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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노비 즉 종에 대한 이야기

칠봉인 2015. 8. 20. 13:36

조선조의 노비 즉 종에 대한 이야기

 

내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는데 그때는 노비제도가 없어 진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수성이라고 부르던 노인이 곡식 등을 소 구루마에 싣고 가끔 찾아 왔는데

외가 의 노소가 모두 그냥 이름을 불렀고 그 노인은 외할매 한테 아씨라고

부른 것을 보면 외할매 시집오실 때 따라 왔던 종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의 최하층 신분이었던 노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몇해 전에 잠은 안오고 무료하여 옛날 노비들의 이름을 훌터 보았는데

이름만 보아도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동물의 이름을 딴것

강아지(姜阿只. 江牙之. 干阿只. 加也之). 도야지(都也之. 山猪伊(산돼지) 加猪伊, 猪伊)

망아지(亡吾之, 亡阿之. 忘吾之). 송아지(松阿只. 松牙之) 호랑이(山虎伊. 凡伊).

두꺼비(豆他非). 솔개(召叱介. 愁里介). 개(介伊. 犬伊. 黃犬伊. 山介). 오리(鴨伊).

벌레(伐介. 伐乙去. 虫介. 虫於之. 伐於之(벌거지)). 쥐(衆伊). 종다리(終多伊). 매미(鶴伊. 獸生. 梅岩). 두견이(斗堅. 接同). 앵무(鸚鵡). 복어(卜只). 승양이(勝娘. 承陽).

원숭이(遠時). 수달이(守達)

 

2. 식물 이름을 딴것

산호. 대송. 국화. 작약. 수양. 은행. 장미. 매화. 이화. 규화. 연화. 도화. 계화. 동백. 배송. 안송.

덕송. 함송. 산송. 송백. 홍매. 납매. 목란. 단화. 오매. 가지

 

3. 더러운 것

소똥(小同, 小叱同, 牛叱同, 牛屎). 말똥(末乙同. 馬叱同). 개똥(介同. 介叱同. 介叱屎. 介屎(옛날 광해군이 총애하던 김상궁의 이름이 개시였다). 똥개(同介. 同叱介). 송장(永莊). 거름(斗險伊. 豆險. 斗許未. 巨乙金. 巨叱金). 물똥(無乙同). 방귀(方貴). 싸게(四季.乭屎. 屎孫. 屎伊. 屎山(똥싼)). 똥녀(糞女. 分女. 糞女)

 

4. 인간이하의 이름

짱대(張代). 마당이(馬堂. 麻堂). 도끼(都致). 막대(莫大). 곡간이(豆之. 豆只). 계란이(季難). 고삐(古非). 노적(老跡.) 되(族代). 돌무더기(石乙無跡). 귀후비게(棄伊介). 안장(安莊) 얼금이. 곰보(於乙金). 잔이(盞伊). 대추(待秋). 우거지(于巨之). 곤장(權莊). 모퉁이(毛離伊) 허송이(許松). 어린이(於理尼). 우연이(偶然). 무심이(無心). 매구(每九). 복종이(卜終). 배짱이(背壯). 바보(千致). 무섭이(戊西非). 어리광이(應丁). 심술이(心術). 모진이(毛之里). 고물이(古物伊). 단지(丹之). 망난이(亡難). 꼰대(權大). 천대(千代). 심술이(心術). 조용히(從容). 똘만이(乭萬). 귀찮이(貴贊). 돌덩이(乭非). 문둥이(問同). 걸근이(訖斤). 나쁜놈이(수악(竪惡)). 물가이(勿加伊). 서운이(瑞云. 鋤云). 막내(亡乃. 莫乃. 莫同. 季生. 終大. 終伊. 莫介. 末孫). 억지(伐湯. 億之). 남자성기(延長. 衍莊. 男根. 玉經. 甘時). 점쟁이(點莊). 수청이(水淸). 사공(舍古里). 밀떡이(密德). 개장(介莊). 쌀떡(沙乙德). 북실이(北實). 차돌이(次乭). 설운이(雪雲). 개떡이(莫介德). 헐덕이(許叱德. 虛叱德). 막세(莫世). 난산이(難産. 卵山). 검불이(檢佛). 작은이(者斤). 뚱거리(斗應九里) 마구(馬廐). 불만이(佛萬). 개불알이(介佛)

 

5. 좀 낫게 지어준 여종 이름

 

보배(寶倍. 寶背). 귀생이(貴生). 유공이(有功). 부귀(富貴). 경국이(傾國). 은반이(銀盤)

예쁜이(禮分. 禮分. 於汝叱粉. 汝余分. 古溫. 古云). 福重 福德. 사랑이(思良).

