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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록 보유 (己卯錄補遺卷上) 해제

칠봉인 2017. 6. 12. 21:12

기묘록 보유 (己卯錄補遺卷上) 해제  1

 

기묘록(己卯錄)은 본래 기묘사화 때에 같이 화를 입었던 모재(慕齋) 김정국(金正國)이 편찬 한 것이고 뒤에 김육(金堉)이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에 간행하였다.

내용은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서부터 중종 14년(1519)에 이르는 사화(士禍)에 화를 입었던 여러 선비의 행적을 열기한 것으로 귀천을 막론하고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을 수록했다. 보유는 기묘명현의 한사람인 안당의 종손자 안노(安璐)가 기록을 보완하여 원문 뒤에 보유와 추록을 하였다. 수록된 인물 수는 127명으로 조선 전기 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벗님들 께서는 제가 그간에 보내드린 인물자료와 더불어 읽어보시기를 삼가 권하는 바이다.



임진년 9월 醉松軒에서 鶴泉 쓰다.



참고로 본문에 빠진 생몰년과 본관 자. 호를 내가 추기하고

별도로 주기하지 않은 것은()에 주를 달았다. 원문을 부기하였다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정광필 전(鄭光弼傳)

1462년(세조 8)∼1538년(중종 33)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의 아들이다.



정광필은 동래(東萊)가 본관(本貫)이고 임오생(壬午生)이며 자(字)는 사훈(士勛)이다. 임자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그해에 급제하였다.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파를 두둔한다 하여 정승직에서 파면되었다. 정해년에 다시 정승이 되었다가, 계사년에 파면되었다. 기묘년 가을에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이 3공(三公)을 논란한 소장(疏章)에, “정광필이 굉후 화평(宏厚和平)한 도량이 있어서 젊어서부터 공보(公輔) 자격이라는 촉망을 받았다. 성희안(成希顔)이 당시 인재를 꼽으면서 정광필을 첫째로 정승 자리에 천거하였다. 정모(鄭某)가 암랑(岩廊 조정)에 있게 되면서 인심에 영합하도록 힘쓰고 습속과 같이 하기를 좋아하여서, 개연(慨然)히 옛 시대의 다스림으로 회복하려는 뜻이 없었다. 능히 자의대로 분발하여서 전하를 광명정대한 경지(境地)로 인도하지 못하고, 또 과격한 언론을 억제하기만 힘쓴다.” 하였다.

음애일록(陰崖日錄) : 계유년 4월 15일 함경도 관찰사 정광필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정광필은 기국(器局)이 있고 응접(應接)을 잘하였다. 말과 용모는 상냥하고 아름다우나 한계[畦畛]가 매우 엄하였다. 영의정 성희안이 일찍이 그의 도량에 탄복하면서, “정광필 같은 사람은 소리 없을 때에 듣고, 형체가 나타나기 전에 본다고 할 수 있다.” 하면서, 공경하기를 신명같이 하였었는데, 이때에 와서 힘껏 천거하였다. 감사(監司)에서 품계를 올려 찬성(贊成)이 되고, 찬성에서 정승으로 된 것은 모두 성희안의 힘이었다. 3공에 궐원(闕員)이 있었는데,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영사(領事) 김응기(金應箕)가 정승이 되기를 촉망하였다. 임금이 재추(宰樞)에게 정승 뽑는 일을 물었는데, 성희안이 팔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김응기 같은 사람 천 명으로 신용개(申用漑) 한 사람과 바꿀 수 없고, 신용개 같은 사람 천 명으로 정광필 한 사람과 바꿀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정승을 선택하려면 당연히 정광필을 첫째로 할 것이며, 신용개를 다음으로 할 것입니다. 김응기는 비록 정(精)한 금과 아름다운 옥같다 하더라도, 국가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를 당하면 능히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벼슬이 이미 추부(樞府)에 있어 국정을 간여하니, 꼭 대사(臺司 의정부)에 올라야만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는데, 실상 김응기가 정승 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송질(宋軼)이 김응기를 천거했고, 유순(柳洵)은 김응기를 천거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성희안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함께 정광필을 천거하였던 까닭으로, 정광필이 정승으로 뽑혔다. 문대공(文戴公) 김응기는 갑술년에 정승으로 들어왔고, 병자년에 문경공(文景公) 신용개도 정승으로 들어왔다. 무인년 봄에, 문대공은 논핵을 받아 사직되었고, 기묘년 겨울에는 문경공이 별세하여 문익공(文翼公)이 북문(北門)의 화변(禍變)을 혼자 당하였다. 벼락 같은 위엄을 범하면서 부월(斧鉞)로 다스리려는 것을 늦추어 사류(士類)가 어육이 될 뻔한 화를 공의 힘으로 면하였으니, 성희안의 말이 징험되었다.

척언(摭言) :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초립을 쓰고 굵은 베옷 차림인 미복(微服)에 해어진 짚신을 신고 정승 정광필의 문간에 와서 문지기에게, “급히 안에 들어가 객이 왔다고만 고하라.” 하였다. 문지기는 남곤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므로 남 판서인 줄 알고, 들어가서 고하기를, “문간에 손님이 왔는데, 용모를 보니 남 판서였습니다. 다만 의관이 초초(草草)하여 천한 사람 같았습니다.” 하였다. 정 정승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기며 바삐 나가보니 남공(南公)이었다. 괴이쩍게 여기며, “공이 어찌 이런 꼴을 하였소.” 하니, 지정이 그렇게 된 것을 말하고, 이어, “이런 무리가 한 사람이라도 남으면 장차 화가 무궁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오늘 반드시 공을 불러서 의논할 것이니, 공은 전하의 뜻을 억지로라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무리는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국세(國勢)가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많은 후회가 있을 터이니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면서, 혹 급한 말로써 겁나게 하고, 혹 달콤한 말로써 유혹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정 정승이 정색하면서,”공은 재상인데, 천한 복색으로 저잣거리를 지나왔으니, 이것만으로도 크게 놀라운 일이요, 사림을 모해(謀害)하는 것은 본디 나의 뜻이 아닌즉, 어찌 이런 짓을 차마 하겠소.” 하니, 남곤은 크게 성내어 옷을 털면서 가버렸다. 얼마 안 되어서 소명(召命)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입시하니, 지정이 이미 그 일을 찬성하여, 일망타진할 계책으로 뜰에는 벌써 형구(刑具)를 갖추어 놓았다. 정 정승이 중지하도록 간하면서 눈물이 양쪽 뺨에 흘러 옷소매가 다 젖었다. 이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귀양가는 것으로 그쳤다. 드디어 지정에게 미움을 받아 즉시 재상직에서 파면되었다.

관물필기(觀物筆記) : 남곤은 기묘년에 여러 어진 선비들을 모함하려고 남 서방(南書房)이라 사칭하면서 백의 차림으로 걸어서 수상(首相)의 집에 갔고, 윤원형(尹元衡)이 을사년에 명현들을 무함할 때에 윤 생원(尹生員)이라 호칭을 바꾸고서 미복으로 밤에 순붕(順朋)의 집에 모였으니, 소인들의 간사한 정상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방법이었다.

보유 : 11월 15일 밤 3경에, 소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니, 입대(入對)하라고 재촉하는 명이 내렸다. 곧 홍경주(洪景舟)ㆍ김전(金銓)이 함께 임금의 하교를 받고,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극간(極諫)하기를, “연소한 유생이 당시의 사정을 모르고 망령되이 옛 치도(治道)를 원인(援引)하여 오늘에 시행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어찌 딴뜻이 있었겠습니까. 잠깐이나마 너그러이 용서하여서 그들의 죄를 3공과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말끝마다 눈물이 떨어져 옷자락이 다 젖었다. 임금이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므로, 공이 나아가 임금의 옷자락을 잡고 머리를 땅에 대니, 눈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이에 조광조(趙光祖)들을 조옥(詔獄)하도록 명하게 되었으며, 또 우의정 안당(安瑭)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그때에 좌의정은 차출하지 않았다. 빈청(賓廳)에 나와서 다시 계하기를, “이 사람들을 어찌 다 죄를 주겠습니까. 승지도 제 본뜻이 아니었으니, 정론(正論)을 따르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이자(李耔)는 후일 국가에 크게 쓰일 사람이니, 다만 파직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또 조광조 등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한갓 옛사람의 글만 보고 지극한 다스림을 보고자 하여, 그 동안에 혹 과격한 일이 있었으나 심각하게 치죄할 것은 아닙니다. 바야흐로 성대(聖代)인데 만약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이 있으면, 반드시 사책(史策)을 더럽힐 것입니다. 금부(禁府)를 시켜 추문(推問)하여, 혹 죄줄 것인지 아닌지 경중을 분간하여 정탈(定奪 계하여 결재를 받음)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다시 조정 백관을 모아 함께 논의하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참의(參議) 이상 많은 관원과 함께 합사(合辭)하여 신구(伸救 변명하여 구원함)하였으나, 그래도 죄를 면하지 못한 자가 8명이었다. 김전에게 명하여 추문하니, 즉시 추문된 조광조ㆍ김정(金淨)ㆍ김구(金絿)ㆍ김식(金湜)은 모두 사율(死律)로써 정하도록 명하였다. 마침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대궐 뜰에서 울부짖고 여항의 향약(鄕約) 무리는 궐문에서 상소하는 일이 있었는데, 도리어 임금을 두렵게 하여 동요하도록 하였다는 떠도는 말을 사실처럼 만들었다. 임금이 더욱 성내어서 조광조와 김정에게 사사(賜死)하라는 명을 내렸다.

