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선 63년 2월 1차 103명을 필두로 65년 5차까지 1,896명이 브라질로
농업이민을 갔습니다. 이들도 상당수가 대졸자였으나 현지 땅은 지권(地權) 분할도
안 된 불모지였고 임시 합숙시설조차 마련되지 않은데다 현지인들의 눈길마저
싸늘했습니다. 농사지을 꿈이 깨진 이민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 등 도시로 흘러들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왜 조국을 떠나야
했을까요?
얼마 전 한 종편TV 프로그램 <차이나
도올>에서 김용옥 씨가 젊은 제자 패널들을
질타하는 장면이 이채로웠습니다. 그는 특유의 양철
두드리는 목소리로
“너희들은 조국을 ‘헬 조선’이라고 불평할 자격이 없어.
정치인들은 표가 많은
노인층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니, 청년들의 살 길은
청년들이 만들어야 해”라는 투였습니다.
그런데도 왜 청년들은 서울을 벗어나지 않으려
할까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열에 예닐곱은 취업을 못하고, 직장인 절반이 비정규직인데다,
40대 미혼자의 절반 이상이 캥거루족인 청년들. 국민은
뒷전인 채 서로 물고 뜯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 국회에 발목 잡혀 옴치고 뛰질
못하는 정부.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국이 청년들의 미래를 열어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일까요.
파독 광부·간호사나 브라질 농업이민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월남에서 피 흘리고,
중동에서 땀 흘린 은퇴 세대들은 젊은이들의 행태에 의혹을
품거나 불만을 터뜨리는
이가 많습니다. 왜 서울의 대기업만 쳐다보느냐,
왜 지방의 중소기업을 회피하느냐, 그러면서 왜 대학은
지방에서 다녔느냐,
외국인 근로자들이 하는 일을 왜 너희들은 외면만
하느냐고.
젊은이들은 항변합니다.
기본 스펙을 마련하기 위해선 서울의 일류 대학에 못
들어가면 차선책으로
지방대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대기업의 절반도 안 되는 지방 중소기업 임금으로는 생계도
빠듯한데
어떻게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집을 마련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외국인 근로자 50만 명이 하는 일을 왜 이 나라
청년들은 안하느냐는 질문엔
“그런 일을
어떻게…”입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신일본제철에서 스카웃 돼 포항제철을 건설한 고 김철우
박사는
“한국의 석사 출신 신입사원이 일본 학사 출신 수준인데도
입사하면
현장 근무를 꺼리고 사무실에서만 일하려 한다”며
“면접시험 때
‘서울 근무 시켜 주는 거죠’ 하고 먼저 물을 땐 어안이
벙벙했다”고 걱정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공기업이 그러니 다른 중소기업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를 탓할까요?
소통은 안하고 비생산적 국회만 탓하다 밥그릇마저 깨버린
대통령,
20대 국회 지역구 당선자 40%가 수사선상에 오른
정치판, 고용인에
사람대접은커녕 군림하는 재벌, 세습고용에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적자난 회사에 상여금을 요구하는 강성 노조. 그들을
비난하고
공박하면 젊은이들의 속이 편해지고 살 길이
트일까요.
그보다 더
암울한 미래가 인류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단순반복 작업을 로봇이 대신한 지는 오래고, 무인
전철이
고속으로 달리거나 드론이 택배를 하는 현실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현재 직업 중 없어질 직업이
수두룩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전망은 47%에 이를 것이라니 청년들이
선호하는 직업 중
10~20년 후에는 존재 자체가
불투명합니다.
대책은 없을까요?
그걸 알면 왜 백수이겠습니까. 기업은 사람 쓰기를
몸서리내고,
국회는 일자리 창출 법안을 수백 일, 수삼 년
깔아뭉개고,
정치꾼은 물고기 잡는 법 대신 물고기를 주겠다고
유혹하고,
여야는 서로 네 탓이라고 삿대질만 해대니….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고 한
괴테의 말이 해결책일까요. 세간에 떠도는 말들이 더 알아듣기 쉬운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