애옥. 비취. 진주, 풍년이(風連). 홍장이(紅粧). 금슬이(琴瑟)

외에도 많으나 생략하고 실록 일부만 소개한다.

중종실록 10년(1515 을해 ) 12월 20일(임신) 3번째기사

충청도 태안군의 아전 이축의 아내 똥개에게 정려를 명하다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의 아전(衙前) 이축(李軸)과

아내 똥개[同叱介]는 나이가 모두 80인데, 집에 불이 났을 때에

축이 앓아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므로 그 아내가 불꽃 안으로 돌입하여

미처 나오지 못하고 함께 죽었다.

이 일이 위에 알려지매,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1. 노비란 무엇인가

노비는 노(奴)와 비(婢)가 합쳐진 말이다.

흔히 ‘노’는 남자 하인, ‘비’는 여자 하인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됐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 주나라의 정치체제를 정리한

《주례(周禮)》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주례》 〈추관사구(秋官司寇)〉 편에 ‘노’와 관련된 문장이 있다.

 

노(奴) 가운데서 남자는 죄예(罪隸)로 들이고, 여자는 용인(舂人)이나 고인(槀人)으로 들인다.

남자 범죄자는 ‘죄예’란 명의로, 여자 범죄자는 ‘용인’이나 ‘고인’이란 명의로 일을 시킨다는 의미다. 죄예·용인·고인은 국가에 예속되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관청에 속한 공노비나 관노비의 원조는 바로 이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노’를 남녀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성 범죄자만 따로 떼어내 ‘비’라 부른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이는 초기에는 ‘노’가 주로 남자였음을 의미한다.

나중에 여성의 숫자가 많아지자 이들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생긴 것이다.

 

노 자의 우변에 있는 ‘우(又)’는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을 표시하고 있다.

중국 후한(後漢) 때 나온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우는 손 수(手) 자에서 나왔다. 10세기 때 중국 학자인 서현(徐鉉)은

《설문해자》를 해설하면서 “우는 손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우 자를 포함한 노 자에는 노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노비의 기원이나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노비는 타인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존재를 지칭했다.

그 타인은 개인일 수도 있고 왕실일 수도 있고 관청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주로 왕실과 관청이 노비를 소유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타인에게 예속되어 신분적 얽매임을 받는 존재가 노비였다.

 

이 대목에서, KBS 드라마 〈추노〉에 나온 태하(오지호 분)와

대길(장혁 분)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훈련원 판관으로 소현세자의 측근이었던

태하는 세자의 죽음과 함께 노비로 추락했다가 기회를 틈타 도주했다.

거액을 약속 받고 그를 잡으러 떠난 추노꾼이 대길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이들은 ‘애증의 친구’ 사이가 되었다.

태하가 도주 과정에서 만나 결혼한 언년이(이다해 분)는 실은 대길의 옛 애인이었다.

언년이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힌 대길은 태하를 돕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애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증오를 품은 대길은 태하를 “어이! 노비”라고 부르곤 했다.

드라마 최종회에서도 대길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자, 태하는

“자네는 아직도 날 노비로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대길은 “그렇다”면서 꽤 철학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세상에 매어 있는 것들은 다 노비야.” 대길의 말처럼 노비의 본질은 ‘얽매임’이다.

남에게 구속되는 것이 노비의 본질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이란 모든 형태의 구속이 아니라 신분적 구속에 국한된다.

예컨대 국립대학 겸 행정연수원인 성균관에는 교직원들도 있고 유생들도 있고 노비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성균관에 구속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교직원이나 유생들을 성균관 노비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들의 구속은 ‘신분적’ 구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성균관에 묶여야 할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 노비들은 달랐다.

그들은 뭔 일을 하든지 성균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남의 양자가 된다고 해서 친부모와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비의 신분적 구속은 그런 천륜과도 같은 것이었다.

면천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은 천륜이었다.

 

성균관 노비들의 내력을 살펴보면, 노비의 신분적 구속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성균관 노비들이 아주 오래 전에 한 집안 노비들의 후예였다는 사실인데,

이는 윤기(尹愭)의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에서 알 수 있다.

반중잡영은 ‘성균관 내부[泮中(반중)]에 관한 갖가지 시[雜詠(잡영)]’를 뜻한다.