공이 급히 면대(面對)하기를 청하여, 말이 매우 간절하니 드디어 사형은 면하고 장류(杖流 형장을 때린 다음 귀양보냄)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다시 계하기를, “이 사람들이 만약 장형을 받으면 반드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가벼운 율을 청합니다.” 하는 등 일곱 번이나 계하였으나, 임금의 허락은 막연하였다. 우상이 탄핵을 받자 공도 사직하면서, “조정에 인심이 엇갈리고 사기가 꺾였으니, 신 같은 늙고 병든 것이 어찌 정승 자리에 합당하겠습니까. 인심을 능히 진정할 만한 사람을 다시 가려서 빈 자리를 충수하소서.” 하며, 물러나기를 간구하였다. 생원 황계옥(黃季沃)이 공을 논박하여 소장을 올리기를, “정모가 수상 자리에 있었으니 정사를 어지럽힌 대부를 벌하는 것이 그 직분이거늘 벼락 같은 위엄을 범해서 부월로 벌하는 것을 늦추었으니, 원수(元首 임금)의 근심을 구원하지 아니하고 이마 데인 공만을 도모하여 취하려는 자입니다. 저런 정승을 장차 어디에 쓸 것입니까.” 하였으나, 공은 개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중한 책임을 벗기만 희망하였다. 대사헌 이항(李沆), 대사간 이빈(李蘋) 등이 전일 귀양보낸 8명에게 죄를 추가하기를 논란하고, 또 35명을 기록해 올리면서 아울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공이 불가하다고 극단으로 간하였는데, 대간(臺諫)이 계하기를, “대신은 마땅히 국사(國事)를 총람(總攬)하여서 군중의 마음을 진정시킬 때인데, 옳고 그름을 판정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서서 형세만 관망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거둥하여 정부(政府)에 영방(迎訪 맞아서 물어보는 일)하려 하니, 대간이 아뢰기를, “소인이 조정에 그들먹하여서 종사(宗社)에 크게 관계되므로, 대신은 진실로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여서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웃집의 일처럼 보니 이것이 어찌 대신의 체통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공은 영중추(領中樞)로 좌천되었다. 김전을 영의정으로 삼았고, 찬성(贊成) 남곤, 참찬(參贊) 이유청(李惟淸)을 좌우 정승으로 삼았는데, 남곤이 죽은 뒤 정해년에 공이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다. 공이 일찍이 희릉 총호사(禧陵摠護使)를 지냈는데, 계사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아서 재궁(梓宮) 터를 황극처(皇極處)에 잡았다는 핑계로 공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김해부(金海府)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공이 역려(逆旅 여관)에서 율시 한 수를 지어 기행(記行)하기를,



비방이 산처럼 쌓였지만 마침내 용서를 받았다 / 積謗如山竟見原

천은을 보답할 길이 이승에는 없어라 / 此生無路答天恩

열 번이나 가파른 잿마루에 올라 두 줄기 눈물 흘리고 / 十登峻嶺雙垂淚

세 차례나 긴 강을 건너니 홀로 넋이 끊어진다 / 三渡長江獨斷魂

아득히 높은 산엔 구름이 먹물을 끼얹은 듯 / 漠漠高山雲潑墨

커다란 들판에는 비가 동이로 퍼붓는 듯하다 / 茫茫大野雨翻盆

저물녘에 바닷가 동쪽 성 밖에 투숙하니 / 暮投臨海東城外

초옥은 쓸쓸한데 대나무로 문 삼았네 / 草屋蕭蕭竹作門 하였다.

정유년에 김안로가 죄를 받은 다음 영중추로 소환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 손자 정유인(鄭惟仁)ㆍ정유길(鄭惟吉)과 증손자 정지연(鄭芝衍)ㆍ정창연(鄭昌衍)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여, 혹은 태정(台鼎 정승)에 올랐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논의하였는데, “모(某)는 풍골(風骨)이 뛰어났고 마음이 넓으며, 겉으로는 온화하면서 안으로는 굳세었다. 폐주(廢主) 때에 화(禍) 일으킬 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어서 의연히 막으려 하였고, 중흥한 뒤에 두 번이나 균축(鈞軸 행정)의 우두머리로서 초연하게 난국을 홀로 맡았다. 일에 앞서 꾀하고 기미를 알아 조심하였다. 안전하고 위태한 기틀과 그름과 바름을 분별함에 우뚝히 세찬 물결에 돌기둥[砥柱]과 같은 힘이 있으니, 사람들이 옛 재상의 풍도가 있다고 일컬었다. 전에 무함을 받아 백 가지로 낭패를 당했으나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사면되어 서울에 돌아오던 날에는 도성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 얹으면서 기쁘게 맞이하고 경사로 알았다. 비록 한가한 지위에 있었으나 조야에서 다시 정승 되기를 희망하였으니, 그 덕망이 남을 복종하도록 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시법(諡法)을 상고하건대, 충(忠)과 신(信)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은 문(文)이고, 사려가 깊어서 앞날을 내다보는 것을 익(翼)이라 한다. 하여, 시호를 문익공(文翼公)이라고 하사하였다.

문익공 정사훈(鄭士勛)은 근대에 이름난 정승이다. 중묘조(中廟朝)에 이숙(李叔 김안로)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공은 영남으로 귀양가고, 정승 이택지(頤擇之 이행(李荇))는 관서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숙이 두 분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정 의사를 살피건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일찍 자결하느니만 못하오.” 하였다. 택지는 근심이 되어 술을 한없이 마시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나, 공은 웃으면서, “조정에서 노신(老臣)을 죄 있다 하여 당장이라도 죽인다면, 나라 법에 복종하여 한 사람을 다스림으로써 백 사람을 징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죽고 사는 데에는 명이 있는 것인데, 저 이숙이 어찌 나를 죽이랴.” 하면서,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에 이숙이 망하고 공에게는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소명이 내렸다. 서울에 있던 아이종이 조보(朝報)를 가지고 배소(配所)를 향해 밤낮으로 와서 밤중에 도착하였다.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서 넘어져 말을 못 하였다. 공의 자제가 급히 아이종의 주머니를 뒤져보니 좋은 소식이 있었다. 공에게 아뢰니, 공은, “그런가.” 할 뿐, 이내 코를 우레같이 골면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그 글을 보았다. 한다. 《병신록(丙申錄)》






 



안당 전(安瑭傳)

1461년(세조 7)∼1521년(중종 16).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영모당(永慕堂). 서울 출신.



안당은 신사생(辛巳生)이고 자(字)는 언보(彦寶)이다.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고, 신축년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기묘년에 파직되어 집에 있었다. 얼마 안 되어서,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임금 곁에 있는 소인들을 숙청하려고 난을 꾸미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역(大逆)으로 논죄되었는데, 연좌(緣坐)되어서 죄를 입었다.

기묘년 가을에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이 3공을 논란한 소장에, “안모는 마음가짐이 진중(珍重)하고 일 처리하는 데에 밝으나, 스승이나 벗에게 깨우쳐 얻은 것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능히 허심으로 국론을 받아들이지 못 하였다. 정부(政府)에 들어온 뒤에는 이조에 있을 때보다 명망이 줄었다.” 하였다.

