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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과 민비

칠봉인 2020. 3. 27. 18:05

우리 역사의 인물들 - 대원군과 민비

 

조선 24대 헌종(憲宗) 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철종이 즉위하였다 .

철종은 그당시 파벌싸움에 목숨이 두려워 강화도로

피신을 가 있던 나무꾼 총각인 철종(哲宗)인 것이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철종이어서 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가 예상치도 않게 왕 자리에 앉게 되니 꿈만 같았습니다.

철종이 집권한지 얼마 후 영흥부원군(당시)으로 있던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들였는데

이 왕후인 안동김씨는 왕의 무식함을 악용하여

모든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었습니다.

 

모든 권세는 친정아버지인 김문근이 잡고

조카인 병학(炳學)이 대제학을 차지했으며

병국(炳國)은 훈련대장을 또 병기(炳冀)

좌찬성을 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나라 법은 문란해질 대로 되어 벼슬을

사고파는 일들까지 벌어졌고 활도 쥐어보지 못한 것들이 병권에 들어앉았습니다.

이리하여 나라형편은 날을 따라 험악해지기만 했습니다.

 

철종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특히 왕족인

젊은 남자일수록 꽁무니를 사려야만 하는 판이었습니다.

좀 똑똑해 보이는 자이면 안동김씨의 그 세도에 견디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흥선군 이하응(興宣君 李昰應)은 원래 이조 16대왕

인조의 6대손인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김씨 일파의 멸시와 학대, 수모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들을 여윈 그는 나이 22살이 넘도록

이렇다 할 벼슬도 하지 못하고 겨우 현록대부(顯錄大夫)로서

흥선정(興宣正)이라는 직위를 받았습니다.

걸핏하면 목숨이 날아나는 판이라 이하응은 서울 장안의

불량배들과 술이나 마시고 놀음이나 했습니다.

그는 이 어지러운 판에서 자신을 주색에 빠진 주정꾼으로

가리면서 속으로는 조대비와 내통하여 김씨 세도파들을

쓸어낼 발판을 꾸준히 닦아 나갔습니다.

해는 바뀌어 철종14년 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급기야 병이 더해진 철종 왕은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제 왕위를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섰습니다.

벌써 수년간 조대비와 내통이 되어있었으므로 안동김씨 일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이 왕으로 정해졌습니다.

흥선군의 아들이 왕이 되면 그가 권력을 쥐게 되므로

김씨 일파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반대했지만 이미 왕은 정해진 뒤였습니다.

야 잘 난다. 저것 봐, 내 것이 더 높이 떠올랐구나.”

11살의 고종은 연 띄우기에 여념이 없어 열심히 연줄을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벽제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가마가 자기를 모시러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철부지 고종은 자못 놀랐습니다.

, 내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왕이란 말인가?”

고종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이리하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하늘높이 연을 날리며

손바닥을 치던 소년이 일약 국왕이 되고 장안의 술주정뱅이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그 흥선군이 대원군의 지위에

올라 모든 권력을 쥐게 되는 대사변이 급기야 터졌습니다.

 

대원군은 아들 고종 왕의 정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10여 년간 나라의 모든 실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대원군이란 죽은 왕의 뒤를 이을 자손이 없을 경우

왕족들 가운데서 다른 집 아들이나 손자가 왕 자리에 올라앉을 때

새 임금의 친아버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농민들의 반봉건적 진출로

봉건제도가 무너져가고 또 다른 편으로는 자본주의열강들의

침략이 강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때문에 대원군은 폐정쇄신(弊政刷新=낡은 정치를 반대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시한다는 뜻)의 구호를 들고 봉건적 개혁들을 실시했습니다.

 

그는 왕실의 강력한 지배권을 구축하기 위해

우선 60여 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청산에 달라붙었습니다.

, 언제까지 세도를 부릴 줄 알았지. 안될걸.”