정조시대에 성균관 유생이었던 윤기가 지은 이 시들은 그의 유고시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에 수록되어 있다.

반중잡영 중에 “우리 동방에”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우리 동방에 안문성(安文成) 같은 분이 있어

화상을 사들이고 경전을 들여오고 학교도 세우셨네

노비 100명의 후예도 많아졌네

지금도 제단에 제사할 때는 마음과 성의를 다한다

 

‘안문성’은 문성공 안향(安珦, 1243~1306)이다.

고려에 성리학, 즉 주자학을 도입한 학자다.

‘화상’은 공자와 70제자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노비 100명’에 주목해보자. 윤기는 각각의 시에 해설을 덧붙였는데

이 시에 딸린 해설에서 “(안향이) 국학을 설치하고 노비 100구(口)를 기부했으니,

지금의 반인(伴人)은 모두 그 후손”이라고 했다.

안향이 성균관(국학)에 바친 100명의 노비가 점차 불어나서 반촌(泮村)의 주민인 ‘반인’,

즉 성균관 동네의 주민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인은 성균관 주변에 거주하면서 이곳 살림을 도맡아 처리했다.

 

윤기가 이 시를 지은 때가 18세기 후반이었으므로, 반인들은 거의 400년간이나

성균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반인들이 안향의 노비에서 성균관의 노비로, 또 고려시대의 노비에서

조선시대의 노비로 바뀐 데서 느낄 수 있듯이, 노비들은 웬만해서는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신분적 구속에 얽매어 있었다.

그 구속은, 주인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순간접착제 같은 것이었다.

노비의 구속은 종신제 구속이었다.

오늘날에는 종신제 계약이 잘 인정되지 않는다.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어느 일방에만 가혹한

종신제 계약은 설령 그 일방이 동의했더라도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노비제도는 종신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타인에게 평생 동안 얽매어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노비의 구속은 노비 본인뿐 아니라 자손에게까지 이어졌으니 노비제도는 매우 가혹한 제도였다.

중국과 비교해도 가혹했다.

중국에서는 노비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隧錄)》 〈병제(兵制)〉에서

중국 노비는 자기 대에 한해서만 복역할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

중국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다는 점은 당나라의 법전이자 동아시아

역대 법령의 모범인 《당육전(唐六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육전》 〈상서형부(尙書刑部)〉 편에서는

관노비가 70세가 되면 양인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는 노비의 세습을 불허했음을 뜻한다.

그에 비해 조선에서는 본인뿐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대대로 신분적 굴레를 씌웠으니

조선 노비제도는 매우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

노비제도가 가혹하기는 조선 이전의 왕조들도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중국 노비제도에서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지켜졌다고 볼 수만은 없다.

노비 부모를 둔 자녀는 특별한 사정변화가 없는 한,

부모의 노비주를 위해 복역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별다른 생계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부모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독립을 선언한다면, 어디서 호구지책을 마련할 것인가?

부모의 길을 따르는 게 현실적으로 유리한 경우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중국 노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들은 그런 기회마저 누리지 못하고 본인은 물론 후손까지도

얽매인 삶을 살아야 했으니, 조선 노비들만큼 불우한 신세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인수가 신발의 노비라는 것은 그가 평생 신발 가문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주인집이 자기에게 부과한 의무를 이행하며 살아야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노비의 의무를 다하는 한, 그가 책을 읽든 선비들과 교유하든

노비주 신발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인수의 가족들이

그의 몫만큼 열심히 일해서 그 결과물을 주인집에 갖다주면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인수의 가족들은 그런 수고조차 하지 않아도 되었는지 모른다.

박인수의 제자들이 갖다주는 재물을 주인집에 바치면 됐기 때문이다. 선비 박인수는 그런 의미에서 노비였던 것이다.

이제, 노비는 마당이나 쓸고 주인에게 굽실대며 툭 하면 얻어맞는 존재란 이미지를 버리자. 박인수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 노비들도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간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노비의 세계로 우리 좀더 깊이 빠져보자. 노비의 개념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평소 애매한 문제 중 하나였을 수 있는 머슴과 노비의 관계를 살펴보자. 머슴과 노비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노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보자.