보유 : 폐주(廢主: 연산군)가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간원(諫院)을 오랫동안 혁파하였다. 반정(反正)하던 날, 특히 공에게 대사간을 시킨 것은 그가 강직하므로 황폐한 정사를 능히 구제하리라는 것이었다. 굽은 것을 탄핵하여 바른 데로 돌려서 묵은 폐단이 말끔히 가셨다. 네 번이나 대사헌을 맡아서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원통하게 막힌 것을 파헤치고 씻었다. 이조(吏曹)를 맡아서는 분경(奔競: 청탁)하는 버릇을 통렬하게 개혁하였다. 재상들이 편지로 요청하는 따위를 일체 따르지 아니하고, 재능을 요량(料量)하여 관직을 주면서 품자(品資)에 얽매이지 않았다. 무릇 효행으로 공천된 사람은 행실을 표제(標題)하여서 주의(注擬)하였다. 또 건의하기를, “경술(經術)에 밝고 의를 행하는 선비를 만약 자급(資級)에 따라 으레 일명(一命)으로 조용(調用)한다면 선비를 장려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명망 있는 선비로 조정암(趙靜庵) 같은 여러 분을 특히 6품직에 제수하고, 또 김모재(金慕齋)ㆍ김충암(金冲庵), 참판 송흠(宋欽), 판서 반석평(潘碩枰)도 차례를 밟지 않고 뽑아 쓰기를 청하였는데, 이분들은 후일에 모두 이름난 재상이었다. 또, 구언(求言)하면서 국사(國事)에 대해 말한 사람을 죄주어서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불가하다고 힘껏 아뢰었다. 임금은 법 밖의 것을 건의한다는 것으로써 꾸짖고, 대간(臺諫)은 국사를 그르쳤다는 것으로 탄핵하고, 재상들은 자기들의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꺼렸으나, 공은 안연히 동요되지 아니하여서 유속(流俗)을 격동해 밝히고 사기(士氣)를 떨쳐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을해년 이후에 이상(二相) 이장곤(李長坤)과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이 잇달아 이조를 맡아서 기묘년의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때에 명현들이 임금의 총애를 입고 문치(文治)를 협찬하고 예법을 밝혀서 거의 성대한 대도(大道)를 이룰 뻔하였으나, 새로 등용된 여러 현신이 과감히 행하는 데에 용감하여서 과격하고 조속히 이루려는 병통이 없지 않았다. 공이 태부(台府 의정부)에 오른 뒤에 문익공과 함께 대체(大體)를 지켜서 과격한 언론을 억제하고 인심을 진정하며, 조금이라도 조화시켜서 영구하기를 도모하였다. 대간이 3공의 성품과 행실을 두루 들면서 우물쭈물 그저 세속을 따른다고 기롱하므로, 공이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또 그 아들 3형제가 천과(薦科)에 합격하여서 모두 청현(淸顯)한 벼슬을 하게 되자, 복이 너무 성함을 경계하고 당시의 정세를 살펴서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부인이 갑자기 죽은 뒤에도 공은 억지로 벼슬에 나갈 뿐이었다. 11월 15일 밤 5경에 의정부 서리(胥吏)가 와서, “3경에 영의정이 소명(召命)을 받들고 예궐(詣闕)하였고 지금 소명이 있습니다.” 하자, 공이 놀라서 달려갔는데, 밤이 아직 깊지 않았다. 영의정 문익공이 빈청(賓廳)에 홀로 앉았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문익공이 눈물을 뿌리고 고개를 저으면서 차마 말을 못하는데, 좌우에서 병기(兵器)를 전(殿) 뜨락에 벌여 놓았음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이어 문익공과 함께 조정 백관을 모아서 죄를 논의하기를 힘껏 청하고 반복해서 논계하였다. 이에 임금이 참의(參議) 이상이 모여서 의논하도록 명하니, 드디어 많은 관원을 거느리고 함께 계(啓)해서 신구(伸救)하였다. 19일에 김전이 정승이 되었으므로 공은 예(例)에 따라 좌의정으로 승진하니, 대개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를 대신한 것이었다. 12월에 대간이 집정한 자와 함께 명류(名流)에게 죄를 주고자 하여 35명을 기록해 올리고 아울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는데, 공을 첫째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을 다 귀양보낼 것 같으면 인심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고, 남곤(南袞)ㆍ이유청(李惟淸)에게 3등급으로 나누어서 표를 달도록 명하였다. 공은 면직하는 것만으로 그쳤는데, 신사년 가을에 심정(沈貞)이 집의(執義) 윤지형(尹止衡)을 부추겨서 관직을 삭탈당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당시 재상에게 저촉되었다는 말이 있으므로, 공이 놀라서 땅에 넘어지기까지 하였다. 곧 상달(上達)하고자 하다가, 말뿐이고 실상은 없는 일을 가지고 틈이 벌어져 다시 사화라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에 돌아가서 제대로 가라앉고 탈없이 하려던 것이었는데, 친하고 믿던 자가 좌우에서 입을 놀리고, 칼을 든 자가 눈을 부릅뜨고 기다릴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공은 평소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녹봉 외에는 저축한 것이 없었고, 벼슬이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나 청렴과 검소함이 더욱 드러났다. 부인은 장사지낼 적에도 조처할 길이 없어 남에게 빌려서 장사를 치르니,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오직 국사와 공도(公道)만을 생각하였으므로,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큰 화(禍)에 빠졌으니, 아 슬프다. 공이 일찍이 호서를 안찰(按察)할 때에 시를 짓기를,



고삐를 잡고서 징청하기를 생각하는 것, 내 어찌 감히 하랴 / 攬轡澄淸吾豈敢

다만 충과 의를 행할 뿐, 자신을 위한 꾀는 하지 않으리 / 只將忠義不謀身

하였으니, 말이 지극하다 할 수 있다. 공이 죽은 뒤 46년 만인 병인년에 공의 손자 안구(安玖)가 글을 올리기를, “무릇 고변(告變)하는 사람은 중한 상을 바라는 것이므로 반드시 큰 죄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사련(宋祀連)이 고한 것은 다만 대신을 해치기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즉 반역하려는 무리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지나치게 중한 죄를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때 죄를 받았던 사람은 이미 중묘조(中廟朝)에 모두 수서(收敍)하심을 입었는데, 오직 신의 조부만이 신설(伸雪)함을 얻지 못함은 진실로 구천(九泉)에서도 원통함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명묘조(明廟朝)께서 특히 불쌍하게 여겨서 직첩을 돌려주었다. 금상(今上) 만력(萬曆) 을해년에 태상(太常)에서 논의하기를, “안모(安某)는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곧으며, 일 처리 하는 것이 굳세고 과감하였다. 외모는 씩씩하였으나 내심은 온화하였다. 정의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집에 거처하는 것은 검소하였다. 마음을 다하여 봉공(奉公)하였고, 어진 인재를 뽑아서 기묘년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성대한 기회를 열었고, 간사한 논의를 힘껏 배척하여 충성스럽고 착한 신하가 억울하게 무함 받은 옥사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권세를 잡고 있던 간사한 무리가 감정을 품고 옥사를 억지로 만들어, 두 아들이 함께 극형을 당하였고 자신도 면하지 못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시법(諡法)을 상고하건대, “곧은 도로써 흔들리지 않음을 정(貞)이라 하고,

국사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민(愍)이라 한다.” 하여,

정민공(貞愍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최숙생 전(崔淑生傳)

1457년(세조 3)∼1520년(중종 15). 본관은 경주(慶州).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子眞). 호는 충재(忠齋). 유량(有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저(渚)이고, 아버지는 철중(鐵重)이며, 어머니는 이계손(李繼孫)의 딸이다.



최숙생은 정축생(丁丑生)이고 자(字)는 자진(子眞)이다. 임자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으나, 폐출당한 뒤에 죽었다. 스스로 호(號)를 앙재(盎齋)라 하였다.

보유 : 정축ㆍ무인년 사이에 대사헌이 되어, 도성 안에 거주하는 무녀들에게 모두 나가서 동ㆍ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모이도록 하였다. 성 남쪽의 이사(尼舍)를 철거하고 불상을 허물어서, 중들이 도성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규제를 넘은 사대부 집은 철저히 찾아 죄를 다스리고 간살을 철거하여서,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키면서 조금도 아부하지 아니하니, 조정과 저잣거리가 삼가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기묘년 12월에, 공이 이자(李耔) 등 12명과 함께 관작을 삭탈 당했고 다음해 경진년에 집에서 죽었으며, 스스로 호를 앙재라고 하였다. 아들 최경홍(崔景弘)이 문과에 올랐다.










 



이장곤 전(李長坤傳)

1474년(성종 5)∼1519년(중종 14)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 신지(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호겸(好謙)이고, 아버지는 참군(參軍) 승언(承彦)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장곤은 갑오생이고 자(字)는 희강(希剛)이다. 을묘년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임술년에 급제하여서, 벼슬이 우찬성 겸 병조판서에 이르렀는데 파직되었다.

