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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직전 庚寅通信使行과 歸國報告 再照明 (下)

칠봉인 2012. 9. 14. 21:15

임란직전 庚寅通信使行과 歸國報告 再照明 (下)

                      (2012. 9. 7. 14:00~17:30)

 

    2부사회: 이 훈 (동북아역사재단)

학술 발표량은 많고 주어진 시간은 짧습니다.

간단히 간추려서 발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2주제: 민덕기 (청주대 사학과)

 

[경인통신사의 활동과 일본의 대응]

 

1 머리말

2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정세

3 100년만의 모범통신사 되려한 경인통신사

(1) (宣慰使件)

(2) 대마도주 버릇고치기 件

(3) ‘來朝’ 문제 제기와 히데요시 답서 수정 노력

(4) 대마도의 쇼니씨와 오우치씨의 멸망 은익

(5) 대마도의 무역관계 회복 획책

(6) 모범 통신사 의식

 

4 楹外拜와 庭下拜 논쟁

a 천황과 관백과의 관계

b 宣祖의 국서 형식

c 事目과 儀註

d 대등 의례 교환

5 경인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대응과 침략 준비

6 맺음말로 조목조목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경인통신사 김성일이

  과연 예상할 수 있었나 알아 본다. 학봉은 교도에 온지 5개월이 지났는데도 王命을 전하지

  못한다. 히데요시가 東征(호죠씨 정벌)을 나가  진압하고 교도에 돌아와 궁실을 짓는다고

  황윤길은 말하고 있다. 이처럼 동북지방의 반대세력을 진압하고 궁실을 지어 권위를

 가지려하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감행할 것이라는 것을 김성일이 생각 했을까?

 

경인통신사는 1591년 1월 28일 귀국한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귀국 관련 기사는 있지만 復命 기사는 없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히데요시의 기사는 임진왜란이 일어 난 후

5월 3일자 [선조실록]에 가서야 회상의 형태로 실리고 있다.

 

이는 통신사의 주된 파견 목적이 일본정탐이 아니었으며,

그러므로 그 상반된 복명은 왜란 대비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 않았음이 아닐까?

김성일의 경우, 100년만의 통신사이므로 모범을 보여 이 후의 典例로 삼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事目에도 前例도없었던 宣慰使의

마중을 일본측에 기대했고, 조선의 臣下格이라는 측면에서 대마도주의 無禮에 대해

재삼재사 문제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백이 천황의 신하인 이상 그에게는 庭下拜는 행할 수 없다는

김성일에게는 쇼군은 일본국왕이니 그에게 정하배를 행하여 일본에 ‘君臣上下之義’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는 이른바 성종대의 정하배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華夷論을

강조하는 김성일의 對日 멸시론이 돋보일 따름이다.

 

김성일은 히데요시가 조선을 흠모하여 ‘借重’(남의 권위를 빌려와 위세를 떤다)하려

한 것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1588년 1월과 1589년 8월 일본이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고 서두르자 선조가 이를 묻자 변협이 “借重하여 인심을

진정시키려는 것인지?..” 답하고있는데서도 보인다.

선조의 이야기로 보아 통신사의 사명이 일본 정세의 정탐이나 히데요시의 침략 여하

탐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征明假道’를 조선에 요청했을 때

조선점령은 쉽게 생각했고, 일본 전국 평정을호죠씨 정복으로 1590년 중반에

이루고, 조선 침략의 기지로 나고야 성곽 축조는 1591년 8월에 시작해서

1592년 초에 완성되고 그리고 임진왜란이다. 이런 전개를 보면 임진왜란은

일본 전국 평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나고야 성곽이 완성된 시기에도

과연 임진왜란이 시작될 것인가? 으아해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김성일에게 을미왜변으로 축소된 무역관계의 회복을 요청한

시점까지는 조선 침략이 상상되지 않았던 것이 틀림 없어 보인다.

