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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달원, 조선 보부상의 원조

칠봉인 2015. 11. 17. 20:23

백달원, 조선 보부상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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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부자는 우연히 되기도 한다.

우연히 황금을 줍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기이한 행운으로 부자의 사위

또는 후계자가 되어 부귀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다르다.

이들이 우연히 부자가 된 사람들과 크게 다른 점은

진정한 부를 위해 뜻을 세우고,

가치 있는 부를 이루기 위하여 실천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부자들 대부분은 부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부를 증식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빈민을 구제했고,

나라를 위해 재물을 기꺼이 내놓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거금을 쾌척했다.

 

이런 전통은 조선의 보부상 백달원(白達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고려 말과 조산 건국 초기의 거상으로

조선 보부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소금, 포목, 목재, 어물, 철물 등

5개 물품의 독점판매권을 얻어 막대한 부를 누렸다. 

하지만 그는 상인으로서 인인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많은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의 발자취가 자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임방(任房)을 설치해

보부상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보부상들이 음란한 행실이나

악행을 못하도록 엄격하게 경계했다.

 

물망언(勿妄言)~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물패행(勿悖行)~ 행동을 함부로 하지 마라

물음란(勿淫亂)~ 음란한 짓을 하지 마라

물도적(勿盜賊)~ 도적질을 하지 마라

 

그는 보부상들의 총책임자가 되어 보부상들에게

위의 네 글자가 새겨진 신표를 만들어주면서 늘 패용하고 다니며

경계로 삼도록 했다.

 

보부상들이 장사하러 다니면서

말을 함부로 하거나,

패악한 짓을 하거나,

음란한 짓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한 것이다.

이는 500년 동안 이어온 조선 보부상의 전통이 되었다.

 

 

백달원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황해도 토산 출신의 천민(賤民)으로 귀족인 왕씨가의 노비였다.

아내는 바로 주인집의 딸이었다.

어릴 적부터 오누이처럼 자란 둘은 남몰래 통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글을 잘 읽고 바느질을 잘해 인근에 참한 규수로 소문이 자자한 터라

개경의 유력한 부자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자

백달원은 아가씨와 함께 야반도주해 황해도와 평안도를 떠돌다

함경도 깊은 산속에서 정착했다.

 

귀하게 자란 그의 아내는 농사도 사냥도 할 줄 몰랐지만

이웃들이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공자의 인(仁)사상을 가슴 깊이 되새겼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소금을 멀리서 사와

이를 화전촌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산촌에선 소금값을 치를 돈이 없으므로

대신에 짐승 가죽이나 곡식 등을 대가로 지불했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산촌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험준한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지만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1년이 지나자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운송 수단으로 지게는 너무나도 열등했기에

모은 돈으로 나귀를 한 마리 마련했다.

이후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다.

 

하루는 그가 함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경하다가

행색이 남루한 걸인 부부를 보게 되었다. 

이들은 구걸로 연명하는 신세였는데,

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집 옆에 움막을 한 채 짓고 살게 해주었다.

 

남자의 이름은 차득보였는데,

30대 초반에 자식을 넷이나 두었지만

셋은 굶어죽고 젖먹이만 남았다고 했다.

백달원을 차득보를 데리고 다니며 장사에 나섰다.

이젠 장사 품목이 늘어나 이익이 더 많아 졌다.

이후 그는 걸인들을 휘하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장사에 대한 가치관이나 철학이 부족했던 그들이었기에

잦은 사건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그는 네 가지 원칙을 하달하고 상단을 이끌었다.

 

한번은 상단을 이끌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가죽을 사가지고 오다가

여진족과 동북면 군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마주쳤다.

 

수적으로 불리한 가운데 동북면 군사들 중에

유난히 활을 잘 쏘는 장수가 있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장수도 크게 상처를 입고 많은 시체들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이 장수를 극진히 돌보았다.

어깨의 화살을 뽑고,

창에 찔린 허벅지 상처를 치료하는데도 굳게

입을 다물고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 장수가 바로 나중에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 장군이었다.

 

 

 

당시 고려는 왜적의 침입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늘 어수선했다.

동북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연전연승을 거두는 이성계 장군의 군사들에게

백달원은 곡식, 갑옷, 말 등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이성계에게 비용 청구를 하지 않았다.

또한 물품의 공급을 요청받으면 이익을 따지지 않고 응했다.

그는 향후 이성계가 큰 일을 도모할 인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그를 불러 원하는 것을 모두 말하고 하자,

그는 "상인들이 편안하게 장사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에 이성계는 개성의 발가산에 임방을 설치하고

모든 관리의 책임을 백달원에게 맡겼다.

그리고 어물, 소금, 목물(木物, 토기, 무쇠 그릇 등

5개 품목에 대한 전매특권을 그에게 부여했다. 

이때 설치된 임방은 보부상들의 집회소가 되었고

규율을 정해 최대 민간 조직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부자가 되는 법은 크게 세 가지로

첫 번째는 과거에 급제해 고위 관리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농업을 바탕으로 대지주가 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장사로 큰 돈을 버는 것이다.