보유 : 공은 스스로 호(號)를 금재(琴齋)라 하였다. 용모가 뛰어났으며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서 젊어서부터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일컬었다. 연산조(燕山朝)에 홍문관 교리로서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 연산은 항상 공이 어지러운 정사를 뒤엎을 뜻이 있는가 의심하였고, 공은 또 죄를 더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몸을 빼쳐 바다를 건너 도망쳤다. 쥐처럼 숨고 새처럼 달아나서 마침내 함경도 지경에 이르렀다. 잡는 데에 상(賞)마저 걸어서 나날이 위급해지니 계책이 없어서 수척(水尺 백정)들에게 의탁하였다. 동류들은 공이 자기들의 직업에 능하지 못함을 비웃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공의 용모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 형에게 권해서 딸로서 공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무릇 노역(勞役)할 때는 반드시 게으른 사위라고 일컬었는데, 그 아내가 노역을 돕고 분담하여 잘 섬겼다. 이 덕분에 편하게 있은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임금이 새로 들어섰는데, 옥문을 열어 죄수를 놓아 보내고 여러 가지 노역도 철폐하였으므로 즐거워하는 소리가 길에 잇닿았다.” 하였는데, 공이 듣고 낯빛이 변하였다.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던 자에게 의관을 빌려 차리고 그 사람과 함께 부중(府中)에 갔다. 반정(反正)한 비밀을 분명히 안 다음에 작은 종이 쪽지를 그 사람에게 주면서, “지금 감사(監司)의 하인을 보니 내가 젊었을 때 알던 자이다. 이것을 남에게 보이지 말고 조심해서 주라.” 하였다. 조금 뒤에 관인(官人)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이 교리(李校理)를 찾았으나 알 수 없었다. 온 부중이 소란하였으나, 또한 명함을 통지한 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 하였다. 공이 베옷과 부서진 갓을 쓴 차림으로 문간 옆에 웅크리고 있다가 그제야 응했다. 감사와 여러 관원이 급히 맞이하고는 손을 잡고 울었다. 각자 의관을 주어 고쳐 꾸미니 모습이 전혀 새로워졌다. 조정에서도 공이 살아 있는 것을 알고 특별히 홍문관 교리를 제수하고, 현재 있는 고을에서 호송하도록 하였다. 이때문에 공의 명성이 온 나라에 드높아져서 궁벽한 시골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호걸스럽고 청렴하여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고, 외방에 나가서는 장수로서, 조정에 들어와서는 정승으로서 그 직에 다 알맞았다. 기묘년 11월에 병조 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는데,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다. 남곤(南袞)이 공이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세 차례나 찾아가서 명함을 두고 가버렸다. 15일 저녁에, 남곤이 급한 편지를 보내어,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말을 달려 들어오라.” 하였다. 공은 항상 초거(軺車)를 탔는데, 매우 급하므로 어찌할 수 없어서 성 안에서 말을 빌려서 안장과 말을 이대(李對)로부터 빌려 판전(板前) 큰길에 나와서 기다리게 하였다. 남곤의 집에 달려가니, 남곤이, “판서 홍경주(洪景舟)가 비밀 교지를 받고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왕명을 기다린다.” 하였다. 보통 때는 궐문 여닫는 것을 승지에게 알리는 까닭으로, 문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출납하는데, 오직 신무문 열쇠는 사약방(司鑰房)에 있는 까닭에 남곤ㆍ심정(沈貞) 등이 승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신무문으로 갔던 것이다. 여러 재상이 궐문에 나아가서 가만히 계하니, 임금이 홍문관ㆍ승정원에 입직한 사람을 가두도록 명한 뒤에 서문(西門)을 열게 하여 이조 낭청(吏曹郞廳) 구수복(具壽福)이 비로소 서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초에 정원 서리(胥吏)들이 한갓 서문 여닫는 것만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 정원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특히 가만히 새어들어 왔다는 것으로써 윤 승지에게 알렸고 응교(應敎) 기준(奇遵)이 《일기》에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경주가 남곤ㆍ김전(金銓)과 더불어 어전에서 그 일에 대해서 저희들끼리 시비하면서 북문으로 들어왔다 하였으니, 초경(初更)에 입궐한 것은 신무문으로 들어온 것이 의심할 것이 없다.《시정기(時政記)》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순(沈思順)이 찬술한 것이니, 믿을 것이 못된다. 공이 남곤과 함께 홍경주를 따라 들어가니, 겸 공조판서 김전ㆍ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이 이미 입궐하였고 도총관(都摠管) 심정ㆍ참지 성운(成雲)은 각기 입직했던 곳에서 왔다. 합문[閤] 바깥 남소(南所)에 촛불을 벌여 놓고 앉았는데, 위졸(衛卒)들이 전(殿) 뜨락에 에워서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임금에게 출어(出御)하기를 청하고, 또 내고(內庫)에 있는 병기를 전 뜨락에 벌여 놓도록 하였다. 홍경주가 남곤과 함께 차자(箚子)를 받들고 입대(入對)하였는데, 그 글에, “정광필(鄭光弼)ㆍ홍경주ㆍ김전ㆍ남곤ㆍ이장곤(李長坤)ㆍ고형산ㆍ홍숙(洪淑)ㆍ심정ㆍ손주(孫澍)ㆍ방유녕(方有寧)ㆍ윤희인(尹希仁)ㆍ김근사(金謹思)ㆍ성운들은 엎드려 보건대, 조광조(趙光祖) 등이 서로 당패를 만들어서, 자기 패에 아부하는 자는 인진(引進)하고 자기 패와 다른 자는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를 서로 돕고 권세 있는 요직에 웅거하여 임금을 속이고 사의(私意)를 행하여 꺼림이 없습니다. 후진을 유인하여 속이고 과격한 것이 습속이 되어서 젊은 사람이 어른을 업신여기고 천한 사람이 귀한 이를 업신여겨서, 나라 형세가 거꾸로 되고 조정 정사가 나날이 글러지게 하였습니다. 조정에 있는 자가 속으로는 분한을 품었으나,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 행동하며 발을 모아 섭니다.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한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유사(有司)에게 하부(下付)하여, 그들의 죄를 밝혀 바루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또 속히 승정원과 홍문관에 입직한 관원을 가두도록 청하였다. 이때야 비로소 승정원에서 알고 승지ㆍ주서ㆍ한림이 합문에 나왔다. 승지 윤자임(尹自任)이 문앞에 나와서, “재상이 입궐하면서 정원에 알리지 않은 것이 과연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으나, 좌우 사람들은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지 못했다. 잠깐 뒤에 내시(內侍) 신순강(申順剛)이 성운을 불러 들어가므로, 주서 안정(安挺)이 뒤쫓아가니, 신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금단하였다. 조금 있다가 성운이 나와서 소매 안에서 종이 쪽지를 내어 공에게 주면서, “이 사람들을 빨리 옥에 가두시오.” 하는데, 승지 공서린(孔瑞麟)ㆍ윤자임ㆍ주서 안정ㆍ검열(檢閱) 이구(李構)ㆍ응교 기준(奇遵)ㆍ수찬(修撰) 심달원(沈達源)을 조옥(詔獄)에 가두라는 명이었다. 이때에 와서 궐문이 비로소 열렸고, 비밀리 계사(啓辭)에 이름이 기록된 여러 신하도 모두 예궐하였다. 특명으로써 남곤을 이조 판서로, 김근사ㆍ성운을 가승지(假承旨)로 삼고, 김근사가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 심사순(沈思順)을 패초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다. 또 승정원ㆍ홍문관ㆍ양사(兩司) 및 한림을 모두 갈아치우고, 다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입대하였던 여러 사람이 모두 두렵고 놀라운 일로써 임금을 크게 놀라게 하고, 이어 속히 선전관(宣傳官)ㆍ금오랑(金吾郞)을 부장(部將)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당패 사람들을 잡아 궐문에 와서 주살(誅殺)하도록 주청하였다. 공이 비로소 이 밤에 이 사람들을 쳐서 죽이려는 모략을 알고 깜짝 놀라 나아가서 계하기를, “임금으로서 도둑과 같은 꾀를 행할 수 없고 또 수상(首相)도 모르게 국가 대사를 행할 수 없으니, 대신과 함께 논의해서 죄를 다스리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하면서, 반복하여 극간하였다. 홍경주가 무엇을 계하려고 움직이는 기색이 있으니, 공이 문득 손을 저어 물리치면서, “공이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오.” 하며, 앉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여 간계 부리려는 것을 막았다. 임금의 화가 조금 누그러져서 영의정 정광필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이 때문에 일이 느긋하게 되었다. 영상이 추국(推鞫)해서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남곤ㆍ심정ㆍ김전과 공이 함께 죄목에 대한 전지초(傳旨草)를 논의하는 참에 남곤이 핑계를 대고 나가 버렸는데, 밤 누수(漏水)는 4경이었다. 날이 밝자, 임금이 두 번이나 이조 판서 남곤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두 의정(議政)에게 명하여 대간ㆍ시종ㆍ예조 판서ㆍ형조 

판서ㆍ양사 장관을 차출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특지였다. 공이 김전 및 대간ㆍ승지와 함께 조광조 등을 추문(推問)하여 시추(時推 당시에 추문함)한 조광조 등 4명을 사율(死律)로 정하고, 박세희(朴世熹) 등 4명을 장류(杖流 형장으로 때린 다음 유배함)하여서 종으로 삼도록 하였다. 임금이 그 장본(狀本)을 보류하고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는데, 유생들이 궐정(闕庭)에서 통곡하고, 약도(約徒)는 궐문에서 소장을 올렸다. 이런 일들이 도리어 임금을 협박하였다는 말을 사실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으므로, 임금이 조광조와 김정(金淨)에게 사사(賜死)하면서 김근사에게 판부하도록 명하였다. 김근사가 사관(史官)의 붓을 빼앗고, 용기를 내어 적었다. 봉교(奉敎) 채세영(祭世英)이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적극 간하고, 김근사가 빼앗아 간 붓을 도로 빼앗으니 좌우가 숙연(肅然)하였다. 영상과 우상이 면대하기를 청해 적극 간하니, 사율을 감해서 장배(杖配)하도록 명이 내렸다. 공은 시일이 얼마 안 되어서 금부를 사직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전일 조광조 등을 추문할 때에 공이 금부 당상으로 있으면서 죄인이 성명을 자(字)로 부르는 것을 금하지 않아서, 능만(凌慢)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파직하도록 청하였다. 창녕(昌寧)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살림이 넉넉하였다. 악공(樂工)과 가희(歌姬)를 두고 술과 고기를 풍부하게 갖추어서 날마다 놀이하며 매와 개를 부려서 사냥하는 것을 일삼았다. 편하고 한가롭게 세상을 마쳤으니 일생 부귀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적가(嫡家)에 자녀가 없어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후세에 전하지 못하게 되었음이 한스러우니, 한탄을 금할 수 있으랴.