그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18644

영의정으로 있던 김좌근부터 멀리 밀어냈으며

그 일파들을 차례로 정계에서 내몰면서 오랫동안

눌려 살던 왕족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파쟁의 희생물이 되어 갇혀 있거나 유배지에서

헤매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또한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전주이씨의 족보였던

대동보도 발간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왕권의 권위를 올리기 위하여 32개월이란

긴 기간과 780만량의 막대한 돈을 들여 경복궁을 중수했습니다.

 

대원군은 봉건왕실의 기본수탈체계로 되어있는

군포제도를 호포제도로 바꾸고 환자제도 역시 사환제도로 고쳐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상 내용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소지주들의 발판이며 소굴인 서원을

철폐할 데 대한 영을 전국에 내리고 600여개이상의

서원을 없애버렸습니다.

이 모든 조치들은 인민들의 마음을 눅잦히고

저들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1868년에는

군대의 최고기관인 「3관부를 내오고

군대수를 늘이는 한편 해안방어에 힘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해 나갔습니다.

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조치로서

침략의 길잡이로 되는 가톨릭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톨릭교는 정조 왕 때에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은 우리 사람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과정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프랑스와 여러 나라 선교사들이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는 바람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고종 3년에는 원산항에 들어온 러시아군함에도

가톨릭 교인들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대원군은 사람들을 파하여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많은 가톨릭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교인이 발견되기만 하면 사지를 묶어놓고

얼굴에 백지장을 덮고 냉수를 뿜어서 숨이 막혀 죽게 하고는

그 시체를 던져버렸습니다.

대원군은 자본주의나라들의 밀수입상품들을 몰수하고

불문곡절 불을 달았으며 침략자들과 그 주구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면서 극심한 쇄국정책을 실시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나라의 선진과학기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길을 무자비하게 차단하여

나라 안에 발전된 과학기술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들었고

경제와 문화가 제자리에서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했습니다.

 

대원군의 이런 정책들은 멸망에 직면한 봉건왕조를 구원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던지 유지해보려는

강경한 보수적인 것이었으며 반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고종의 왕비를 들이는 데서도 안동김씨의

세도를 보았던지라 친정아버지도, 오라비도 없는

민치록(閔致錄)의 딸을 골라 맞아들였습니다.

그가 바로 민비였습니다.

 

민비의 친정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된지가 오래고

그의 양자인 민승호(閔升鎬)는 한쪽으로

대원군의 친속이 되므로 안심하고 그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는 고종보다 한 살 더 먹어서 16살이었습니다.

처음 궁중에 들어왔을 때 민비는 조대비와

궁중의 어른들에 대하여 공손하고 잘 받들며

궁녀들도 잘 통솔하는 것으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 민비가 바로 왕을 조종하여 마침내

시아버지를 내몰고 자기의 친정 육촌, 팔촌 심지어

민씨라면 덮어놓고 벼슬에 올려 앉혀

또다시 외척시대를 낳게 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큰 키에 얼굴이 좀 검은 편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으므로

고종 왕은 처음 그를 시답지 않게 여겼고 궁녀 이씨를 더 좋아했습니다.

하건만 민비는 대궐책방에서 글만 읽었습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수완이 지나치게 비상한 인간이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대원군은 활달한 민비의 성품을 고려하면서

경계를 두어 고종과 멀리 있게 했습니다.

그 기간에 민비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고종은 궁녀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민비와의 관계에서도 아들을 보았으나

사흘 만에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시기가 난 민비는 드디어 대원군을 몰아낼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민비는 이제 고종의 나이 22살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실권을 접수해야 한다는 것과 대원군의 정치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열거했습니다.

여기에 또한 대원군의 독재에 인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영락해졌고 내외의 민심도 소란해졌습니다.

그리고 고종 왕 자신도 아버지의 지나친 독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제는 자기도 정치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고종은 민비의 말에 넘어가 대원군의 정권을 강제로 접수하기로 했으며

그를 궁궐에 들여놓지 조차 못하게 했습니다.

대원군이 궁궐로 들어서려 하자 군졸이 앞을 막아 나섰습니다.

어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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