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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인재가 없다니요

칠봉인 2013. 2. 6. 10:25

천하에 인재가 없다니요

 

 

인재에 대한 갈증은 어느 시대, 어느 조직에서나 항상

있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부족하고,

설사 인재를 알아보았더라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는

병폐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양권에서는 당(唐)나라의

한유(韓愈)가 「잡설(雜說)」이라는 글에서

천리마(千里馬)의 비유를 들어 일갈한 뒤로 이런 병폐에 대해 사람마다 인식은 하게 되었지만, 정작 고치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 이웃나라 조선(朝鮮)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제기되고 있었다.

임금은 늘 신하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없는 것을 근심하고, 신하는 늘 임금이 인재를 충분하게 등용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한다. 그 때문에 군신(君臣)이 서로 제회(際會)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웠고, 지치(至治)의 성대함은 역대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대개 10집만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법이거늘, 드넓은 천하에 어찌 인재가 없다고

할 수있겠는가?  문제는, 현자(賢者)는 자신을 추천하기를 꺼리고, 임금과 재상은 인재를 알아보는 총명함이 없다는 것에 있다. 한(漢)나라의 소하(蕭何), 조참(曹參)과 당(唐)나라의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는 곧 진(秦)나라, 수(隋)나라에서 버려졌던 인재들인데도, 마침내 흥왕(興王)의 치적을 이루게 하지 않았던가?
 

또 그 당시의 인재가 어찌 다만 이 몇 사람에 그칠 뿐이겠는가? 깊은 산, 큰 못 속에 자신의 광채를 감춘 채 세상을 개탄하여 길게 읊조리면서, 불우하게 죽어간 자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이좌거(李左車)의 계책이 조(趙)나라에서 채택되었다면, 정형(井陘)의 대첩(大捷)1)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에 한신(韓信)이 제(齊)나라와 전쟁을 할 때도 혹자가 용저(龍且)에게 유세한 것이 또한 매우 기책(奇策)이었는데, 그것이 채택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고 초(楚)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을 이룰 재주를 지닌 자가

한신 이외에는 마땅히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도,

오히려 이 정도로 대단한 계책이 있었으니, 은거한 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재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 세상에 나와 큰일을 한 자는 다만 백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현인을 구하는 것에 급급해

하면서, 오직 자신의 총명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지, 성의가 부족한 바가 있는지 두려워할 뿐이요, 더러 좌우의 측근 무리들이 총명을 가리는 경우가 많더라도 천하에 인재가 없다고 단정하여 현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해이해 진 적은 없었다.

삼대(三代) 이후로 인재의 왕성함이 송(宋)나라 때보다

더한 시대는 없었다. 예를 들어 두 정씨(程氏)2)나 염계(濂溪)3)와 같은 이들은 모두 왕을 보필할 인재이자 경륜(經綸)의 솜씨를 지닌 사람들인데도, 신종(神宗)은 대부분 초야에서 한가로이 노닐도록 내버려두었다. 아침저녁으로 촘촘한 양탄자 위에서 더불어 논의하고 자문한 자들은 왕안석(王安石)의 잔당인 포종맹(蒲宗孟), 왕규(王珪), 채확(蔡確)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이가 노년에 접어들어, 조정은 날마다 어지러워지고, 사업의 성취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묶으려는 것처럼 허무하게 된 뒤에야 마침내 돌이켜보고 망연자실하면서 조회에 임하여 탄식을 발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정작 그렇게 된 연유를 돌이켜 찾을 줄은 모르고, 마침내 말하기를, “천하에 인재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자(韓子)4)가 이른바 '정말 천리마(千里馬)가 없는 것이냐? 아니면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라는 경우이다. 하늘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아서인가? 어찌 그리 미혹됨이 심한 것인가?

 

『중용(中庸)』의 아홉 가지 큰 법[九經]에서는 수신(修身)을 첫 번째로 삼고, 현자를 높이는 것을 그 다음에 놓았다. 수신이라는 것은 현인을 등용하는 근본이다. 현자를 높이는 절목은 네 가지를 두었으니, ‘참소하는 자를 제거하는 것’, ‘여색을 멀리하는 것’, ‘재화를 가벼이 보는 것’,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종(神宗)은 현인의 등용에 뜻이 있었으면서도 참소하는 자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좋아했던 자들은 참소하거나 면전에서 아첨하는 무리들뿐이었으니, 그 실덕(實德)이 지극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1)정형(井陘)의 대첩 : 한(漢)나라 한신(韓信)이 하북성(河
北省)에 있는 험한 요새인 정형구(井陘口)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워 조(趙)나라에 대승을 거두었던 고사를 가리킨다『史記 卷92 淮陰侯列傳』


2)두 정씨(程氏) : 송나라 때의 대학자로 중국 성리 철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가리킨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주자(朱子)의 학문과 병칭하여 정주학(程朱學)이라고 한다.