병진년과 정사년은 어찌 할 수 없는 해 / 丙辰丁巳奈何天

배권(주1)을 통곡한 지 20년이네 / 痛哭杯棬二十年

황각(의정부)(주2)에 2공이 되었음은 선조가 적선한 덕이었고 / 黃閣貳公由積善

흰 머리로 세 번이나 파출되었음은 많은 허물을 저질렀던 탓이다 / 白頭三黜坐多愆

송추는 막막하게 무덤을 에웠고 / 松楸漠漠圍雙壟

지척이건만 망망하게 구천(황천)을 격했다 / 咫尺茫茫隔九泉

전(奠) 드리기를 마치니 해가 서산에 저무는데 / 奠罷□□山日暮

아우와 형이 동문 앞에서 눈물 뿌린다 / 弟兄揮淚洞門前

하였다. 이 시는 공이 성묘하고서 느낌이 있어 지은 것이다.



[주1]배권 : 어머니가 사용하던 잔과 광우리를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차마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어머니를 사별(死別)했다는 뜻으로도 쓰임.《禮記》〈玉藻篇〉

[주2]황각 : 한(漢) 나라 승상의 청사(廳事). 궁궐 문을 주색(朱色)으로 칠했으므로 승상의 처소는 황색으로 칠해서 분별되게 하였다 함.







 




김안국 전(金安國傳)

1478년(성종 9)∼1543년(중종 38). .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김안국은 무술생(戊戌生)이며 자(字)는 국경(國卿)이다. 신유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였고 계해년에 급제하였으며, 정묘년에 중시(重試)하였다.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고, 정유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호(號)는 모재(慕齋)이다.

보유 : 겨우 성동(成童 15세)일 적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넓게 통했다.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개연(慨然)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고, 그 조예(造詣 목표)하는 바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사모하는 것이었다. 신유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두 둘째였다. 석갈(釋褐 대과에 급제함)하여 주서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 뒤에 일본에서 시를 잘하는 중인 붕중(弸中)이 사신으로 왔으므로, 공이 선위사(宣慰使)로 충수되었다. 예대(禮待)하는 데에 사체(事體)를 알았고, 시가(詩歌)를 주고받는 것이 넉넉하고 민첩하였다. 붕중이 시상(詩想)이 고갈되어서 적수가 못되므로 억지 운(韻)을 시험함으로써 곤란을 주고자 하여, 《주역(周易)》을 읽는다는 것으로 시제(詩題)를 하고 운자를 염(鹽 소금)ㆍ첨(尖 뾰족)ㆍ겸(鎌 낫)을 부르는 것이었다. 공은 운자 부르는 소리에 응대하기를,



대갱(자연적으로 된 음식)에는 원래부터 시고 짠것은 타지 않으며 / 大羹元不和梅鹽

지극한 도는 붓이나 혀의 뾰족한 것으로 형용하기 어렵네 / 至道難形筆舌尖

고요한 속에서 사그러지고 늘어나는 이치를 잠자코 보는바 / 靜裏黙觀消長理

달이 둥글 때는 거울 같더니 또 낫과 같이 되네 / 月圓如鏡又如鎌

하니, 글자가 혹 빠진 데도 있다. 붕중이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였다. 정축년에 영남을 안찰(按察)하면서 효자 및 학행(學行) 있는 사람을 방문하여 그 집에 가기도 하고 음식을 보내 주기도 하며, 뛰어난 자는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이륜행실록언해(二倫行實錄諺解)》와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편찬 간행하고, 여염(閭閻)에 반포하면서 풍속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기묘년에 조정에 들어와서 우참찬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는데, 특지로써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하면서, “앞서 경상도에 있을 때에 공적이 현저하였으므로 백성을 위해 경을 뽑아서 제수한다.” 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교화를 성취시킬 조목을 생각하였는데, 전보다 주밀하고 상세하였다.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되니 이천(利川)의 주동(注洞) 집에 물러가 살다가 따로 작은 집을 지어서 은일재(恩逸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날마다 여러 학생과 강학(講學)하니, 학도가 점점 많아졌다. 당시 논의가 중한 견벌(譴罰)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주(驪州)의 천녕(川寧)에 옮겨 살면서 물가에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내려다보면 아득하고 넓다란 것이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뜬 것 같으므로 정자 이름을 범사(泛槎)라 하였다. 또 선현(先賢)이 우의(寓意)하였던 물(物)을 취해 여덟 가지를 읊조리고, 당(堂) 이름을 팔이(八怡)라 하였다. 날마다 지팡이를 끌고 거닐며 읊조리면서 장차 이런 생활로써 명을 마치려 뜻한 것이 19년이었다. 정유년에 권력을 잡았던 흉한(凶漢) 김안로(金安老) 등이 죄를 받은 후에 비로소 조정에 돌아왔다. 기해년에 화사(華使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와서 조서(詔書)를 반포할 때에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사신이 공과 전중 단아(典重端雅)함을 탄복하였다. 드디어 찬성에 임명되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무릇 사대(事大)하는 표문(表文)ㆍ전문(戔文)은 모두 그의 솜씨에서 나왔고, 비록 병이 위독하여도 딴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계묘년 정월에 병세가 이미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국사(國事)를 문의하니 일어나 대하지는 못하고 다만, “성은(聖恩)이 지중(至重)하다.” 하였다. 말을 마치자 죽었는데, 온 조정 관원이 곡림(哭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가르침을 받았던 선비는 비록 직위가 근시(近侍)인 자도 모두 변복(變服)하여 자제(子弟)의 예(禮)를 행하였고, 태학(太學) 여러 학생도 모두 조문치전(弔問致奠)하였으며, 성문 밖까지 나가서 관구(棺樞)를 전송하였다. 뒤에 인종(仁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저술한 《모재집(慕齋集)》이 세상에 행한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기를, “넓게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일어나서 하는 일에 공손한 것을 경(敬)이라 한다.” 하여서,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모재가 여흥(驪興)에 있을 때 범사정 춘첩(春帖 입춘에 써 붙이는 것)에,



정자 밑 긴 강은 한강 나루에 닿았고 / 亭下長江接漢津

동녘 바람에 얼음 풀리니 푸르고 맑다 / 東風新泮綠粼粼

성심스런 마음 조종할 것 이루지 못하고 / 丹心未逐朝宗去

멀리서 풍신(궁전)을 향해 만년의 봄을 축수한다 / 遙向楓宸祝萬春

하였다. 재상으로서 산림에서 편하고 한가로이 맑은 복을 누린 것이 무릇 18년이었다. 정유년 봄에 사환(賜環)하라는 명이 있었다. 또 새로운 첩자(帖子)를 지어서 아이에게 주어 벽에 붙이도록 하기를,



은일정에서 보낸 세월 19년이었는데 / 恩逸亭中十九

여생에 다시 중신을 뵈올 줄 어찌 뜻했으리 / 餘生何意覲中宸

나아갈 때나 물러갈 때나 홍은이 뼈에 사무치니 / 鴻私進退皆淪骨

요(堯)의 시대에 정성스러이 축수하는 성대(聖代)의 백성이어라 / 堯日誠深祝聖民

하였으니, 공과 같은 분은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임금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자 전(李耔傳)

1480년(성종 11)∼1533년(중종 28).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이자는 경자생이고 자(字)는 차야(次野)이다. 신유년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갑자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은 우참찬에 이르렀다.

