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직전 庚寅通信使行과 歸國報告 再照明 (上)
(2012. 9. 7. 10:30~12:30)
사회: 남상호 (경기대학교)
학봉선생기념사업회장이신 이홍구 전 국무총리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학술대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제주도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환경회의조직위원장이어서 오늘 참석 못해 죄송하고
오신 분들에게 인사 대신 전해 달라는 말씀드립니다.
개회사: 한문종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안녕하십니까?
유난히도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물러나고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9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올해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학술회의가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한일관계사학회에서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부터 현재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 1590년 경인통신사행의 귀국보고에
대한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기획하였습니다.
경인통신사의 귀국보고 문제는 전쟁의 원인을 둘러싼 주요한 논쟁거리로서
사실의 왜곡, 후대에 잘못 전술된 부분, 당쟁론과 식민사관의 연관성,
역사 교육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재검토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경인통신사의 귀국보고에 대한 오해의 편견을 바로잡고,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의 정세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는 한일관계사학회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되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우리 학회는 월례발표회 140회, 국내·국제학술대회 24회를 개최하였으며,
단행본 15권과 학술지 ‘한일관계사연구’ 42집까지 발간하는 등 매우 활발하게
학술 연구활동을 해 왔습니다. 특히 학술지인 ‘한일관계사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학술지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모두 우리 학회 회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학술대회를 기획하시고 원고까지 손수 수합해주신 전북대 하우봉 교수님에게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바쁘신 중에도 흔쾌히 기조발제를 맡아주신
건국대 신복룡 교수님을 비롯하여 주제발표를 해주실 명지대 한명기 교수님,
청주대 민덕기 교수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학수 선생님,
서울과학기술대 김돈 교수님, 토론과 사회를 맡아 주실 손승철 교수님,
박병련 교수님, 이훈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오늘 학술대회가 열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학봉김선생기념사업회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학술대회를 준비하느라
많은 고생을 한 학회 관계자 여러분, 전북대학원생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끝으로 바쁘신 중에도 불구하시고 경향 각지에서 이 자리에 빛내주시기 위해
참석해주신 선생님들과 여러 어르신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기조발제: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조선조 인물사 연구에서의 세 가지 착시(錯視)-학봉 김성일의 경우]
신교수는 庚寅년에의 사신 일행이 귀국을 전후하여 복명한 전후사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어디에 있었든, 결과적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병화(兵禍)에 대한 책임이 거론되어 김성일은 (朝野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없었고,
당쟁과 문중간의 논쟁으로 당색(黨色)으로 설명하려는 논리와 역사소설과 흥미위주의
텔레비전 사극, 또는 소설들이 국민들의 사고를 고착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예를 들어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고 있다.
첫째 조선조 시대의 지식인들의 학봉의 대일 인식에 대해서
결코 그가 일본에 대해서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고 보고 싶지 않다.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무장을 소흘히 하지 않고 만성적인 두려움과
기피심리(xenophonbia)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대일 정책의 기조는
어루만짐(慰撫)과 수호(修好) 그리고 내정의 정비라는 일관된 합의를 느꼈으므로
황윤길이 본 것을 김성일도 보았을 것이다.
둘째 학봉이 왜 사실과 다르게 복명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그가 류성룡이나 이항복에게 한 말의 진정성을 믿어야 한다.
그는 어전에서 “오늘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섬 오랑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에 있다”는 의견을 여러번 피력한바 있고 “지금은 나라가 피폐하여 백성의 원성이
들판에 가득하여 실로 등에 땀이 흐르는 현실”을 걱정하고 있었고, 사신들이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곧 왜병이 쳐들어 올 듯이 파발을 보내고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래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가졌고 민심을 안온(安穩)시켜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두사람의 상반된 견해의 본질적 의미를 최종적으로 판단했어야할
선조가(宣祖)의 무능함이 어쩌면 더 큰 책임일 수 있으며,
그 자리에 이어진 류성룡과 이항복의 증언을 누락한채 의전회의의 장면만을
부각함으로써 역사 기록의 균형을 잃었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셋째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진심과 동기, 그리고 그의 마지막 행적을
고려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학봉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를
제수받아 왜병을 막는데 큰 힘이 되었다. 죽산과 함양 등에서 격문을 돌리고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면서 군정(軍政)에 노심초사하였으며, 역질에 걸린 국민들을 돌보다가
진주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군장을 풀지 않고 지성으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경상도 일대를 보전한 공이 컸으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과 학봉의 복명 문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고민했던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은 영상(領相)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낸 편지에
“학봉은 성품이 엄정하였으므로, 일본에 사신으로가서 다른 무리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아 왜국을 보는 시각이 다른 일행과 같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왜적들이 반드시 침범해 올것을 학봉이 알았다면 그 당시에는 비록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끝내 이를 숨겼겠습니까?” 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낙동강 왜적의 침범 허리를
지키며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공이 너무나 커다 라는 기조 발표를 하다.
제1주제: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16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의 정세-조선 명을 중심으로]
오늘의 주제와는 맞지 않은 발표인 듯하면서도 임진왜란 당시 국내외적 상황을 설명하는
한교수의 발표는 오늘의 발표중 재미있는 관찰이 아닐 수 없다.
16세기 중반 ‘事大’와 ‘尊明’이라는 시각으로 외부 세계에 접근하던 당시 조선을
‘여타 번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禮儀之邦’으로 자부하면서 明을 .一家.이자 ‘부모국’으로 존숭했다.
그리고 조선도 ‘명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번국’이라는 사실이야 말로 여타 번국이나 化外之國을
下視하는 자존심의 기반이 있어, 당시 명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조선과 일본의
행보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시기였다.
일본에 조총이 전래되었던 1543년을 전후하여 조선에서는 書院이 창립되고 賜額書院이 등장한다.
조선은 철저한 文治의 길을, 일본은 오로지 武備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명의 嫡子’라는 자부심에 尊明意識으로 무장했던 조선은 化外之國 일본의 행보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조선의 上國이자 ‘패권국’ 명이 존재하는 한, 일본의 행보 변화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같은 생각은 이미 기묘사림 단계부터 굳어진 것이자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조선은 ‘중화국’ 답게 ‘오랑캐’들을 正道로써 교화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생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사실을 엄밀하게
직시해야한다.경인통신사의 보고 이후에도 대마도 등 여러 곳에서 침략할 것이라는 제보도
있었지만 당시 시대 상황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강론이다.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 본 당시의 사회상이라 감명깊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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