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어쩌구 저쩌구

3. 머슴과 노비, 그 차이

칠봉인 2015. 8. 20. 12:39

3. 머슴과 노비, 그 차이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머슴이 등장한다.

이 머슴은 금전을 받고 일하지 않는다. 자기 딸인 점순이가 더 크면 결혼시켜주겠다는

주인의 계약조건을 보고 일하는 것이다.

예비 데릴사위가 된 셈이다. 그런데 머슴과 주인 간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점순이가 더 크면’이란 계약조건을 놓고 항상 마찰을 빚는다.

동일한 조건을 두고 머슴은 ‘점순이 나이가 더 들면’으로, 주인은

‘점순이 키가 더 크면’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점순이의 키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슴이 주인에게 계약이행을 촉구하면, 주인은 항상 ‘쟤 키 좀 봐!’라며

상황을 회피하곤 한다.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이다.

“장인님! 인제 저 ······.”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혼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점순이의 키가 생각만큼 자라지 않으니 결혼을 시킬 수 없다는 게 점순이 아버지,

즉 주인의 대답이다. 3년 7개월 동안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건만,

장인어른 아니 ‘사장님’은 이런 식으로 ‘머슴’을 착취하고 있다.

그래서 머슴은 “이래서 나는 애초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했어야 할 것”이라며

후회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봄봄》에 등장하는 머슴이 가장 많이 활약한 때는 일제시대였다.

구한말 이래로 노비제도가 와해되면서 많은 노비들이 머슴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한말 이전에도 머슴은 존재했다. 그들은 노비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조선시대 문헌들에서 그 같은 머슴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관료 겸 화가인 장한종(張漢宗)이 엮은 민담집인 《어수신화(禦睡新話)》에

고한(雇漢), 즉 머슴이 등장한다.

고용을 뜻하는 고 자에서 고한과 주인의 관계를 감지할 수 있다.

순조 4년 6월 5일(1805. 7. 12.), 장한종은 경기도 해주를 방문하고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만난 ‘정심혁’이라는 인물과 주막집에 들렀다.

정심혁의 노비도 이들과 함께했다.

이때 정심혁이 타던 말이 주막집 머슴을 걷어차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장한종과 정심혁은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방에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격분한 주막집 머슴들이 달려들어 배상을 요구했지만, 정심혁은 새벽을 틈타 도주했다.

하지만 정심혁은 임진강 앞에서 그를 쫓아온 주막집 주인에게 붙들려 그의 노비를

인질로 맡기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장한종은 자신의 말을 담보로 정심혁의 노비를 풀어주도록 했다.

이후 정심혁이 조카뻘인 김포 사또에게 서너 냥의 돈을 빌려 주막집 머슴에게

치료비 조로 지급한 뒤에야 비로소 이 사건은 해결되었다.

이는 당시 농가뿐 아니라 주막집에도 머슴들이 근무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장한종이 살던 조선 후기뿐 아니라 전기에도 머슴은 존재했다.

조선 건국 93년 뒤인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머슴을 가리키는 고공(雇工)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고한이나 고공은 모두 머슴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들은 외형상으로 솔거노비와 구분되지 않았다. 주인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는 면에서 머슴이나 솔거노비는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경국대전》에서 고공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면, 머슴과 노비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호적의 기재 사항이 적시되어 있다.

이것을 호구식(戶口式)이라 했다. 호구식에 들어가는 항목은 주소·직분·성명·연령·본관·4대

조상의 인적 사항, 배우자의 성명·연령·본관·4대 조상의 인적 사항, 동거하는 자녀의 성명 및

연령, 노비의 성명 및 연령, 고공 즉 머슴의 성명 및 연령이다. 만약 머슴과 노비가 법적으로

동일한 존재였다면 법전에서 양자를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적으로 상호 이질적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머슴과 노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는지는 《금계필담(錦溪筆談)》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관료인 서유영(徐有英)이 정리한 이 민담집에 고유(高庾)란 인물이 나온다.

숙종 대에 활약한 고유는 임진왜란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다.