자신이 지은 《음애일록(陰崖日錄)》에, “소릉(昭陵 현덕왕후(顯德王后))이 현릉(顯陵 문종(文宗))의 배위(配位)로 동궁에 있을 때에 덕의가 아울러 지극하였으므로 영릉(英陵 세종(世宗))께서 크게 자애하였다. 나이 24세였던 정통(正統) 신유년에 노산군(魯山君)을 낳고 난산(難産)으로 말미암아 병이 되어 7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광묘(光廟)가 즉위하자, 노산은 왕위를 양보하고 영월(寧越)로 옮겨갔다. 병자년에 현릉의 신하였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愷) 등이 비(妃)의 아우 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노산군을 복위하기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비의 아우는 죽임을 당했고 비는 폐함을 당했다. 정축년에는 정부(政府)에서 계청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소릉을 파헤쳐 재궁(梓宮)을 끄집어 내어서 3, 4일을 한 데에 두었다가 옮겨 묻었다. 태묘에 부(祔)하였던 신주를 내쳐서 현릉만 태묘에서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여, 신(神)과 백성을 분하게 한 것이 50여 년이었다. 정덕(正德) 임신년에 조정에서 소릉을 복위하기를 청하였고, 대간ㆍ시종과 유생까지도 말하였으나 해가 넘도록 윤허를 받지 못 하였다. 진신(縉紳)들은 혹 화(禍)를 두려워해서 형세만 관망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유종룡(柳從龍)종룡은 유운(柳雲)의 자이다. 그때에 대간으로 있었다. 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번에는 멀리 강상(江上)에까지 수고하셨는데, 정지(情地)가 창황하여서 회사(回謝)할 겨를을 얻지 못 하였네. 이번에는 가속(家屬)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그대가 큰일을 담당하여 조석으로 복합(伏閤)한다는 말을 들었네. 이 일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이었으니, 오늘날 그대에게 기대하는 것이 한량이 없네. 대저 개혁하는 것을 꺼리고 망설이기를 좋아하는 것은 세속을 따르는 소견일세. 또 선왕에 대하여 중난(重難)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고칠 수 없는 예(禮)라고 하여, 고루하게 잘못을 따르면서 그 사이에서 의(義)를 주창하게 되니, 정당한 논의가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고 간사한 말로써 감히 속이는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지금은 전하께서 옛 치도(治道)로 회복하려는 기풍이 있고 그대들이 과감하게 말하는 반열에 있으며, 재상으로서 정당한 논의를 하는 자는 모두 명망이 있는 자일세. 만약에 또 용렬한 논의에 저지되어서 큰 예를 바루지 못하고 잘못된 전고(典故)를 버리지 못하여 하늘에 계신 현릉의 영령이 배우 없음을 깊이 근심하고 소릉의 혼이 한없는 원통함을 품으면, 충신과 의사(義士)의 눈은 지하에서 장차 어느 때에나 감게 되겠는가. 설날과 삼복(三伏)과 납일(臘日)에 우의(牛醫)나 마의(馬醫) 같은 천한 무리의 귀신도 모두 배필의 즐거움을 갖추고 자손이 봉제(奉祭)하는 것을 누리는 것을 볼 수 있거늘, 종묘에 제향하고 자손을 보전하며 아름다운 청묘(淸墓)에 예의가 숙옹(肅雍 엄숙하고 화한 모양)하고 현관(顯官 직위가 높은 관원)이 제향을 돕는데, 현릉 홀로 배필 없는 제사를 어찌 흠향하시겠는가. 하물며 종묘에 고하는 일은 큰 효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본디 어렵게 여길 것이 아니건마는, 논의하는 자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 무슨 마음인가. 부모가 허물이 있으면 기(氣)를 화하게 하고 안색을 즐겁게 하여 간하여, 비록 회초리로 때려서 피가 흐르더라도 공경과 효도로써 그 어버이의 허물을 반드시 없앤 뒤에라야 그만두는 것이 마땅한 것일세. 까닭에 조(祖)와 부(父)가 허물이 있으면 그 한 일을 뒤엎는 것이 허물을 덮는 것이네. 그런데 지금은 허물 덮은 것을 가리켜서 들춰내는 것이라 하면서 이르기를, 선조의 한 바가 이미 이와 같으면 자손 된 자는 오히려 덮어 숨겨서 그것을 도와 이루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한다고 하니, 아,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기도 하외다. 일에 나타난 것과 숨은 것이 있고, 이치에도 가벼운 것과 중한 것이 있는데, 지금에 들춰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이며 돕고 숨기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인가. 선조를 더럽히고 효도를 해치면서 스스로 예에 맞다 하니, 공손하지 못함이 심하외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자와 뜻이 화합한 것은 금슬(琴瑟)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는 듯하고, 형제간이 이미 화합하니 즐겁기도 하다.’ 하였고, 공자께서는, ‘부모의 교령(敎令)을 행하게 하여 실가(實家)를 순하게 한다.’ 하였으며, 속담에는, ‘한 지아비라도 모퉁이를 향해 돌아앉으면 당(堂)에 가득한 사람들이 즐기지 못한다.’ 하였소. 이러하니 태묘 제향날에만 특히 현릉이 배필 없음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영릉(英陵) 이상은 안순한 즐김을 잃을 것이며, 광릉(光陵) 이하는 당에 가득한 슬픔을 품을 것이오. 명분과 예의를 모두 잃게 되고 사전(祀典)에도 상고할 데가 없어 온 나라의 제사에 정성과 효도를 다하지 못하게 되니, 가령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앎이 있으면 반드시 지난 일을 후회하여 오늘날 소릉의 복위를 바란 지 오래였을 것이며 고유(告由)하는 말도 진실로 즐겁게 들을 터인데 무엇이 중난하다고 하여 반드시 변명을 하는 것인가. 들으니 진신들도 쥐가 구멍에서 나갈까 말까하는 것처럼 의심하고 요리조리 살피며, 화를 겁내어 진언하기를 꺼리는 자가 있다 하는데, 족하(足下)는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가. 복(僕 나)은 근래에 큰 화를 만나 죽을 뻔한 것이 여러차례였는데 의가 아닌 데에 죽을까 두려워하였소. 그러나 만약 큰일을 당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록 나같이 불초한 사람이라도 또한 원하는 바 아니외다.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에 있고, 사람의 화와 복은 운수에 있는 것이오. 족하는 마음과 힘을 다해서 운수를 기다리고 하늘을 섬기시오. 나는 처참한 가운데 있는 몸이고 또 일을 도모하지 않는 무리에 처해 있으니 도의상 세상일을 말하는 것이 부당하오마는, 다만 족하와는 평소의 친분이 있으므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함이니, 족하는 재량하기 바라오.” 하였다. 임신년 섣달 열흘날, 공이 부친상을 당하여 담제(禫祭)를 지낸 뒤였다. 계유년 2월 18일에 종묘 동산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임금이 놀라서 종묘에 친제(親祭)하고 소릉을 복위하도록 명하였다. 4월 17일에 소릉 옛 무덤을 헤치고 재궁을 새것으로 고쳐 쓰고, 현릉 왼편 언덕에 새 터를 잡았다. 홍문관 교리 신(臣) 이자(李耔)가 만사(挽詞)하기를,



해를 부여잡고 황도에 오르고 / 扶日升黃道

구름을 타니 일이 다르다 / 乘雲事異宜

이치는 마땅히 지극한 데에 돌아가고 / 理當歸有極

하늘은 마땅히 사심 없이 비치리라 / 天合照無私

종묘에 새로운 경사를 벌였고 / 宗廟開新慶

건곤이 옛 의전을 정했다 / 乾坤定舊儀

미천한 신하는 소장을 모시고 / 微臣陪素仗

눈물 섞어 애사를 씁니다 / 和淚寫哀詞 하였다.

5월 6일에 다시 현릉왕후를 태묘에 부(祔)하면서 처음 예제(禮制)와 꼭 같이 하니, 제향에 참석한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자는 불행히 과거에 일찍 합격하여 폐조(廢朝)를 섬기면서 억지로 벼슬을 지냈다. 부모를 편하게 봉양하기 위해서 외방에 나가 문소(聞韶 의성)의 원이 되었는데, 하늘과 해가 다시 밝아 서정(庶政)을 개혁하는 첫머리에 시종으로 부르셨다. 어색한 행동으로 문득 미친 말을 늘어놓았으나, 여러 차례 장려해 주었다. 10년 동안 드나들면서 감격스럽게도 성은을 받들어 높은 벼슬에 발탁하시었으므로, 당시 동년배가 이미 옆눈으로 보았고 자신이 보기에도 겸연쩍었다.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국(報國)하기를 생각하였으나 배운 것이 경력과 근거가 없었고, 성품이 더욱 완둔(頑鈍)하였는데, 겸하여 갑자기 일어나니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았다. 인재를 추천하고 선비들을 좋아하여 처하는 데에 일정함이 없었으므로, 점차 뜻하지 않은 화가 되었는데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시골집에서 죄를 기다리게 하시었다. 그때 사류(士流)들이 모두 좌천되었거나 귀향갔고, 조효직(孝直 조광조(趙光祖)의 자) 공은 임금의 명으로 죽음을 받았다. 아, 이 사람이 죽은 뒤에 어찌 할 말이 없으랴마는, 정암집(靜庵集)을 보라. 아, 옳고 그름이 비록 한때는 혼돈했더라도, 정상(情狀)은 후일에 다 드러나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운운하랴. 이자 같은 자는 신하로서 무상(無狀)하여서 허물이 쌓이고 헐뜯음이 만단(萬端)이었으나, 오히려 입을 벌려서 먹이는 것을 기다리고 사람을 향해 웃고 말하니, 어찌 완악한 하나의 추물(醜物)이 아니리오. 내가 조공(趙公)과 가장 친근했고, 또 생사를 같이 하려는 자라고 남들이 알았다. 이제 거의 죽게 되었는데, 나의 자손은 내가 조공과 사귄 정이 유명(幽明)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지 못할까 두렵다. 까닭에 경인년 섣달 그믐날 밤, 취한 김에 붓가는 대로 적는다.” 하였다.