 

2. 선비들의 존경을 받은 노비

 

우리가 상상하는 노비(奴婢)는 ‘마당을 쓰는 사람’, ‘주인에게 굽실대는 사람’, ‘툭 하면 얻어맞는 사람’ 정도다. 아주 틀린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이미지도 아니다. 상당 부분은 편견으로 채워진 선입견이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노비 박인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비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이 실제 사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왜냐? 박인수는 글 읽는 노비였기 때문이다. 마당을 쓸거나 주인에게 굽실대거나 툭 하면 얻어맞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노비 신분을 갖고도, 존경 받는 학자로서 활약을 펼쳤다. 박인수 혼자만 그랬던 게 아닐까? 아니다. 전문적으로 학문 활동만 하는 노비도 많았다. 박인수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박인수(朴仁壽, 1521~92)는 정2품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1)를 지낸 신발(申撥)의 노비였다. 오늘날 발행된 어떤 사전에는 박인수가 평민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전을 집필한 사람은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으니, 그는 양반 아니면 평민이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학자들 중에 노비도 있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인수는 막일을 하는 노비가 아니었다. 학식을 쌓고 선비 이상의 몸가짐을 유지한 노비였다. 조선 후기 민담집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다. 아래 글에서 “노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노비는 학문을 연구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노비들은 그런 직업밖에 가질 수 없었다는 의미다 국법상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인수는 천한 일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면서 선행을 좋아했다. 읽은 책은 《대학》 《소학》 《근사록(近思錄)》2) 같은 것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행실이 탁월했고 예법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았다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를 학문의 길로 이끈 사람은 박지화(朴枝華)란 학자였다. 박지화는 대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명종 때 당대 최고의 학자로 손꼽혔다. 박인수는 유학만 배운 게 아니었다. 한때는 불경에 심취해서 승려가 되려고 했다. 유교와 불교를 두루 공부했으니, 누구와 대화해도 막힘이 없었을 것이다. 방 안에 거문고를 두고 즐길 정도로 취미도 제법 고상했던 듯하다.

노비 주제에 그렇게 한다고 남들이 알아주기나 했을까? 비웃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그의 학문은 남들이 ‘알아줄’ 정도였다. 수많은 선비들이 그를 존경했다.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 제자들은 박인수에게 죽을 올린 뒤, 그가 다 먹은 다음에야 물러갔다. 그가 선비 중심의 사회에서 얼마나 탄탄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노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였으니 박인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노비주(奴婢主) 신발도 그를 쉽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인수가 주인집에 기거한 솔거노비였는지 아니면 주거를 따로 한 외거노비였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 노비 신분을 유지하며 공부에 전념한 것을 보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문적 명성을 쌓기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군가가 그를 위해 희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중에도 그가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외거노비의 중요한 의무는 노비주에게 정기적으로 신공(身貢), 즉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제자가 생기기 전에는 가족들이 대신해서 신공을 바쳤을 것이고, 제자가 생긴 후에는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박인수 스스로 신공을 마련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노비를 거느린 노비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시기심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박인수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다. 박인수는 주인집과 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어우야담》에서는 그가 신발의 아들인 신응구(申應榘)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박인수는 그냥 학문이 좋아서였지만, 신응구는 과거시험을 목표로 금강산에 공부하러 갔다. ‘수험생’인 아들을 노비에게 맡긴 것을 보면, 신발이 박인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인수가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인집과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박인수가 좀더 쉽게 선비 사회로 진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주인이 면천(免賤)을 시켜주지 않았다면, 일개 노비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면천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인수 같은 인물이 면천되었다면, 그 이야기도 분명히 전하겠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노비 신분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 박인수의 모습뿐이다.

선비형(型) 노비 박인수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노비가 글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노비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박인수를 떠받든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良人)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박인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노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역사적 실제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비에 관해 잘못 아는 게 많기 때문에 박인수란 존재를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노비가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를 탐구하면, 박인수가 노비 신분을 갖고 선비 사회에서 존경을 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각주

1 중추부는 1392년 건국과 함께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에서 출발한 기구였다. 중추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경호실, 국방부 등을 합쳐 놓은 기관이었다. 이 부서는 1400년에 삼군부(三軍府)로 개칭됐다가 1401년에 승추부(承樞府)로 바뀌었다. 1405년에 군정 업무가 병조로, 비서 업무가 승정원으로 이관되면서 승추부는 병조에 흡수됐다. 1432년, 경호 기능을 띤 중추원이 다시 설립되었다. 이것이 1461년 중추부로 개칭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중추부는 실권이 없었다. 정3품 이상의 고위 품계를 갖고 있지만 특별한 소임이 없는 사람을 예우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계급은 준장인데 보직이 없는 장군에게 형식상의 직책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박인수가 살던 시대의 중추부가 바로 그러했다.

