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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장자의 사이에서..

칠봉인 2017. 10. 30. 16:08
공자와 장자의 사이에서..

 

 

비록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기는 하지만, 공자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였다.

"여자와 소인은 어쩔수 없다"고 한 발언은 그의 성차별 의식을 드러내고,
자신과 반대대는 주장을 한 제자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뒷담화 했으며,
은근히 자기자랑을 많이 했다.


그가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그의 가르침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였다.

춘추시대라는 어지러운 세상에서,어떻게해야 사람들을 구하고,

망가진 공동체를 복원 할 수 있는지,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 고민과 노력,,, 그것이야말로 공자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한다.


공자는 '공동체' 중심으로 한 관점을 가졌었다.


"'공동체'를 어떻게 안정화 시킬 것인가?" 에 대한 문제...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내면적으로는 '인(仁)'을, 형식적으로는 '예(禮)'를 제시했다.

인(仁)'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仁)' 은 상호 존중과 상호 신뢰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덕을 베풀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를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덕을 베풀고, 공경할 때 '예(禮)' 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 공자는 '예(禮)'보다 '인(仁)'을 더 강조했는데,

후대의 독재자들은 '인(仁)'을 빼고 '예(禮)'만을 강조했다.
%% '인(仁)'이 없는 '예(禮)'는 세뇌 교육이며, 공자에 대한 모독이다.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손에 넣었을 때,

내부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다.


장수들끼리 술먹고 싸우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고,
황제의 명령이 동네 형의 지시 정도로 여겨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였다.

이에 유방은 유학자들을 부른다.
유학자들은 궁중예법을 만들고, 신하들을 직급별로 나누었으며,

직급별 갖추어야 할 예(禮)를 보급했다.
그리고 예(禮)를 지키지 않는 신하에 대한 처벌도 진행했다.


유방은 개인적으로 '유학'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을 즐겼던 그에게 '유학'은 너무 구속적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 파악이 빨랐던 그는
'유학'이 거대한 공동체를 안정화 시키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간파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장자는 전국시대 사람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가 그나마 최소한의 사회기능은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였다.

절망만이 가득했던 시대,,,
장자는 그 속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공자가 '공동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장자는 '개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다.


공자는 최소한의 '공동체 기능' 은 유지되는 시대에 살았기에,

약해진 '공동체'를 다시 되살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 비해 장자는 '공동체'가 완전히 부서진 시대에 살았다.
장자에게 '공동체'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너무나 먼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가 아닌,,,'개인'이 난세에 사는 법을 고민했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그들의 삶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었다.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다닌 반면,
장자는 재상 자리를 제안 받았음에도 가차없이 거절했다.


장자는 재상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제사 때 바쳐지는 재물에 비유했다.
제사 전날까지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겠지만 제사 당일에 죽임을 당한다.
그는 '개똥밭에 굴려도 이승이 낫다'는 논리로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



공자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이상이 받아들려지지 않는 세상과 아끼던 제자들의

잇따른 죽음으로,깊은 절망에 빠졌었다.

그에 비해 장자는 죽는 순간까지 평상시와 같은 평온을 유지했다.
아무것도 집착한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었다.

공자가 기대 수익율을 보며 뛰는 투자자였다면,
장자는 숨겨진 리스크까지 생각하는 투자자였다.


%% 성공 가능성이 없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 %%

   어느 나라 재상이 장자를 찾아와 고민을 토로했다.


자기 나라 왕이 재상에게 이웃나라와 화친을 맺으라고 지시했는데

이웃나라 왕은 화친을 맺을 생각이 없다.
화친을 맺지 못하면 자기 나라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고,
화친을 맺기 위해 이웃나라 왕을 강하게 설득하면,

이웃나라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장자에게 물었다.

장자는 말하길,
당신 나라 왕이 한 말을 그대로 이웃나라 왕에게 전하세요.
그리고 이웃나라 왕이 한 말을 그대로 당신 나라 왕에게 전하세요.
중요한 것은, 말을 전할 때 절때 말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말을 더하거나 빼게 되면,화친이 성공하면,

그것은 오로지 왕이 잘해서 그런 것이 되고,
화친이 실패하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됩니다.


현대의 처세술 책에 나오는 '미친 상사'를 만났을 때의 대처법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가 보다.


 

조선시대 유학자 중에 '조광조' 라는 사람이 있었다.


연산군이 반정으로 쫒겨나고 중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중종은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람이 아니였다.
말 그대로 어쩌다보니 왕이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즉위 초기에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신하들의 권력을 견제할 방법을 찾던 그는, '조광조' 라는 원칙주의 유학자를 등용하게 된다.

'조광조' 는 초시에 장원급제, 알성시에 2등 급제한 수제였다.

중종이 '조광조' 에게 힘을 실어주자,
'조광조'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여러 개혁 정책들을 밀어붙인다.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중종의 이해 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불행의 씨앗은 '조광조'는 유학의 이념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그는 당연히 옳은 주장을 했고, 당연히 실천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의 상사인 중종의 눈치는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종이 즉위한지 십수년이 흘러 왕권이 안정되었다.
중종은 더 이상 그가 꼭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광조'는 변함없이 중종에게 성리학적 성군의 자세를 요구했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서를 제출하며 중종을 압박했다.

물론 '조광조'의 개혁조치가 중종에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중종에게 지금 당장의 '조광조'는 귀찮은 잔소리꾼에 불과하다.


이정도에서 '조광조'가 멈추었다면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중종의 아킬레스근인 '위훈삭제'까지 건들고 만다.

물론 '조광조'의 주장은 옳았다.
그리고 그의 주장대로 한다면 조선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상사인 중종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였다.

결국 '조광조'는 기존 기득권(훈구파)과 다시 손잡은 중종에 의해 사약을 마시게 된다.

만약 '조광조'가 '장자' 쪽으로 한 걸음만 가까웠더라면 어땠을까??

.조광조' 의 죽음은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였다.

개혁을 위해 그가 조정에 불러들인 많은 인재들의 죽음이였고,

그가 시도했던 개혁의 죽음이였다.


'공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장자'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그 둘은 대립적이지만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다.

모든 인재가 '장자'처럼 리스크 회피 전략만을 구사하다면,
'공동체'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자'처럼 리스크 회피 없이 목표만을 향해 달린다면,
이 또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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