 

이 중 손쉽게 돈을 벌수 있고,

많은 부자를 탄생시킨 게 바로 장사였다.

대국인 중국의 전설적인 부자들도 대부분 상인이었다.

 

높은 관직에 올라도 나라에서 지급하는 영의정의 녹봉은

쌀 몇 가마니와 잡곡 몇 가마니에 불과하므로

이것만으로 수십 명의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뇌물을 받고, 나라의 토지를 경작하여 재산을 축적한다.

노골적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는 악덕 관리들이 무척 많았다.

 

 

 

조선의 부자들 중엔 역관(譯官)이 많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중국, 일본 등과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외국과의 통상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사신이나 역관만이 외국을 왕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신단의 일행에는 하인으로 위장한 상인들이

치열한 경쟁 하에 따라나섰다.

 

역관은 상인들의 통역을 해주거나

사신단에 끼워주는 등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

심지어 스스로 고가의 인삼을 팔고

중국 비단을 수입해서 큰 돈을 벌었다.

 

조선 사회의 지배층인 사대부는 나라에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대대로 넓혀가면서

지주로서의 부를 누렸으며 장사는 하지 않았다.

이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도 탓이었다. 

하지만 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큰 부자인 상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경유착이라는 부패의 온상이 덩달아 발생했다.

 

 

 

변승업, 조선 최고의 부자 역관

 

변승업(1623~1709년)은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중개무역을 통해

큰 돈을 축적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변응성은 중국어 역관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변응성에게서 소재를 얻었다고 전한다.

<동야휘집>에 나오는 역관 변씨의 이야기도 변응성을 다룬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은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다.

여행이 사람의 시야를 넓혀주고 자아를 성숙시킨다.

 

변응성은 역관이 된 후 중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는 의주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청나라에서 사신이 들어오면 이를 맞이하고,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신이 갈 때마다 통역관으로 수행했다.

 

그는 인삼과 비단 장사로 큰 돈을 벌었지만

장사에 실패한 상인들에게 아김없이 돈을 빌려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망설임 없이 재물을 나눠줄 정도로 호쾌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재물이란 가지고 있으면 썩는다'는 생각을 했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장사할 궁리를 하곤 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패가망신할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람에 투자함으로써

이들에게서 도움을 받아 머나 먼 안남 땅에

홍삼을 팔아 큰 돈을 손에 쥐게 된다.

그의 막내 아들이 바로 변승업인데, 이렇게 교육시켰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승업22세에 역과에 2등으로 급제해

왜어(倭語) 역관이 되었다.

그의 형들은 모두 중국어 역관이 되었기 때문에 왜어,

일본말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는 일본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려면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식량이 떨어지면 식량을 구입해주고,

의복이 필요하면 의복을 구입해주었다.

 

 

 

한번은 일본 상인이 술상을 받아 그에게 대접하며

일본의 귀한 물자를 조선의 시장에서 팔아주면

대금의 절반을 수수료로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는 기꺼이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주었다.

 

그는 객주를 이용해 중개무역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왜인과 장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직접 거래를 할 수 없으므로

은을 가져와서 조선의 면직물이나 인삼을 사갔다.

 

 

 

일본 상인 가와시마 쇼조

조선에서 수입하는 물품만으론 만족할 수 없어서

변승업에게 청나라와의 무역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그는 조정의 허락을 받아 책문에서 중개무역을 했는데,

그의 사업 파트너는 중국어 역관 장현이었다.

장현의 아우 장형은 장희빈의 아버지였다.

 

변승업은 축적한 돈으로 고리(高利),

즉 대부업에 진출했다.

당시 고리는 조선에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관혼상제가 닥치면 돈을 빌려 쓰는 일이 많았고,

빌린 돈은 가을농사가 끝난 뒤 갚았다.

나라에서도 환곡(還穀) 제도를 통해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추수한 뒤에 상환받았다.

 

부패한 관리는 이를 착취 수단으로 삼아

심하면 열 배까지 거둬들였다.

이에 그는 환곡을 무서워하는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그는 일본 전문가가 되었다.

부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왜학을 배우는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학비를 면제헤주고 식량까지 배급해주었다.

 

이후 그의 제자들도 역관으로 활약했다.

1682년엔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초청으로

일본 땅을 약 6개월 방문하는 동안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풍속을 살펴볼 수 있었다.

 

 

 

숙종시대는 권력투쟁이 치열했다.

역관 장현남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조선의 상권을 장악했다.

 

그의 동생 장형의 딸은 궁녀로 대궐에 들어간 후

숙종의 총애를 받은 장희빈이다.

숙종의 비는 인현왕후

그녀의 아버지는 서인 출신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궁중암투로 이어졌다.

 

대궐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내던 장희빈은

행실이 현숙하지 못해 인현왕후에게

매를 맞는 사건이 생긴 이후

앙심을 품고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폐비로 만들고 기어코 왕비가 되었다.

 

숙종은 서인들을 모두 숙청하고 남인 정권을 세웠다.

장희빈의 오빠이자 역관 장형의 아들인 장희재는 포도대장이 되었고,

장현도 덩달아 더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다.