                      [받은글]  조선조의 노비 즉 종에 대한 이야기

 

내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는데 그때는 노비제도가 없어 진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수성이라고 부르던 노인이 곡식 등을 소 구루마에 싣고 가끔 찾아 왔는데

외가 의 노소가 모두 그냥 이름을 불렀고 그 노인은 외할매 한테 아씨라고

부른 것을 보면 외할매 시집오실 때 따라 왔던 종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의 최하층 신분이었던 노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몇해 전에 잠은 안오고 무료하여 옛날 노비들의 이름을 훌터 보았는데

이름만 보아도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동물의 이름을 딴것

강아지(姜阿只. 江牙之. 干阿只. 加也之). 도야지(都也之. 山猪伊(산돼지) 加猪伊, 猪伊)

망아지(亡吾之, 亡阿之. 忘吾之). 송아지(松阿只. 松牙之) 호랑이(山虎伊. 凡伊).

두꺼비(豆他非). 솔개(召叱介. 愁里介). 개(介伊. 犬伊. 黃犬伊. 山介). 오리(鴨伊).

벌레(伐介. 伐乙去. 虫介. 虫於之. 伐於之(벌거지)). 쥐(衆伊). 종다리(終多伊). 매미(鶴伊. 獸生. 梅岩). 두견이(斗堅. 接同). 앵무(鸚鵡). 복어(卜只). 승양이(勝娘. 承陽).

원숭이(遠時). 수달이(守達)

 

2. 식물 이름을 딴것

산호. 대송. 국화. 작약. 수양. 은행. 장미. 매화. 이화. 규화. 연화. 도화. 계화. 동백. 배송. 안송.

덕송. 함송. 산송. 송백. 홍매. 납매. 목란. 단화. 오매. 가지

 

3. 더러운 것

소똥(小同, 小叱同, 牛叱同, 牛屎). 말똥(末乙同. 馬叱同). 개똥(介同. 介叱同. 介叱屎. 介屎(옛날 광해군이 총애하던 김상궁의 이름이 개시였다). 똥개(同介. 同叱介). 송장(永莊). 거름(斗險伊. 豆險. 斗許未. 巨乙金. 巨叱金). 물똥(無乙同). 방귀(方貴). 싸게(四季.乭屎. 屎孫. 屎伊. 屎山(똥싼)). 똥녀(糞女. 分女. 糞女)

 

4. 인간이하의 이름

짱대(張代). 마당이(馬堂. 麻堂). 도끼(都致). 막대(莫大). 곡간이(豆之. 豆只). 계란이(季難). 고삐(古非). 노적(老跡.) 되(族代). 돌무더기(石乙無跡). 귀후비게(棄伊介). 안장(安莊) 얼금이. 곰보(於乙金). 잔이(盞伊). 대추(待秋). 우거지(于巨之). 곤장(權莊). 모퉁이(毛離伊) 허송이(許松). 어린이(於理尼). 우연이(偶然). 무심이(無心). 매구(每九). 복종이(卜終). 배짱이(背壯). 바보(千致). 무섭이(戊西非). 어리광이(應丁). 심술이(心術). 모진이(毛之里). 고물이(古物伊). 단지(丹之). 망난이(亡難). 꼰대(權大). 천대(千代). 심술이(心術). 조용히(從容). 똘만이(乭萬). 귀찮이(貴贊). 돌덩이(乭非). 문둥이(問同). 걸근이(訖斤). 나쁜놈이(수악(竪惡)). 물가이(勿加伊). 서운이(瑞云. 鋤云). 막내(亡乃. 莫乃. 莫同. 季生. 終大. 終伊. 莫介. 末孫). 억지(伐湯. 億之). 남자성기(延長. 衍莊. 男根. 玉經. 甘時). 점쟁이(點莊). 수청이(水淸). 사공(舍古里). 밀떡이(密德). 개장(介莊). 쌀떡(沙乙德). 북실이(北實). 차돌이(次乭). 설운이(雪雲). 개떡이(莫介德). 헐덕이(許叱德. 虛叱德). 막세(莫世). 난산이(難産. 卵山). 검불이(檢佛). 작은이(者斤). 뚱거리(斗應九里) 마구(馬廐). 불만이(佛萬). 개불알이(介佛)

 

5. 좀 낫게 지어준 여종 이름

 

보배(寶倍. 寶背). 귀생이(貴生). 유공이(有功). 부귀(富貴). 경국이(傾國). 은반이(銀盤)

예쁜이(禮分. 禮分. 於汝叱粉. 汝余分. 古溫. 古云). 福重 福德. 사랑이(思良).