고유의 유(庾)가 이름인지 자(字)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고경명의 집안은 대대로 전라도 광주에 거주했지만, 고유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경상도 고령에서 남의 집 머슴으로 살았다.

부지런하고 충직해서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 박 좌수(朴座首)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좌수’는 시·군·구 의회 격인 향청(유향소)의 우두머리를 일컬으니,

박 좌수는 지역 유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지위에 비해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고유가 그와 함께 장기를 두었다.

 

도중에 고유가 내기 제안을 했다.

좌수는 내기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내기의 내용을 듣고 버럭 화를 냈다.

고유가 황당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면 1년간 좌수의 머슴이 되고 자기가 이기면 딸을 달라는 것이었다.

고유가 보기에는 자신과 좌수의 처지가 비슷했다.

자신은 비록 머슴살이를 하고 있지만 고경명의 후손인 데 비해,

좌수는 비록 지역 유지이기는 하지만 명문가가 아닌 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좌수의 사위가 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좌수는 고유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기분 나빴다.

고유가 아무리 명문가의 후손이라 해도 지금은 하찮은 머슴이니,

좌수인 자기 딸과 결혼하는 게 가당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좌수는 “당치도 않아!”라고 고함쳤지만, 얼마 안 있어 결혼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딸도 고유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고, 동네 사람들도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고유의 가문으로 보나 사람 됨됨이로 보나 앞으로 훌륭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다들 그렇게 추천했다.

 

신혼 첫날밤, 신부는 고유에게 황당한 제안을 했다. ‘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될 자질이 있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

10년간 별거하면서 당신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나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자’는 게 그 제안이었다.

고유는 제안을 승낙하고 동이 트기 전 마을을 떠났다.

이후 동네에서는 새신랑이 첫날밤 도망을 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렇게 고령을 떠난 고유는 정말로 10년 뒤에 대과에 급제했고

부인은 장사를 해서 거상이 되었다.

고유의 사정을 들은 숙종 임금은 일부러 그에게 고령현감 자리를 주었다.

덕분에 고유와 부인은 10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나눌 수 있다.

얼마 안 있어 고유는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했다.

 

고령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10년간의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하고 고위직에 오른 고유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머슴의 법적 지위에 관한 두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남의 집 머슴인 고유가 ‘제가 장기에 지면 좌수 어른의 머슴이 되겠습니다’라고 제의한 데서

드러나듯이, 머슴은 자신의 주인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노비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인과 머슴은 고용계약을 매개로 묶였다.

그런 까닭에 계약만 해소된다면 머슴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머슴살이를 하던 고유가 과거에 응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머슴의 법적 지위는 일반 양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머슴 신분을 숨기고 응시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고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머슴살이 경력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입지전적 출세를 증명하는 것은 오히려 자랑거리였다.

숙종 임금이 그의 사정을 듣고 고령현감을 제수한 사실을 보더라도,

머슴살이 경력이 과거 급제에 장애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머슴은 비록 외형상으로는 솔거노비와 다를 바 없었지만 법적으로는

그들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머슴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미천왕도 왕이 되기 전에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아버지 돌고(咄固)를 죽인 큰아버지 봉상왕(돌고의 형)을 피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머슴살이를 ‘용작(傭作)’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용작은 고용계약에 기초한 노동이다.

미천왕이 담당한 일은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머슴은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고용계약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이들의 존재가 미미했다. 자본주의가 본격 유입되기 전까지는 노비가 다수였고

머슴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가 본격 유입되기 시작한 구한말부터

머슴의 수가 급증했던 것이다.

 

4. 여종의 손가락을 자른 주인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렀다가

석방된 후에 삼정승을 두루 지낸 인물이 있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이 그 주인공이다.

홍언필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명종실록(明宗實錄)》1) 〈홍언필 졸기〉에서는

“인품이 겸손하고 청렴하여 일상생활이 매우 검소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마음속으로 항상 화를 두려워하여 바른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두 가지 평가를 종합하면, 그는 신중하지만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그와 반대였다. 그

의 부인은 중종 때 명재상인 송질(宋軼)의 딸로, 왈가닥인 데다가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홍언필이 송씨와 결혼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송씨는 처녀 때부터 엽기적인 행각으로 유명했다.

