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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에서 오늘을 본다

칠봉인 2016. 1. 19. 23:18

壬辰倭亂에서 오늘을 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서는 일본의 위협에 대한 확인차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정사에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로 구성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선조 23년 4월 29일 다대포를 출발하여


대마도에 도착한 것은 5월 4일이었다. 

당시 통신사 관련 기록들을 보면 황윤길과 김성일은 매사에 충돌이 잦았다고 나온다.
김성일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써의 당당함을 유지하려 한 반면


황윤길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부분에서 둘은 의견이 나뉘었다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에도 두사람은 달랐다


황윤길은 일본이 곧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 했고,


전쟁을 대비하여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하게 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하였다
선조께서,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물었다
황윤길이 아뢰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곧바로 김성일이 아뢰길
"그의 생김새는 눈은 쥐와 같고 사람 됨됨이는 보잘것이 없었으며


전혀 새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아뢰었다
이는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다.(국조보감 선조 24년)라고 전한다

즉, 황윤길은 곧 조선에 '병란이 있을 것이다' 라고 했고, 김


성일은 '병란은 일어나지 않을것이다'라고 했다
똑같이 일본을 다녀왔고 똑같이 일본의 정황을 정찰하고 왔는데


전혀 다른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만약에 부사김성일이 국가 중대사에 개인적 감정을 앞세웠다면


그는 만고의 역적이며 졸장부 였다고 할수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황윤길은 선조임금에게


벼슬을 받지 못한반면 김성일은 경상도초유사로 임명받아


왜군에게 점령당한 경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했으며 군량미와 무기를 확충했습니다.

김성일이 침략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쟁 소식으로 인한 내부의 혼란을


방지하고자 그런 보고를 했으며 유성룡에게 왜군의 상황을 보고하여 유성룡이


이순신, 권율등을 통해 대비토록 했고, 김성일은 국난극복에 앞장 섰으며


제2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했다


                [유성룡의 징비록]

왜군이 쳐들어 온다고 올바른 보고를 하였던 황윤길은 국난의 위기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당파의 이익을 위해 허위보고 했다'고 알려져 두고 두고


욕을 먹는 김성일은 실제로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성일은 왜 다르게 보고했던 것일까?
오늘날에도 병역기피는 정치인들에 대한 일그러진 한국 사회 지배계층의 단면을


설명해 주지만 당시 조선의 왕조를 떠났던 민심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그 시기에 군적수포제와 공납제라는 악법이 있었는데 이 제도를 살펴보면


전쟁을 치룰수있는 국가인지 아닌지를 조금은 이해를 할수있을 것이다
1541년에 15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 장정들에게 군역의 의무대신


1년에 2필의 군포를 내는 군적수포제가 시행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양반은 징수대상에서 면제'되고 '양민들만 병역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폐단이 생기게 되었고, 극도의 불만으로 민심은 이반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군역을 못 견뎌 도망가면 그 군역은 구족에게 미치고
구족도 군역을 내지 못하면 이웃에게 미치고
이웃들도 군역을 내지 못하면 마침내 일족은 다 죽고
마을은 빈 터가 될 뿐이다'

즉, 한 백성이 군역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면 온 마을이 텅 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성일은 1541년 황해도 어사로 부임할때 징수의 폐단에 대해 상소하고


민생대책 수립을 요구했다
또한 이같은 적폐를 해결하고자 대공수미법, 작미법, 대동법과 같은 세법계정을


조광조등 율곡 이이 같은 개혁정치가들이 주장했으나 조정에는 양반 지주들을


옹호하는 벼슬아치들만 가득 차 있어서 이 법이 안건으로 올라오면 일제히 입을


맞춰 반대하여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것은 2014년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입안 내용이나


국회에서도 별반 다를게 없는 일들이 때론 일어난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도 또 김성일은 대동법 실시를 주장한다.
김성일은 이처럼 군역과 공납의 폐단을 개선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끝없이


제시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좌천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1592년 결국 병란은 일어났고 선조는 두려워 도성을 버리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도망을 가던 도중 개성에서 윤두수에게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 물었다
  (선조실록 25년 5월 4일)
그것은 사실이 그러했다. 그중에는 길을 안내하는 조선 사람도 있었다
이런 민심이반은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서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하고 작미법을 실시하는 것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이로써 의병이 일어나는 시초가 마련된것이다

이러한 김성일도 제2진주성전투에서 병사하기에 이른다
그는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운명과 붕당의 폐단을 걱정하면서


촉석루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시한수를 남겼다

'촉석루위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 가리키네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않고 흘러가니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학봉김성일]

여기 까지가 김성익는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김성일은 어떠했을까가 궁금하다.
그곳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지조를 지켰을까?

왕명을 받든 신하가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왕명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시집가지 않은 처녀와 마찬가지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기생처럼 노래를 팔아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어찌 나라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왕명을 풀밭에 팽개치게 되었는데도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음악을


도중에서 연주하여 왜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처녀가 기생처럼 노래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김성일은 부관이 우리에게 음악을 청한데서 거부하면서 이처럼 꾸짖었다)

통신사는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무언가 섬뜩한 분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다
훗날 정량 박성이 부사김성일에게 마음이 흔들린 순간을 묻자 김성일은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라고 말한것을 보면, 김성일도 히데요시를 만날때는


긴장을 하며 만났던 것이다

통신사는 선조의 국서를 히데요시에게 바쳤지만 히데요시는 바로 답서를 써주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답서를 써주지 않자 김성일은 답서를 '받기 전에는 교토를 떠나지 않겠다'고


주장한 반면 황윤길은 황급히 떠났버렸다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통신사 일행을 억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사김성일은 이날의 사건을 두고
"호랑이 입에서 몸이 빠져 나오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서, 


동지에 대한 의리와 국가에 대한 사명은 돌아보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 나왔으니 사신의 체모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김성일도 율곡 이이와의 대화에서는 역시 전쟁의 가능성은 인정했다.
문제는 그동안 민심을 돌려세워 놓지못하면 엄청난 병화가 닥칠것이 뻔하고


조선의 국운을 걱정하고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의 책임은 전쟁의 위기를 알면서도 방어를 소홀히 했던 선조를 비롯한


당시 조선의 집권세력에 있다
그결과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참담한 전쟁을 경험한다


 


오늘의 우리 국해는 어떤가?


그때의 조정과 뭐 다른게 있을까요?


 


율곡 李 珥(이이) (1536-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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