애옥. 비취. 진주, 풍년이(風連). 홍장이(紅粧). 금슬이(琴瑟)

외에도 많으나 생략하고 실록 일부만 소개한다.

중종실록 10년(1515 을해 ) 12월 20일(임신) 3번째기사

충청도 태안군의 아전 이축의 아내 똥개에게 정려를 명하다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의 아전(衙前) 이축(李軸)과

아내 똥개[同叱介]는 나이가 모두 80인데, 집에 불이 났을 때에

축이 앓아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므로 그 아내가 불꽃 안으로 돌입하여

미처 나오지 못하고 함께 죽었다.

이 일이 위에 알려지매,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1. 노비란 무엇인가

노비는 노(奴)와 비(婢)가 합쳐진 말이다.

흔히 ‘노’는 남자 하인, ‘비’는 여자 하인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됐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 주나라의 정치체제를 정리한

《주례(周禮)》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주례》 〈추관사구(秋官司寇)〉 편에 ‘노’와 관련된 문장이 있다.

 

노(奴) 가운데서 남자는 죄예(罪隸)로 들이고, 여자는 용인(舂人)이나 고인(槀人)으로 들인다.

남자 범죄자는 ‘죄예’란 명의로, 여자 범죄자는 ‘용인’이나 ‘고인’이란 명의로 일을 시킨다는 의미다. 죄예·용인·고인은 국가에 예속되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관청에 속한 공노비나 관노비의 원조는 바로 이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노’를 남녀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성 범죄자만 따로 떼어내 ‘비’라 부른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이는 초기에는 ‘노’가 주로 남자였음을 의미한다.

나중에 여성의 숫자가 많아지자 이들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생긴 것이다.

 

노 자의 우변에 있는 ‘우(又)’는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을 표시하고 있다.

중국 후한(後漢) 때 나온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우는 손 수(手) 자에서 나왔다. 10세기 때 중국 학자인 서현(徐鉉)은

《설문해자》를 해설하면서 “우는 손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우 자를 포함한 노 자에는 노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노비의 기원이나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노비는 타인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존재를 지칭했다.

그 타인은 개인일 수도 있고 왕실일 수도 있고 관청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주로 왕실과 관청이 노비를 소유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타인에게 예속되어 신분적 얽매임을 받는 존재가 노비였다.

 

이 대목에서, KBS 드라마 〈추노〉에 나온 태하(오지호 분)와

대길(장혁 분)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훈련원 판관으로 소현세자의 측근이었던

태하는 세자의 죽음과 함께 노비로 추락했다가 기회를 틈타 도주했다.

거액을 약속 받고 그를 잡으러 떠난 추노꾼이 대길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이들은 ‘애증의 친구’ 사이가 되었다.

태하가 도주 과정에서 만나 결혼한 언년이(이다해 분)는 실은 대길의 옛 애인이었다.

언년이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힌 대길은 태하를 돕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애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증오를 품은 대길은 태하를 “어이! 노비”라고 부르곤 했다.

드라마 최종회에서도 대길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자, 태하는

“자네는 아직도 날 노비로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대길은 “그렇다”면서 꽤 철학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세상에 매어 있는 것들은 다 노비야.” 대길의 말처럼 노비의 본질은 ‘얽매임’이다.

남에게 구속되는 것이 노비의 본질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이란 모든 형태의 구속이 아니라 신분적 구속에 국한된다.

예컨대 국립대학 겸 행정연수원인 성균관에는 교직원들도 있고 유생들도 있고 노비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성균관에 구속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교직원이나 유생들을 성균관 노비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들의 구속은 ‘신분적’ 구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성균관에 묶여야 할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 노비들은 달랐다.

그들은 뭔 일을 하든지 성균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남의 양자가 된다고 해서 친부모와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비의 신분적 구속은 그런 천륜과도 같은 것이었다.

면천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은 천륜이었다.

 

성균관 노비들의 내력을 살펴보면, 노비의 신분적 구속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성균관 노비들이 아주 오래 전에 한 집안 노비들의 후예였다는 사실인데,

이는 윤기(尹愭)의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에서 알 수 있다.

반중잡영은 ‘성균관 내부[泮中(반중)]에 관한 갖가지 시[雜詠(잡영)]’를 뜻한다.