 

 

          제3주제: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김성일의 일본인식과 귀국보고]

하교수의 맺음말에 1591년 3월 일본사행을 마치고

“그들이 침략하려는 정황은 보지 못했다”고 했고

그 후 “민심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한 김성일의 변명은 냉정히 보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김성일 입장에서 일본이 침략해 온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대규모로 가까운 시일내 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지식인들의 세계인식도 직방세계로 축소되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사림파 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국내외 문제에서 그는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 세계에 그대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일은 豊臣秀吉의 태도에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김성일은 경도에 4개월간 체제하는 동안 “왕명을 전하기 전에 사신이 도리상 출입하기 어렵다”는

명분에 大德寺 밖으로 일체 나가지 않았던 점을 미루어 정탐에는 부적합한 인물인 셈이다.

당시 조정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1583년 尼湯介의 난 이후 일본보다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었다.

 

1591년 2월 사신들이 돌아와서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선조실록]에는 전혀 그런 기사가 없었다.

이는 김성일의 귀국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조정 전체의 책임인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희생양이 필요했으며

선조와 모든 조정대신들의 책임 면제를 위한 희생양으로 김성일이 선택된 셈이다.

 

또 김성일의 보고도 “그들이 반드시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보지 못했다(臣則不見其必來)”라는 것으로

침략가능성에 대한 ‘전면부정’이 아니다. ‘조건부 부정’이나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에서는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면부정‘으로 왜곡되었다.

 

뒤에 [선조수정실록]에 반영되면서 ‘공식성’을 얻게 되었고

그 후 식민 사학자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과장되었다.

하우봉 교수는 마지막으로 사료의 성격과 신빙성에 관하여

[선조실록]에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귀국 보고와 복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소략하다.

이에 비해 [선조수정실록]에는 상당히 소상하게 기술되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은 1657년에 완성된 것으로 일차적이 자료가 아니라,

후대에 문집, 야사류 등 각종 자료를 보고 수집해 편찬한 것이다.

또 그기에는 후세인의 해석과 판단이 들어가 있다.

 

이에 비해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항복의 [당후일기]는

각각 죄의정과 도승지로서 복명 당시 현장에 있었고,

김성일과 직접 대화한 내용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1차 사료로서의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귀국보고와 복명시의 대화 내용에 관해서는 [선조수정실록]보다는

[징비록]과 [당후일기]가 일차사료로서 사료적 신빙성이 가장 높다고 할 것이다.

류성룡은 김성일과 동인으로 동문수학한 사이이므로 사실에 대한 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항복은 서인이므로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롭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시 조선인들이 생각하는 세계지도(1402년)를 보면 중국 다음으로

조선을 대국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과 기타 국가는 소국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1530년대에는 이론은 점으로 표시하는 소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1402년의 세계지도(대국 중국(中華)과 小中華(조선)에

유럽과 일본이 자그마하게 표현되었으며,

1530년대의 지도에는 우리나라와 중국만이 中華의

나라로 표시되고 있는 재미난 지도.

 

           제4주제: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사림계의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

  김학수 연구원은

 

1 머리말과

2 김성일의 인간상: ‘직도(直道}’와 ‘충의(忠義)’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고

3 학자관료적 자취와 그 평가는

   1) 학자적 삶: 계문적전론(溪門嫡傳論)을 중심으로

   2) 관료적 삶: 동서분당론(東西分黨論)을 중심으로

4 통신사 복명과 임란 당시 활동상에 대한 정파별 인식의 차이는

   1) 통신사행보고 개관

   2) 서인계의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 김박사가 임의로 붙인 명칭

   3) 남인계의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으로 나누어 강론을 폈으며

 

의병 조율·지원 활동을 살펴보면

 

‘김성일은 김면·정인홍 등 남명문인들과 직접 회동하며

의병활동을 조율·지원함으로써 승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나갔다.

