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閔妃)와 비선 실세 무녀(巫女)의 국정 농단(壟斷)
건국대 명예교수, 문학박사 조세용
작년 가을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된 이후 사람들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거나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매일 접하게 된 낱말 가운데 하나는 바로 ‘농단(壟斷)’이라는 한자어 낱말일 것이다. 이 낱말은 『孟子』공손추 하에 최초로 등장하는 낱말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략) 어느 날 천한 사람이 나타나서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높은 언덕에 올라가 좌우를 살피면서 시장의 이익을 그물로 훑듯 싹 거두어 갔기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천하게 여겼다(有賤丈夫焉 必求龍斷以登之 以左右望而罔市利 人皆以爲賤) (후략)’
여기에 출현하는 ‘龍’의 음훈은 ‘1) 용 룡, 임금 룡, 2) 언덕 롱, 3) 잿빛 방(망)’ 가운데 2)의 ‘壟(언덕 롱)’자와 같은 음훈으로 쓰였다. 또한 ‘농단(龍斷=壟斷)’의 원뜻은 ‘깎아지른 듯한 높은 언덕’의 뜻이었으나, 오늘날 이 낱말은 흔히 ‘이익이나 권력을 교묘한 수단으로 혼자서 독점함’의 뜻으로 쓰이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공익을 추구하는 공사(公事)를 사익을 위해 전횡을 일삼음’의 뜻으로 의미가 확대 변화되어 쓰이고 있다.
조선 말기-구한말 때 한학자인 황현(1855-1910)이 지은 구한말 야사집인『매천야록』, 1920년에 창간된 월간 종합잡지인 『개벽』 제79호(1948, 8. 1)에 수록되어 있는 <한말 정국의 이면 비사>, 이선근 저『대한국사, 한국출판공사, 1984)』 등을 참고로 하여 민비와 비선 실세 무녀 박창렬의 국정 농단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비(1851-1895)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자라다가 고종 3년(1866) 16세 때 흥성대원군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고종의 비가 되었다. 소녀 시절부터 『춘추』를 읽을 정도로 영민하였던 민비는 입궁한 지 얼마 안 되어 궁녀 이씨가 완화궁을 낳자 흥선대원군의 완화궁에 대한 노골적인 편애로 대원군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심한 정신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대원군의 척왜(斥倭) 정책이 원인이 되어 1870년대를 전후한 시기 일본 정계 일각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게 되고, 또한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민비는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하여 세를 불리는 한편, 최익현으로 하여금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하여 마침내 고종 10년(1873)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대원군을 실각시킨 민비는 민승호, 민규호 등의 척족(戚族)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하고 일본과 고종 13년(1876) 강화조약(江華條約=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이어 미국, 영국, 독일 등과도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본격적으로 개방 정책을 실행하였다.
1882년 민비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의 주동으로 발생한 임오군란은 민비에게 정신적인 큰 타격을 안긴 대사건이었다. 민비의 실정으로 내탕금(內帑金)이 바닥이 나서 신식 군대 별기군 양성으로 괄시받고 있었던 구식 군인들은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하다가 13개월 만에 한 달치 봉급분으로 나온 쌀이 반은 썩었고 반은 돌과 모래가 섞인 쌀이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인들은 이최응, 민겸호 등의 대신과 일본인 13명을 죽이고, 궁으로 들어가 민비를 시해하려 했다.
이때 민비는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궁녀복으로 변장하고 대궐을 겨우 빠져 나와 화개동에 있는 사어(司馭) 윤태준의 집에 숨어 있다가 다시 당시 충주목으로 있었던 민응식의 집이 있는 장호원으로 내려가 그의 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지는 연약한 존재가 아닌가 한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민비는 이때 민응식의 하녀 소개로 제천과 청풍 사이에 살고 있었던 농부의 딸 박창렬이라는 이름의 한 무녀를 만나게 된다. 무녀 박창렬은 얼굴이 미색인데다 여간한 달변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사람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신통력과 앞일을 예측하는 신험(神驗)이 있어 그를 따르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같은 사실을 민응식의 가종 신씨로부터 전해 들은 민비는 그녀를 불러 환궁(還宮)의 가능성과 환궁 시기에 대해 점을 치게 했다. 무녀 박씨는 수심에 잠겨 있는 민비에게 은밀히 말하길 “8월 보름께 한양으로 올라가 다시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민비는 이 같은 무녀의 말을 듣고 나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드디어 국내 정세가 무녀의 예언이 적중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1882년 7월 7일에는 민씨 일파의 요청으로 청나라의 오장경이 4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에 입성하였고, 7월 13일에는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 가는 신세가 되었으며, 7월 28일에는 민비가 최종 피난지 충주 노은면을 떠나 8월 1일 의기양양하게 무녀를 대동하고 환궁하게 되었다. 신통하게도 무녀의 예언이 비록 보름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어느 정도 적중한 셈이다.
