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숨은 영웅>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도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2조 원이 넘는 재산을 기꺼이 조국에 받첬던 '영웅'
풍족한 삶 버리고 조국을 택했다, 이회영(李會榮)
이회영은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여섯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밀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당 이회영,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쓸 명동 일대의 토지, 현재 시가 600억 원
이회영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
대에 걸쳐 판서(조선시대 6조의 으뜸 벼슬)를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였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월남 이상재]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다.
그러나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그들의 재산을 몽땅 내놓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망명의 삶을 택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였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흔히 사회적 지위에 맞게 솔섬수범하는 자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는데,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일생동안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전 재산을 바친 그의 삶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가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김규식, 신채호,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가져간 자금이 바닥나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해야 했다.
훗날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일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개인의 안위를 접은 희생적 삶이었다.
여섯 형제, 재산과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아
이회영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일제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 통탄했다.
이들은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다.
우당이회영기념관 |
이 중 둘째 이석영은 양부인 한양 최대 갑부 이유원(고종 때 영의정)으로부터
전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한양 성으로 들어올 때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대토지를 소유했다.
그 많은 전 재산을 조국에 다 바친 그는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이회영 형제들은 대토지를 빨리 헐값에 모두 매각하여 현금으로 만들었다.
전 가족 40여 명과 기타 일꾼 등 총 60여 명이 1910년도 12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정든 고향 서울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들은 1911년 1월 영하 30-40 도의 극심한 추위에
마차 10대에 나눠타고 압록강을 건너 사방이 꽁꽁 얼어붙은 만주로 향했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의 형제와 가족들은
굶어 죽거나 병사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다섯째 이시영이었다.
그는 해방 후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 [만물상] 이회영·시영 형제
독립투쟁의 심장, 김좌진·홍범도 장군을 길러낸 곳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2년 뒤에는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회영은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마흔이 되던 해, 가족들과 만주로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만주에 도착한 그는 함께 온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오늘부터 당신들은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라며
그들을 독립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망명지에서 이회영은 이동녕, 이상룡 등과 함께 이주동포들의
정착과 농업 지도를 돕기 위해 '경학사'라는 자치기구를 만들었다.
부설기관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도 설립했다.
'신흥'이란 신민회의 '신(新)'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興)'자에서 따온 말이었다.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강습소라 불렀으나 실제로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곳이었고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됐다. 신흥무관학교는 청년들에게
군대 전술과 총기 사용,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켰다.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간 약 3,000여 명의 항일 전사를 길러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과 이청천, 이범석 장군도
생도 혹은 교관으로 이곳을 거쳐갔다.
이들은 1920년 일어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항일투쟁, 1940년 중경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활동 등 맹활약을 펼쳤다.
백방으로 뛰며, 황제의 해외망명을 계획했지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회영은 고종에게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특사로 추천했고
'헤이그 특사 3인'(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이 구성됐다.
그들은 가까스로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일제의 방해와
각국의 외면으로 회의 참석은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1918년, 이회영은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은밀히 고종의 해외망명을 계획했다.
고종을 중국으로 탈출시켜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하자는 구상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망명 직전 고종이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장례일인 1919년 3월 3일
이틀 전인 3월 1일 정오에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의 물결은 전국 곳곳으로 퍼졌고 해외로도 이어졌다.
3·1 운동이 일어난 다음 달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설립됐다.
권력보다 조국의 독립이 절실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이회영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아나키즘(Anarchism)을 채택한다. 임시정부라는 형태에 회의적이었던
그는 임시정부보다 '자유연합적 독립운동본부'를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정부 자체가 특정세력을 중심으로 한 권력이기 십상이니 이러한
형식을 탈피해야만 다양한 정파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과 달리 임시정부는 수립되었고,
그때부터 이회영은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의 권력 암투에 실망을 느낀 그는
아나키스트(Anarchist, 무정부주의자) 위주의 독립운동 조직을
한·중·일 항일 공동전선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1924년에 의열단을 후원해 조선총독부와 일제 요인들의 처단을 시도했고,
1929년에는 김좌진 등과 손잡고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전선을 넓혀가는 데 애썼다.
비밀결사조직인 '다물단'을 조직해 일본 밀정을 숙청했고,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억압하지 않고, 억압당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다
이회영은 일제 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 억압적인 권력 앞에 단호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권력 다툼을 하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혁명작가 루쉰과 러시아의 맹인 무정부주의자 예로센코, 신채호 등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해 활약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대안으로 아나키즘에 주목했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어 혼란 상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강제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협동과 이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활동을 중심으로 삼는다.
이회영와 교우했던 독립운동가들 상당수가 아나키스트였지만,
그 시절 좌도 우도 아닌 그들은 자유주의 체제와 전체주의 체제
양편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우당 이회영, 더 몰랐던 이야기
이회영 부인 이은숙, 공장생활과 옷 수선으로 독립운동 자금 마련
1925년 경 중국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이 나고,
모을 방법이 없어지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국내로 잠입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어렵게 마련해야 했다.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다 발각되면 일본 경찰에 의해
목숨이 달아날 정도로 고문을 받아야했으므로 자금 모금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은숙은 공장에서 일하고, 때로는 유곽 기생들의
옷을 수선해주며 돈을 벌어 중국으로 자금을 보냈다.
자신은 한산 이씨 양반 사대부의 딸로 태어났고
남편은 조선 최고 귀족이며 갑부였지만, 남편이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전 재산과 모든 것을 바쳤고 부인은 온갖 고생을 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독립운동 생활을 <서간도 시종기>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일본 정부, 이회영 두려워 재판하지 않고 고문으로 죽이라고 명령
1932년 11월, 66세의 이회영은 만주군벌 장학량과 연대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선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려고 대련항을 거쳐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대련을 가는 여객선 안에서 체포되었는데
당시 그는 값싼 4등 선실에서 수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섞여 있었다.
일본 경찰은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이회영을 지목하고
체포했는데 이는 누군가의 밀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회영의 단원들은 밀고한 이규서와 연충렬을 찾아내었고 백정기가 처단하였다.
이규서는 이회영의 조카였고 연충렬은 임시정부 요인 연병호의 둘째 이들이며,
또 다른 임시정부 요인인 엄항섭의 처남이었다.
(단, 이규서와 연충렬은 이회영을 신고한 이외에 일제에 협력한 다른 증거는 없었다.)
,br> 뤼순(旅順) 형무소 전경. 사진 아래엔 당시 일본군이 이 감옥을 부르던 명칭인 '관동도독부감옥서(關東都督府監獄署)'가 적혀 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
체포된 이회영은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노인의 몸으로 고문을 받던 중
뤼순(旅順) 형무소로 옮겨져 그 곳에서 더 모질고 혹독한 고문으로 운명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 중에도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않고 모든 것은 재판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서방기자들이 참석한 이회영의 재판정에서 일본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박을 받을 것을 염려해, 강제 불법으로 자행한 한일합병조약 체결과
발표과정이 상세히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안중근 의사도 재판과정을 거쳤으나 일본 정부는 한일합병의 전 과정을
잘 아는 이회영은 재판에 회부하지 말고 죽이라는 비밀 특명을 내렸고,
일본경찰은 그 명령을 수행했다. 그
리고 "여객선에서 체포되어 취조 중 유치장 창살에 목을 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라고 거짓 보도를 하였다.
(참고=프리미엄조선 '장대성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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