Communist of Gentile origin was the Freemason Laszlo Rajk, former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who was sentenced and executed by his Jewish "brothers" for his "betrayal".

 

CZECHOSLOVAKIA

 

1. Clemens Gottwald, one of the founders of the Communist Party in Czechoslovakia and president of the country between 1948 and 1953

 

2. Vladimir Clementis, former Communist minister of Czechoslovakia for Foreign Affairs, "sentenced and executed" in the year 1952

 

3. Vaclav David, foreign minister of Czechoslovakia

 

4. Rudolf Slansky, former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Czechoslovakia, "sentenced" in the year 1952

 

5. Firi Hendrich,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6. General Bendric Reicin, "convicted" in 1952

 

7. Andreas Simon, sentenced in the year 1952

 

8. Gustav Bares, assistant of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9. Josef Frank, former assistant of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sentenced" in the year 1952

 

POLAND

 

1. Boleslaw Bierut, President of Poland up to 1954

 

2. Jakob Berman,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Poland

 

3. Julius Kazuky (Katz),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of Poland, who is well known for his violent speeches in the UNO

 

4. Karl Swierezewsky, former vice-minister for National Defense, who was murdered by the Anti-Communist Ukrainian country population in south Poland (the mass of the people is not always amorphous)

 

5. Josef Cyrankiewicz, first Minister of Poland since 1954, after Bierut

 

6. Hillary Mink, Vice Prime Minister of Poland since 1954

 

7. Zenon Nowak, Second Prime Minister of Poland since 1954

 

8. Zenon Kliszko, Minister of Justice

 

9. Tadeus Kochcanowiecz, Minister of Labour

 

The sole important Polish Communist of Gentile origin is Wladislaw Gomulka, who was removed from political leadership since 1949, when he lost his post as first minister

 

RUMANIA

 

1. Anna Pauker, Jewess, former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of the "Rumanian Peoples Republic", and spy No. 1 of the Kremlin in Rumania up to the month of June 1952

 

2. Ilka Wassermann, former private secretary of Anna Pauker and the real directress of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3. Josef Kisinevsky, the agent No. 1 of the Kremlin in Rumania,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and vice-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4. Teohari Georgescu, Minister for Internal Affairs in the Communist government of Bucharest between 1945 and 1952

 

6. Lotar Radaceanu, another Minister of the Communist government of Bucharest "deposed" in the year 1952, but who in 1955 reappeared on the honorary tribune

 

8. Lieutenant General Moises Haupt, commander of the military district of Bucharest

 

9. Colonel General Zamfir, Communist "security chief" in Rumania and responsible for thousands of murders, which the secret police have perpetrated.

 

10. Heim Gutman, chief of the civil secret service of the Rumanian Peoples Republic

 

11. Major-General William Suder, chief of the information service and of counter-espionage of the Rumanian Communist Army

 

12. Colonel Roman, former director of the E.K.P. service (education, culture and propaganda) of the Rumanian Army up to 1949 and Minister in the Communist government

 

13. Alexander Moghiorosh, Minister for Nationalities in the red government

 

14. Alexander Badau, chief of the Control Commission for Foreigners in Rumania

 

15. Major Lewin, chief of press censorship and former officer of the Red Army

 

16. Colonel Holban, chief of the Communist "Security" of Bucharest, and former Syndicate (Union) chief.

 

17. George Silviu, general governmental secretary of the Ministry for Internal Affairs

 

18. Erwin Voiculescu, chief of the Passport department in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19. Gheorge Apostol, chief of the General Labour Union of Rumania

 

20. Stupineanu, chief of economic espionage

 

21. Emmerick Stoffel, Ambassador of the Rumanian Peoples Republic in Switzerland

 

22. Harry Fainaru, former legation of the Rumanian Communist Embassy in Washington up to 1954 and official in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in Bucharest

 

23. Ida Szigally, the real directress of the Rumanian Embassy in London; Jewess; friend of Anna Pauker

 

24. Lazarescu, the "Charge d'affairs" of the Rumanian government in Paris

 

25. Simon Oieru, State under-secretary of the Rumanian State

 

26. Aurel Baranga, inspector general of arts

 

27. Liuba Kisinevski, president of the U.F.A.R. (Association of anti-Fascist Rumanian women)

 

28. Lew Zeiger, director of the Ministry for National Economy

 

29. Doctor Zeider, jurist of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30. Marcel Breslasu, Director General of Arts

 

31. Silviu Brucan, chief editor of the newspaper "Scanteia", official party organ

 

32. Samoila, governing director of the newspaper "Scanteia"

 

33. Horia Liman, second editor of the Communist newspaper "Scanteia"

 

34. Engineer Schnapp, governing director of the Communist newspaper "Romania Libera" (Free Rumania), the second Communist newspaper on basis of its circulation

 

35. Jehan Mihai, chief of the Rumanian film industry, Communist propaganda by means of films

 

36. Alexander Graur, director general of the Rumanian radio corporation, which stands completely and solely in the service of the Communist Party

 

37. Mihail Roller, President of the Rumanian academy, is a sinister professor


38. Professor Weigel, one of the tyrants of the university of Bucharest, who directs the constant "purging actions" among Rumanian students, who are hostile to the Jewish-Communist regime

 

39. Professor Lewin Bercovich, another tyrant of the Bucharest university, who with his spies controls the activity of Rumanian professors and their social connections

 

40. Silviu Josifescu, the official "literary critic", who censures the poems of the best poets like Eminescu Alecsandri, Vlahutza, Carlova, etc., who all died centuries ago or more than half a century ago, and alters form and content, because these poems are "not in harmony" with the Communist-Marxist ideas

 

41. Ioan Vinter, the second Marxist "literary critic" of the regime and author of a book with the title "The problem of literary legacy"

 

The three former secretaries of the General Labour League up to 1950, Alexander Sencovich, Mischa Levin and Sam Asriel (Serban), were all Jews.

 

YUGOSLAVIA

 

1. Moses Pijad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and in reality the "grey eminence" of the Tito regime

 

2. Kardelj,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Yugoslav Communist Party and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3. Rankovic,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Yugoslav Communist Party and Minister for Internal Affairs

 

4. Alexander Bebler,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and permanent representative of Yugoslavia in the UNO

 

5. Ioza Vilfan (Joseph Wilfan), economic advisor of Tito, in reality the economic dictator of Yugoslavia

 

출처 : Business Technology Master
글쓴이 : 白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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