상인들은 모두 장희재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대궐에선

무수리 출신의 궁녀 최씨숙종의 총애를 받더니 

장희빈을 모함하며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결국 왕의 여자들의 싸움에서 숙빈 최씨가 이겨

인현왕후가 다시 복권하고

장희빈은 다시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고

이후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이로 인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장희재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영화 <사도(思悼)>에서 아들을 뒤주에 가둔 왕 영조가

바로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이다.

 

아무튼 이런 와중에서 남인에 줄을 대던 상인들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변승업은 장현 일가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권력에 지나치게 가까우면

재앙이 미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평소 그는 서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들은 돈을 갚지 않고 오히려 그를 모함하여 의금부에서

여섯 달 동안 옥사를 치르게 만들었다.

 

그가 큰 부를 갖고 있음에도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자

권력자들의 눈 밖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가 죽자 옻칠을 한 관을 사용하는 등

막대한 장례비용을 들이자 탄핵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재산은 은(銀) 백만 냥, 현재 돈으로 약 3,000억 원에 달했다. 

 

이미 는 돈의 속성을 잘 알기에 세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대출 장부를 모조리 불태웠다고 한다.

죽기 전 회계장부에 의하면 은 50만 냥, 약 1,500억 원이었다.

 

 

 

경주 최부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참된 부는 축적과 증식, 그리고 분배까지

3요소가 갖추어져야만 한다.

 

혼자서 쌓아두는 게 아니라

분배가 잘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부가 완성되는 것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모으기만 한다면

수전노(守錢奴)가 되고 만다.

즉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인데,

바로 전충(錢蟲)(돈벌레)이라 불렸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두쇠는

조륵(趙勒)(1649~1714년)인데,

그도 말년엔 전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내놓음으로써

분배 정의를 실현한 인물이다.

 

조선 영조 때 충청도 음성군 출신으로 평범한 농부였지만

자린고비 정신으로 무장한 근검절약을 실천해 큰 부자가 된 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 가자(加資)까지 받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하면

경주 최부잣집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집안의 유래는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1568~1636년)에서 시작된다.

 

그는 신라 때 문장가 최치원의 후손으로

선조 27년에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권율 장군 휘하에서도

도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는데, 

병자호란 때 경기도 용인에서 후금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들 최동량(崔東亮)(1598~1664년)은

개령 현감과 용궁 현감을 잇달아 지내면서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다.

 

그는 월성 일대의 땅을 사서 아들 최국선(崔國璿)(1631~1681년)과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거름하는 법과 모내기하는 법을 연구해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근면, 검소, 절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수확한 쌀을 팔아 땅을 구입하고,

이 땅에서 소득을 올리는 일을 거듭하면서 큰 부를 일구었다.

최국선은 3천석을 수확하는 부자가 되었다.

 

1671년, 조선에 큰 흉년이 들어 농민들은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최국선은 쌀을 빌려간 사람들의 빚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빚을 탕감해주었다.

 

지독한 흉년 탓에 3, 4월 보릿고개가 들자 아사자가 더욱 늘어났다.

이에 그는 곳간의 쌀 1,000석을 방출해 이웃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죽을 때가 되자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해마다 소작으로 받은 쌀 3분의 1은

반드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 쓰라"

 

 

 

 

경주 최부자의 가훈家訓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하지 마라

재산을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씨가의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라

  

영남 제일의 부자 가문은 어느덧 200년이란 세월이 흘러

11대 최현식에 이르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나라 곳곳에서 민란이 자주 발생했다.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도 부자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지만 최부잣집만은

이웃 농민들과 걸인들이 제 발로 몰려와

이 집을 지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2대 최준(崔浚)(1884~1970년)의 시대는 일제강점기였다.

때는 고종 시기로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월성을 떠나 한양, 평양, 인천 등지를 두루 돌아본 후

고향으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개화하지 않는 조선이 서서히 망하고 있음을 느꼈다.

청일전쟁 후 국모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실시되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는 의병들을 돕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1010년 한일합병으로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조선인들의 토지를 수탈하기 시작했다.

 

최부잣집도 토지를 절반 이상 빼앗겼다.

이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재산을 쓸 때라고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백산상회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했다.

 

해방이 되자 나라는 좌우대립이 심해지고,

대구에선 좌익폭동까지 일어났지만 농민들의 도움으로

좌익의 습격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시대는 바뀌었다.

이제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부유하게 살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모든 재산을 대구대학에 기증을 했다.

이 대학은 현재의 영남대학으로 발전하여

경상도 지역 최고의 학문 요람이 되었다. 

 

●부자에겐 사회적 책임이 있다

 

부자가 되려면

소비자가 있고,

생산자가 있고, 판매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부자들은 고용인을 많이 거느리기 때문에 공인이 된다. 

이들이 없다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부를 축적하고 증식하게 되었으니

다시 이를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것이다.

 

흉년이 들어 아사자가 늘어갈 때

이들을 구제한 제주 부자 김만덕,

거상 임상옥,

경주 최부자 등

조선의 대표적인 16인의 부자들은 '축적, 증식, 분배'라는

부자의 3요소를 실천한 진정한 부자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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