『이정전서(二程全書)』가 전한다.

 
3)염계(濂溪) : 송나라 때의 대학자이자, 신유학의 비조(鼻祖)였던 주돈이(周敦頤)의 호이다. 저술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인품이 고결하고흉금이 탁 틔어, 당시 사람들이 비가 그친 뒤의 맑은 하늘의 모습[光風霽月]과 같다고 칭송하였다.

4)한자(韓子) : 당(唐)나라의 문인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 768~824)를 가리킨다. 자(字)는 퇴지(退之)이고,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이다.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고문운동을 주도, 변려문(騈儷文) 위주의 기교적인 산문을 타파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전한다

.
  원문(漢文)은 삭제 헸습니다

 

-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 集)』권13, 「독사여측(讀史蠡測)」

            ▶윤두서(尹斗緖)의 유하백마도(柳下白圖)

                  (위키피디아에서 인용)

 

해설

 

조선 선조조(宣祖朝)의 명재상인 서애(西厓) 유선생이 중국 역사책을 읽다가

“천하에 인재가 없다.”는 송(宋)나라 신종(神宗)의 말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쓴 글이다.

요(遼)나라와 서하(西夏)의 빈번한 침략 속에서,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新法黨)을 중용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신종 황제이지만,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인재가 부족하다는 탄식을 내뱉은 것이다.

서애는 그에 대해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감식안이 문제였음을 지적하였다.

신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인재설(人才說)"이라는 글에서도

그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논조는 유래가 있다.

바로 당(唐)나라 때의 대문호(大文豪)인 한유의 「잡설(雜說)」이다.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은 뒤라야 천리마가 있는 법이니,

천리마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백락은 천리마의 감정에 조예가 깊었던 전설상의 인물이다.

지나가다가 돌아서서 잠깐 눈길만 주어도 말 값이 순식간에

몇 배로 뛰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한유는 그런 백락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리 천리마라도

그저 평범하게 부려지다가 죽어갈 뿐이라고 탄식하면서, 말미에서 반문하였다.

“정말 천리마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서애는 여기에다 추가적으로 실제 인물들의 사례를 제시하고,

마지막에서는 인재를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 극복의 영웅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극력 추천하였던

이가 바로 서애였음을 상기하면, 문인의 상투적인 글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을 인재로 보지 않는 것도 흥미롭다.

비록 개혁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사마광(司馬光)의 구법당(舊法黨)에 맞서

한 시대를 경영했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애는 인재를 버려두고

그를 등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주자학(朱子學) 일변도의 흐름 속에서

양명학(陽明學)에도 당당히 관심을 가질 정도로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던 서애였지만,

왕안석에 대해서만큼은 주자(朱子)와 그를 존숭하는 학자들이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2002년 여름, 월드컵 광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히딩크라는 이방인 감독이 과감하게 능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였고,

그들의 맹활약으로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일구어내었다.

상당수는 그동안 국내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선수들이었다.

그러자 사회 각 분야의 경영자들이 너도나도 히딩크를 배우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앞으로는 히딩크 식으로 과감하게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겠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자기부정에 부하 직원들은 쓴 웃음만 지었다.

기존에는 능력 위주의 인사를 안 했다는 말이 아닌가?

더 우스운 것은 경영자들 중에 과연 누가 히딩크 감독 같은 안목을 지녔느냐는 것이었다.

현실은 늘 이런 식이다. 개선의 대상은 정작 자신인데도, 시선은 언제나 남을 향해 있다.

  “하늘은 한 시대가 넉넉히 쓸 수 있을 만큼 인재를 낸다

청(清)나라 심문규(沈文奎)의 말처럼, 인재는 언제나 존재한다.

선거철마다, 인사철마다 인재영입을 외치며 부산을 떨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인재를 알아보는 노력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서애의 문장은 『맹자(孟子)』의 문체를 잘 배웠다고 한다.

『맹자』와 『장자(莊子)』는 옛날 문학 지망생들의 필독서였다.

어떤 학동이 『맹자』를 삼천 번 읽으면 문리(文理)가 나서 머리에서

‘툭탁’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스승의 말을 믿고, 절에 들어가

삼천 번을 읽고 기다렸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나서 스승에게 따지는 편지를 보냈더니,

스승은 “보아라, 네 편지의 문장이 모두 『맹자』의

말이 아니더냐.”라는 답장을 보냈고,

그제야 머리에서 ‘툭탁’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학동이 바로 서애라는 전설이 있다.

그만큼 『맹자』의 문체를 훌륭하게 배웠다는 것이리라. 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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