6월 22일 대장(大將) 정내암(鄭來庵)과 대장(大將) 김송암(金松庵)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와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만나 적을 토벌할 방안을 의논하니,

신기한 지모(智謀)와 기발한 계책(計策)이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정경운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 기록되어 있다.

김성일에 대한 우도 사람들의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경상좌감사 임명시 였다.

정유명(鄭惟明)을 소두로 하여 만류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김성일을 다시

경상우감사에 임명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이 상소문에서 주목할 것은 김면·곽재우·정인홍 등이 중심이 된 강우지역 의병활동의 실질적

지휘자로서의 김성일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고,

이는 이른바 영남재조론의 근간을 이루는 설명 구조이다.

 

이보다 앞서 또 의령의 곽재우는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우뚝하게 일어났으며,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좌랑(佐郞) 김면(金沔)도 앞장서서 의병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는데, 모든 일이 엉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김성일이 와서 친히 진영을 순찰하였으므로 사기는 백배나 충천되었습니다.

 

또 병졸은 많으나 통솔할 사람이 없으므로 김면(金沔)과 손인갑(孫仁甲)으로

좌우 대장을 삼았습니다. 이에 각 고을의 의병도 절로 통솔하는데가 있게 되어,

여러 차례 크게 이긴 공을 아뢰었으며, 점점 수복하는 형세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시행한 일의 성과를 따져 보면 옛사람보다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일은 그 어느것이나 의병이 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의병들로 하여금 종시토록 그만큼 성취하게 한 것은 김성일의 공입니다.

 

 

                    제5주제: 김돈 (서울과학기술대)

[경인통신사에 대한 역사기술과 역사교육의 문제]

 

允吉은 西人이요 誠一은 東人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이 일치치 아니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다시 생각하여 볼 문제이다. 아무리 黨爭이 심한 때 이기로 국가의 何等 重大한

일에 黨色을 띠고 거짓말을 했을까? 가 문제이다.

誠一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그의 所見은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自己의 주관에는

秀吉의 태도가 虛張聲勢와 같이 보였기 때문에 이로써 너무 上下의 인심을

자극시키는 것이 不可하다고 생각 되었던 모양이다. ......

여하튼 衆議는 半信半疑, 無事를 爲主하던, 당시이므로 國防에 있어서도

그다지 긴급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

無事를 희망하던 조정에서도 드디어 방어에 착수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정사와 부사의 의견이 동일하여 일본의 병화에 대비하였다면

당시에 과연 일본의 침략을 초전에 격파하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가?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7주갑을 맞이하는 올해에 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파견된 경인통신사의 사행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당시 경인통신사의 사행을 전후하여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시그널은

대마도를 통해 계속 전달되고 있었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침략에 대비하여

군제 및 병력 동원, 군량 상태, 무기의 실태등을 점검하고,

민심의 동요에도 만전을 기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임란 발발과 함께 조선의 군사적 대비태세는 물론이고

왕조 자체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엄청난 인명, 재산상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불과 60년 전에도 겪은바 있다.

역사를 배우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교훈이다.

민족사와 국가사가 거의 합치된 우리 역사의 특성을 계속 존속해 가고

과거의 잘못된 대응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소중한 지혜를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를 둘러 싼 주위 국가들에 대한 꽌계 유지와 관찰, 그리고

어느 한 나라에 절재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균형 잡힌 대외 관계의

형성과 지속이 임란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종합토론]

좌장: 손승철 (강원대)

토론자

노영구 (국방대학원)      김시덕 (고려대)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순 (서울대 규장각)  박인호 (금오공대)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이천용 사무총장과

수석부회장 류한성, 그리고 東郊堂 柳江夏 선생

     

慕圓 이원재 박사 . 止止軒  김명준 저자 . 김명준(42회)의 임진왜란과 김성일

 

          학술회 책자

깊은 전통을 가진 귀 학회의 발전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