정조시대에 성균관 유생이었던 윤기가 지은 이 시들은 그의 유고시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에 수록되어 있다.

반중잡영 중에 “우리 동방에”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우리 동방에 안문성(安文成) 같은 분이 있어

화상을 사들이고 경전을 들여오고 학교도 세우셨네

노비 100명의 후예도 많아졌네

지금도 제단에 제사할 때는 마음과 성의를 다한다

 

‘안문성’은 문성공 안향(安珦, 1243~1306)이다.

고려에 성리학, 즉 주자학을 도입한 학자다.

‘화상’은 공자와 70제자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노비 100명’에 주목해보자. 윤기는 각각의 시에 해설을 덧붙였는데

이 시에 딸린 해설에서 “(안향이) 국학을 설치하고 노비 100구(口)를 기부했으니,

지금의 반인(伴人)은 모두 그 후손”이라고 했다.

안향이 성균관(국학)에 바친 100명의 노비가 점차 불어나서 반촌(泮村)의 주민인 ‘반인’,

즉 성균관 동네의 주민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인은 성균관 주변에 거주하면서 이곳 살림을 도맡아 처리했다.

 

윤기가 이 시를 지은 때가 18세기 후반이었으므로, 반인들은 거의 400년간이나

성균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반인들이 안향의 노비에서 성균관의 노비로, 또 고려시대의 노비에서

조선시대의 노비로 바뀐 데서 느낄 수 있듯이, 노비들은 웬만해서는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신분적 구속에 얽매어 있었다.

그 구속은, 주인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순간접착제 같은 것이었다.

노비의 구속은 종신제 구속이었다.

오늘날에는 종신제 계약이 잘 인정되지 않는다.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어느 일방에만 가혹한

종신제 계약은 설령 그 일방이 동의했더라도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노비제도는 종신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타인에게 평생 동안 얽매어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노비의 구속은 노비 본인뿐 아니라 자손에게까지 이어졌으니 노비제도는 매우 가혹한 제도였다.

중국과 비교해도 가혹했다.

중국에서는 노비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隧錄)》 〈병제(兵制)〉에서

중국 노비는 자기 대에 한해서만 복역할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

중국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다는 점은 당나라의 법전이자 동아시아

역대 법령의 모범인 《당육전(唐六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육전》 〈상서형부(尙書刑部)〉 편에서는

관노비가 70세가 되면 양인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는 노비의 세습을 불허했음을 뜻한다.

그에 비해 조선에서는 본인뿐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대대로 신분적 굴레를 씌웠으니

조선 노비제도는 매우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

노비제도가 가혹하기는 조선 이전의 왕조들도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중국 노비제도에서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지켜졌다고 볼 수만은 없다.

노비 부모를 둔 자녀는 특별한 사정변화가 없는 한,

부모의 노비주를 위해 복역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별다른 생계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부모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독립을 선언한다면, 어디서 호구지책을 마련할 것인가?

부모의 길을 따르는 게 현실적으로 유리한 경우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중국 노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들은 그런 기회마저 누리지 못하고 본인은 물론 후손까지도

얽매인 삶을 살아야 했으니, 조선 노비들만큼 불우한 신세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인수가 신발의 노비라는 것은 그가 평생 신발 가문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주인집이 자기에게 부과한 의무를 이행하며 살아야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노비의 의무를 다하는 한, 그가 책을 읽든 선비들과 교유하든

노비주 신발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인수의 가족들이

그의 몫만큼 열심히 일해서 그 결과물을 주인집에 갖다주면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인수의 가족들은 그런 수고조차 하지 않아도 되었는지 모른다.

박인수의 제자들이 갖다주는 재물을 주인집에 바치면 됐기 때문이다. 선비 박인수는 그런 의미에서 노비였던 것이다.

이제, 노비는 마당이나 쓸고 주인에게 굽실대며 툭 하면 얻어맞는 존재란 이미지를 버리자. 박인수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 노비들도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간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노비의 세계로 우리 좀더 깊이 빠져보자. 노비의 개념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평소 애매한 문제 중 하나였을 수 있는 머슴과 노비의 관계를 살펴보자. 머슴과 노비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노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보자.