이리하여 1882년 6월 10일 군란이 발발한 지 50일만에 민비는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하여 복권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비는 무녀 박씨를 절대 신임하게 되었으며, 그에게 종친 및 훈신에게만 줄 수 있는 군호(君號)의 작위를 주어 ‘진령군(眞靈君=신령군(神靈君)’으로 봉하였다. 군호의 작위를 받은 무녀 박씨는 대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때로는 민비의 정신적 고뇌를 풀어 주는 해결사로, 때로는 육체적 고통을 치유하는 의사의 역할을 하면서 민비와 자매처럼 생활했다.
이처럼 한동안 대궐에서 왕족처럼 생활하던 무녀 박씨는 어느 날 민비에게 자기는 관운장의 영(靈)을 받은 딸이니 묘(廟)를 지어 받들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민비는 고종과 상의하여 1882년 말에 동소문 안에 관우 사당을 짓게 하고 ‘북관왕묘(北關王廟)’, 또는 ‘북묘(北廟)’라 칭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사당에는 수령(守令=부윤, 목사, 군수, 현감, 현령의 총칭) 이나, 번곤(藩閫=감사, 수사, 병사의 총칭)이 되기 위해 금은보화를 싸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일부 고관들은 자매로 부르자느니, 의자(義子)를 맺자느니 하면서 아첨을 떨었다.
고종 21년(1884)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사대파인 민씨 일파를 축출하기 위해 일어났던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또다시 실권한 민비와 고종은 무녀 박씨의 말은 곧 관우 장군의 말로 맹신하였다. 명색은 고종이 국왕이요 민비는 왕후이었지만, 사실상 실세는 무녀 박씨였다. 당시 무녀 박씨가 밤에 궁궐에 들어가서 한 말이 그 다음 날 아침에 왕명으로 공포되었기에 항간에서는 그녀를 일명 ‘밤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가난하고 천한 무뢰배(無賴輩)로서 무과에 천거된 이유인이라는 자가 장안에 ‘이유인이라는 사람은 귀신을 부리기도 하고 호풍환우(呼風喚雨)하기도 한다.’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무녀 박씨를 현혹시켰다. 이유인의 사기성 ‘귀신 연극’에 넘어간 무녀 박씨는 그를 자기보다 월등한 신통력이 있는 무당이라 생각하고 그를 아들(내면적으론 내연남)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그를 민비에게 추천하여 1887년 10월 14일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 군수가 되었으며, 이후 양주목사,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법무대신 등을 두루 역임케 하였다.
이렇듯 민비와 고종은 무녀 박씨가 추천한 인물이면 무조건 관직에 오르게 하는 국정 농단의 방조자 역할을 하였으며, 이렇게 임명된 관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빈번하게 굿판을 벌이게 하는 일에 앞장서게 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유인이었다. 그는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 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고 민비를 미혹시켜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 쌀 1석, 돈 10냥을 바치는 굿판을 벌여 국고를 낭비케 하였다.
이상과 같은 요무(妖巫) 박창렬의 국정 농단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고종과 민비를 허수아비 정권의 상징적 인물로 전락케 하였고, 또한 민비로 하여금 1895년 4월 8일 일본 낭인들에게 치욕적인 죽임을 당하게 된 비운의 여인이 되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대한제국(大韓帝國=고종 34년(1897) 10월 12일부터 순종(純宗) 4년(1910) 8월 29일 한일합방 때까지의 우리나라 국호)’ 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 원인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말은 누가 했으며, 또한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말은 그 누가 한 말이던가? 요즈음 최순실 게이트 사태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착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참고 ; 1) 일부 사람들이 ‘민비(閔妃)’라는 호칭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폄훼(貶毁)하기 위한 비칭이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임. 왜냐 하면 ‘비(妃)’는 ‘왕비 비’자로 성과 합성시켜 아무[某] 성씨를 가지고 있는 ‘왕비(王妃=중전(中殿), 중궁전(中宮殿)’라는 보통존칭의 호칭으로 흔히 사용되어 왔으며,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고종 34년(광무 1년, 1897) 10월 12일 대외적으로 국격(國格)을 높이고 국위(國威)를 선양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칭, 선포한 후 고종 34년 1월에 정한 시호‘명성(明成)’에 황제(皇帝)의 정궁(正宮)의 뜻인 ‘황후(皇后)’를 합성시켜 추책(追冊)한 과대 포장된 극존칭의 호칭임. 2) ‘장호원’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음죽현(陰竹縣)’에 속했던 읍이었다가 1996년 3월 1일자로 이천시 장호원읍이 되었으며, 충주목 민응식의 99간짜리 집이 있었던 곳은 청미천 동남 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는 행정 구역상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산 29번지로 지금은 매괴여자중고등학교와 매괴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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