보유 : 공은 겨우 14세 적에 송(宋) 나라 역사를 읽다가 개연히 분노하여 만언서(萬言書)를 짓고 스스로 바치고자 하였는데, 부친 대간공(大諫公)이 경계하며 말렸다. 대간공이 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고 외방으로 나가서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는데, 공도 이조 좌랑으로서 편양(便養)하기를 청해서 문소 의성이다. 의 원이 되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그 방법을 다 알맞게 하여 갈려간 뒤에도 그의 공덕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묘(中廟)가 즉위하자, 뽑혀서 옥당(玉堂)에 들어와 시종이 되었으며, 정축년에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무인년에 조정에서 변무(辨誣)하기 위해서 주청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공에게 특별히 품질(品秩)을 올리고 부사(副使)로 임명되어서 경사(京師)에 갔다. 상사(上使)였던 남곤(南袞)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書狀官) 한충(韓忠)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돌아온 뒤에 계자(階資)를 뛰어 한성 판윤(漢城判尹) 겸 지경연(知經筵)에 임명되니, 곧 기묘년 봄이었다.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잇달아 참찬으로 이배(移拜)되었다. 그때 나라에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고 또 어지러운 정사를 겪었으므로, 여러 현신이 함께 다스리면서 정교(政敎)를 경장(更張)하고 시위(尸位 하는 일 없이 관직에 있는 것)를 탄핵하니 인심이 크게 엇갈렸다. 공이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ㆍ조 문정공ㆍ충정공(忠貞公) 권벌(權橃)이 둘 사이를 조화시켜서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한두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여서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북문(北門 신무문(神武門)의 화(禍)가 일어나서, 조정암(趙靜庵)ㆍ김충암(金冲菴) 제공(諸公)과 같이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대신이 구원하여 최후에 석방되었는데, 남곤이 연경(燕京)에서 병구완 받은 것을 잊지 않은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12월에 최 이상(崔二相 최숙생(崔淑生))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음성(陰城) 고을의 음애(陰崖)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음애라고 호(號)를 지었다. 좌우에는 오직 도서뿐이어서 정신을 집중하고 눈길을 모아서 집안 사람도 그의 안면을 볼 때가 드물었고, 비록 양식이 여러 번 떨어졌으나 태연하였다. 간혹 샘물을 못에 끌어들이고 떼풀을 베어서 정자를 지었다.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려서 흥을 풀고, 술이 생기면 양껏 마셔서 가슴속의 뇌락(磊落)한 심사를 돋구었으며, 흥이 나면 붓가는 대로 회포를 적어서 시름을 달랬다. 기축년에 충주의 토계(兎溪)로 이사하니, 곧 달천(㺚川) 상류이다. 구름 낀 산이 깊고 그윽하여 인가가 절로 드물었다. 정자를 지어 이름을 몽암(夢庵)이라 하고, 이를 따라 호도 몽옹(夢翁)이라 하고, 또 계옹(溪翁)이라고도 하였다. 이탄수(李灘叟)와는 배를 타고 서로 방문하였는데, 항상 서로 심방하였으므로 물고기와 새들도 놀라지 않았다. 이때에 송계(松溪)의 수령이었던 중숙(仲叔)이 이항(李沆)과 한마을에 살면서 잘 사귀었는데, 송계가 그의 형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의 사건으로 연좌되어서 선산(善山)에 정배되었다. 경인년에 석방되어서 돌아올 참인데 마침 이항이 찬성(贊成)이 되어 개령(開寧)의 선산(선조의 무덤)에 분황(焚黃)하였다. 송계와 공도 같은 배로 서울에 올라오니, 대개 송계가 거문고를 잘 타므로 배 위에서 서로 즐기고자 한 것이었다. 이항이 뱃길에서 음애를 맞이하니, 음애가 배를 저어와 먼저 송계가 석방되어 돌아옴을 위로하고 이어 이항에게, “그대도 신사년 사람을 반역했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항이, “그 사람들의 언사를 들으니 크게 원망하는 무리로다.” 하였다. 음애가 이르기를, “어허, 그대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어찌 분해하는 말에 성내어서 억울하게 뜻밖의 죄를 더하는가. 안처겸(安處謙)은 의협(義俠)한 무리일 뿐이오.” 하니, 온 좌중이 두려워하였다. 그 뒤 며칠 안 되어서 몽암에서 죽었다. 죽은 뒤 6년 만에 중묘께서 기묘년 일을 크게 깨달아서 당시 사화에 관련되었던 사람을 모두 다시 서용하였다. 만력(萬曆) 정축년에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계하기를, “죽은 참찬 이자(李耔)는 기묘년의 명신(名臣)으로서 폐출되어서 명을 마쳤습니다. 그의 충직한 행실이 민몰되어서 알 수 없게 됨은 진실로 애석합니다. 명호(名號)를 바꾸도록 하여 장래 사류를 장려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임금이 윤허하였다. 〈행장(行狀)〉에는 대략, “천분(天分)이 매우 높았으며, 외모도 아름다웠고 마음이 넓고 컸다. 심주(心柱)가 넓고 두터웠으며 도량이 넓고 밝았다. 사람을 접할 때는 온화하면서 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간략하게 하고 근실하게 하였다. 제향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벼슬에 임해서는 씩씩하였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질서가 엄하였다.” 하였다. 또, “평소에는 담연(淡然)히 세상일을 잊은 듯하였으나, 조정 정사가 잘못됨을 들으면 여러 날 탄식하였다. 사람을 가르치다가, 진동(陳東)을 죽인 대목에 이르면 두어 줄을 읽지 못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 하였다. 슬픈 빛이 얼굴에 가득하고 눈물이 눈썹에 잇닿으니, 배우던 자들이 가만히 보다가 놀라서 물러갔다.” 하였다. 또, “공의 학문은 쇄소 응대(洒掃應對)를 계제(階梯)로 삼고, 신(神)을 궁구하고 조화를 아는 것을 귀취(歸就)로 삼았다. 수양하는 데에 도가 있고, 체(體)와 용(用)을 구비하였다. 다만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경솔하게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빈말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직 실천하는 데 착실하기를 힘썼다. 만년에는 진실이 쌓이고 학력(學力)이 오래되매 인의(仁義)가 정숙(精熟)하여서 동정 어묵(動靜語黙) 어느 것이나 예에 맞았다.” 하였다. 또, “당시 만사(挽詞)로 심언광(沈彦光)의 글에,



영묘(소년)한 시절의 높은 심회가 노성과 견주었는데 / 英妙高懷擬老成

한 세상을 경장할 때에 일찍이 놀랍기도 하였다 / 更張一世曾□驚

애오라지 시례로써 초복을 이루었으나 / 聊將詩禮成初服

경륜한 것이 반생을 그르칠 줄 어찌 뜻했으리 / 豈意經綸誤半生

쓰임과 버려짐은 천운이니 기뻐하거나 성낼 것이 없고 / 用舍任天無喜慍

슬픔과 편함은 처지에 따라 쇠고와 영화가 있었다 / 慘舒隨地有枯榮

궁ㆍ통ㆍ달ㆍ절이 심상한 일인 듯 / 窮通達節尋常事

10년 동안 임천에 아직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 十載林泉尙領名

하였다. 이 만사가 비록 도가 있는 자의 기상을 형용할 줄은 몰랐다 하겠으나, 또한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서 전해진다. 외아들 이추(李秋)는 아들이 없었고, 일찍 죽었다. 문인(門人)인 소재(蘇齋)가 지었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였는데, “학문이 넓고 도덕이 있음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일어나며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 하여,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정 전(金淨傳)

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峰). 보은 출신. 부친은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다.