 

2. 선비들의 존경을 받은 노비

 

우리가 상상하는 노비(奴婢)는 ‘마당을 쓰는 사람’, ‘주인에게 굽실대는 사람’, ‘툭 하면 얻어맞는 사람’ 정도다. 아주 틀린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이미지도 아니다. 상당 부분은 편견으로 채워진 선입견이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노비 박인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비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이 실제 사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왜냐? 박인수는 글 읽는 노비였기 때문이다. 마당을 쓸거나 주인에게 굽실대거나 툭 하면 얻어맞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노비 신분을 갖고도, 존경 받는 학자로서 활약을 펼쳤다. 박인수 혼자만 그랬던 게 아닐까? 아니다. 전문적으로 학문 활동만 하는 노비도 많았다. 박인수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박인수(朴仁壽, 1521~92)는 정2품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1)를 지낸 신발(申撥)의 노비였다. 오늘날 발행된 어떤 사전에는 박인수가 평민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전을 집필한 사람은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으니, 그는 양반 아니면 평민이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학자들 중에 노비도 있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인수는 막일을 하는 노비가 아니었다. 학식을 쌓고 선비 이상의 몸가짐을 유지한 노비였다. 조선 후기 민담집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다. 아래 글에서 “노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노비는 학문을 연구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노비들은 그런 직업밖에 가질 수 없었다는 의미다 국법상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인수는 천한 일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면서 선행을 좋아했다. 읽은 책은 《대학》 《소학》 《근사록(近思錄)》2) 같은 것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행실이 탁월했고 예법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았다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를 학문의 길로 이끈 사람은 박지화(朴枝華)란 학자였다. 박지화는 대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명종 때 당대 최고의 학자로 손꼽혔다. 박인수는 유학만 배운 게 아니었다. 한때는 불경에 심취해서 승려가 되려고 했다. 유교와 불교를 두루 공부했으니, 누구와 대화해도 막힘이 없었을 것이다. 방 안에 거문고를 두고 즐길 정도로 취미도 제법 고상했던 듯하다.

노비 주제에 그렇게 한다고 남들이 알아주기나 했을까? 비웃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그의 학문은 남들이 ‘알아줄’ 정도였다. 수많은 선비들이 그를 존경했다.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 제자들은 박인수에게 죽을 올린 뒤, 그가 다 먹은 다음에야 물러갔다. 그가 선비 중심의 사회에서 얼마나 탄탄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노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였으니 박인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노비주(奴婢主) 신발도 그를 쉽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인수가 주인집에 기거한 솔거노비였는지 아니면 주거를 따로 한 외거노비였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 노비 신분을 유지하며 공부에 전념한 것을 보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문적 명성을 쌓기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군가가 그를 위해 희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중에도 그가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외거노비의 중요한 의무는 노비주에게 정기적으로 신공(身貢), 즉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제자가 생기기 전에는 가족들이 대신해서 신공을 바쳤을 것이고, 제자가 생긴 후에는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박인수 스스로 신공을 마련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노비를 거느린 노비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시기심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박인수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다. 박인수는 주인집과 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어우야담》에서는 그가 신발의 아들인 신응구(申應榘)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박인수는 그냥 학문이 좋아서였지만, 신응구는 과거시험을 목표로 금강산에 공부하러 갔다. ‘수험생’인 아들을 노비에게 맡긴 것을 보면, 신발이 박인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인수가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인집과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박인수가 좀더 쉽게 선비 사회로 진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주인이 면천(免賤)을 시켜주지 않았다면, 일개 노비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면천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인수 같은 인물이 면천되었다면, 그 이야기도 분명히 전하겠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노비 신분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 박인수의 모습뿐이다.

선비형(型) 노비 박인수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노비가 글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노비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박인수를 떠받든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良人)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박인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노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역사적 실제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비에 관해 잘못 아는 게 많기 때문에 박인수란 존재를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노비가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를 탐구하면, 박인수가 노비 신분을 갖고 선비 사회에서 존경을 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각주

1 중추부는 1392년 건국과 함께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에서 출발한 기구였다. 중추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경호실, 국방부 등을 합쳐 놓은 기관이었다. 이 부서는 1400년에 삼군부(三軍府)로 개칭됐다가 1401년에 승추부(承樞府)로 바뀌었다. 1405년에 군정 업무가 병조로, 비서 업무가 승정원으로 이관되면서 승추부는 병조에 흡수됐다. 1432년, 경호 기능을 띤 중추원이 다시 설립되었다. 이것이 1461년 중추부로 개칭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중추부는 실권이 없었다. 정3품 이상의 고위 품계를 갖고 있지만 특별한 소임이 없는 사람을 예우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계급은 준장인데 보직이 없는 장군에게 형식상의 직책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박인수가 살던 시대의 중추부가 바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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