처녀 시절, 송씨의 마을에 질투가 심한 부인이 살고 있었다.

질투에 질린 남편은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온 동네에 보여주었다.

투기가 심한 여인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가락 얘기를 들은 송씨는 여종에게 그 손가락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여종이 손가락을 가져오자 상 위에 올려놓은 뒤 술을 붓고는

“그대는 여자로서 죽어도 마땅하니, 내 어찌 조문하지 않으리오?”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사대부들 사이에서 송씨는 결혼 기피대상이 되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홍언필이 결혼을 결심한 것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정도 여자는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결혼을 한 홍언필이었지만 혼례를 치른 다음 날 짐을 싸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식을 치룬 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년 정도 살다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 풍속이었으니, 신랑이 첫날밤만 보내고 짐을 싼 데는 까닭이 있었다.

 

혼례식을 치룬 홍언필은 어떻게 하면 신부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신부와 단둘이 있는 방 안에서도 그런 고민에 빠졌다.

마침, 예쁜 여자 노비가 술상을 들고 신혼 방에 들어왔다.

홍언필은 일부러 여종의 손을 잡고 귀여워하는 척했다.

부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본 다음, 태도에 따라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부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못 본체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술을 다 마신 홍언필은 사랑방에 가서 혼자 쉬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부인이 남편을 찾아 사랑방에 들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피가 떨어지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부인은 그것을 남편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조금 전에 홍언필이 만지작거렸던 여종의 손가락이었다.

 

결혼하자마자 별거에 들어간 이 부부는 수년이 지난 뒤 다시 결합했다.

송씨가 부모의 권유로 남편에게 용서를 빈 뒤였다.

하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송씨의 엽기 행각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들 홍섬(洪暹)이 태어난 지 7년 뒤에 송씨는 《중종실록》2)에까지

기록될 만한 범죄행각으로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남편과 간통한 남의 집 여종에게 수없이 매질을 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다.

그것으로 모자라 빗으로 얼굴을 긁기까지 했다.

그렇게 폭행을 당한 여종은 쓰러졌는데 사람들은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땅속에 묻었다.

사간원에서 조사해보니 매장될 당시 여종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송씨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여종을 땅속에 묻은 것이다.

여종을 죽도록 때린 송씨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땅에 묻은 것은 참혹한 일이다.

그래서 정부는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송씨 부인에 의해 손가락이 잘린 여종이나 땅속에 묻힌 여종의 사례는

노비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주인이나 양반들이 가하는 사적 형벌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송씨가 남의 집 여종을 죽인 것은 간통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비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

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적었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손가락이 잘린 여종처럼 별다른 항변도 못 하고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주인이 노비의 생명을 끊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집안에서 쉬쉬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 때 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인 교서감(校書監)에

조직 내 서열 3위이자 정3품인 왕미(王亹)라는 관리가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3) 왕미의 집에서 여자 노비 하나가 그의 부인에 의해 살해됐다.

노비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부인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범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사례는 잘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이성을 상실한 부인의 행동 때문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 노비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인은 시신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옆에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사건은 공개되었고 형조는 사법 절차에 착수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적으로 목숨을 잃은 노비의 억울함은 세상에 알려지기 힘들었다.

송씨가 저지른 두 번째 범죄처럼 남의 집 노비에 해를 끼친 경우는 그나마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피해를 당한 노비의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도 피해자인 노비의 권익에 관심이 집중되지는 않았다.

노비주의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주안점인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한 조선 노비들의 지위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서양의 노예와 비교할 때, 이들의 처지는 어땠을까?

노비는 노예와 같은 존재였을까? 아니면, 다른 존재였을까?

서양사에 나오는 농노와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노비와 노예·농노의 관계를 살펴보자.

 

각주

1 명종 4년 1월 28일자(1549. 2. 25.) 《명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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