김정(金淨)은 병오생이고 자(字)는 원충(元冲)이며 갑자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정묘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호는 충암(冲菴)이다. 제주(濟州)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척언 : 제학(提學) 김정이 당화(黨禍)에 연좌되어서 제주에 장류(杖流 형장 때려서 유배함)되었는데, 해남(海南)의 바닷가에 와서 길섶 소나무 밑에 쉬면서 절구(絶句) 3수를 짓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희게 한 다음 거기에다 적기를,



모진 더위를 먹어서 죽는 백성을 덮어 주려고 / 欲庇炎程暍死民

멀리 바위 구렁을 하직하고 긴 몸뚱이를 굽혔구나 / 遠辭岩壑屈長身

마을 도끼는 날마다 찾아오고, 장사하는 나그네는 불질러 태우는데 / 村斧日尋商火煮

그 공로를 알아주는 사람, 요즘 정사와 같아 아무도 없어라 / 知功如政亦無人 하고,

또,



바닷 바람이 부니 슬픈 소리 멀리 들리고 / 海風吹去悲聲遠

산에 걸린 달 외로이 비치니 파리한 그림자 엉성하여라 / 山月孤來瘦影疎

곧은 뿌리가 땅 속까지 박혔음을 힘입어 / 賴有直根泉下到

눈ㆍ서리 같은 사나움도 자세를 말끔히 없애지는 못한다 / 雪霜標格未全除 하고,

또,



가지는 꺾이고 잎은 헝클어져 내려와 / 枝條摧折葉鬖髿

도끼는 남은 몸뚱이를 모래 위에 눕히려 하네 / 斤斧餘身欲臥沙

기둥이 되기를 바랐으나 자신을 한탄하고 / 望絶棟樑嗟己矣

비쭉이 나온 가지는 바다 신선의 뗏목이 될 만하구나 / 査牙堪作海仙槎

하였는데, 사림(士林)이 전해 외우면서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유 : 처음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정언ㆍ수찬ㆍ병조 좌랑ㆍ헌납ㆍ이조 정랑을 지냈고,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고을의 원이 되기를 청해서 순창(淳昌)에 보임되었다. 을해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의논하기를, “장경왕후(章敬王后)께서 빈천(賓天)하여 곤위(坤位)가 오래 비었는데, 원자(元子)는 강보(襁褓) 중에 있다. 만약 성묘조(成廟朝) 고사(故事)를 따라 후궁을 올려 정궁으로 삼는다면, 그 소생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귀하게 된 자의 본 심성이다. 하물며 지금 숙의(淑儀)는 모두 아들이 있으니, 원자의 처지는 더욱 곤란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씨(愼氏)를 복위하는 것만 못하다. 허물도 없이 폐출당한 원통함을 펴고, 첩으로서 아내를 삼지 말라는 의리를 밝힘은 옛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고, 곁자리에서 엿봄을 막는 것이다.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이 천운과 인화가 합치한 기회를 타서 힘을 쓰고, 그 공을 자부하여 군부(君父)를 겁박하고 국모를 추방하여 천하의 큰 분의(分義)를 범하였으니, 이는 만세의 죄인이다. 이제 비록 죽었으나 그 죄를 밝히고 바르게 하며 관작을 뒤미처 삭탈하고 중외에 효유(曉諭)하여서, 당세(當世)와 만세에 큰 분의는 자른 듯 분명하여 범할 수 없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면, 인륜의 근본과 왕화(王化)의 근원과 정시(正始)하는 도리가 맑고 빛나서 천지가 깜깜했다가 다시 활짝 개어 산골짜기가 드러나는 듯할 것이다. 이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받들었으니, 잠자코 반정(反正)의 기회를 잃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합사(合辭)하여 소장을 올렸다. 이에 대사간 이행(李荇)이 간사한 논의라고 지목하고, 조정에서 주창하기를, “장경왕후가 원자를 탄생하여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정해졌다. 만약 신씨를 다시 세웠다가 왕자를 낳는 경사가 생겼을 때 가례(嘉禮)의 선후를 따진다면, 신씨가 먼저인 만큼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하고, 대사헌 권민수(權敏手)가 맞장구를 치니, 양사(兩司)가 쏠려서 추국하기를 합동 계청하였다. 육조 당상과 의정부ㆍ홍문관에 명해서 전수(專數)대로 의견을 수합(收合)하도록 하니, 모두 이르기를, 구언하는 교지를 받들고 올린 소장인데 말이 비록 적당하지 못하더라도 죄를 주어 언로를 막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오직 대간만은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힘껏 청해서, 이윽고 조옥에 갇히게 되었다. 사건이 측량할 수 없게 되었는데, 대신이 구원하여서 보은(報恩)의 함림역(含琳驛)에 도배(徒配)되었다. 이때부터 조정 논의가 대립되어서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다. 병자년 여름에 비로소 공의 말이 옳다 하며, 대간과 시종이 교장(交章 교대로 소장을 올림)하여서 석방하기를 청했다. 드디어 사(赦)를 받고 영동(嶺東)에 와서 유람하였다. 이해 겨울에 속리산(俗離山) 도솔암(兜率庵)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는데, 12월에 조정의 계청으로 인해서 사예(司藝)로 임명되었고, 정축년 가을에 발탁되어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 공이 모친을 뵙느라 시골에 있다가 임명된 것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농사에 힘써서 모친을 봉양하고 여가에 경전을 연구하고 근본을 배양하여, 후일에 나라를 위해 일할 바탕으로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때에 정암 조광조가 임금과 신하들에게 한창 신뢰를 받았는데, 서로 협력하여 다스림을 도우려는 뜻으로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나오기를 힘껏 권하였다. 공이 드디어 마지못해 나왔는데 수년 동안에 특별히 임금의 돌봄을 입었다. 기묘년 여름에는 갑자기 형조 판서에 승진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을 겸하게 되었다. 공이 정성을 다해 사퇴하면서, “젖내나는 아이가 6경의 임무를 맡는다면 심히 조정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촉망은 비록 높았으나 공은 영화가 넘치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사실은 영직(榮職)을 사퇴하고 한직에 물러나 학문에 침잠하여 도덕이 성취되어 우리 임금의 기대하는 뜻에 부응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권애(眷愛)가 한창 융숭하여서 힘껏 사퇴하여도 허락하는 명을 얻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교화를 일으키며, 사공(事功)을 떨쳐 일으키는 데에 힘쓰지 않는 것이 없었고, 군자와 소인이 나오고 물러나게 되는 기미에는 더욱이나 주의하였다.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 데에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고 장황하기만 하면서 진보한 것이 없었으며, 속히 하고자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 하였다. 또 경솔하고 예민한 자끼리 투합하여 부추겨서 시끄러움을 일으키니, 나이 많은 신하로서 당시 논의에 용납되지 못해 배척당한 자는 원한이 골수에 박혀서 이를 갈며 입을 씰룩거렸다. 심정(沈貞)ㆍ남곤(南袞)이 홍경주(洪景舟)와 화기(禍機)를 얽어 대내(大內 임금)를 겁나게 한 뒤에, 홍경주가 언서(諺書)를 받아 비밀 교지라고 하면서 배척당했던 재상을 가만히 부추겼다. 11월 15일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기를 청한 다음 김전(金銓)ㆍ고형산(高荊山)을 꾀어서 오게 하고 이장곤(李長坤)을 협박해 불렀다. 어둠을 타 잠입하여 작은 편지로 몰래 아뢰었는데, 이것은 〈이장곤전(李長坤傳)〉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밤중에 공이 우참찬 이자(李耔)ㆍ대사헌 조광조ㆍ부제학 김구(金絿)ㆍ대사성 김식(金湜)ㆍ도승지 유인숙(柳仁淑)ㆍ좌부승지 홍언필(洪彦弼)ㆍ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ㆍ동부승지 박훈(朴薰)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우승지 윤자임(尹自任)ㆍ응교 기준(奇遵)ㆍ수찬 심달원(沈達源)ㆍ주서 안정(安挺)ㆍ검열 이구(李構)는 벌써 옥에 갇혀 있었다. 제공(諸公)이 모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 하며, 함께 술을 마시고 영결(永訣)하였다. 이날 밤에 하늘에는 구름이 없고 달빛만이 뜰에 가득하였다. 공이 시를 짓기를,



황천에 돌아가는 이 밤 / 重泉此夜長歸客

공연히 밝은 달이 머물러 인간을 비춘다 / 空留明月照人間

하였고, 대유 김구의 자이다.는 고시(古故詩) 체로 읊조리기를,



뼈를 흰구름 속에 묻으면 그만인 것을 / 埋骨白雲長已矣

공연히 흐르는 물을 남겨두어 인간을 향하게 한다 / 空餘流水向人間  하였고

또,



장천 달 밝은 밤에 / 明月長天夜 하니,

공이 화답하기를,



이별을 애석해하는 추운 겨울이어라 / 嚴冬惜別時 하였다.

이렇듯 모두 조용하게 마음 편해하였는데, 밤이 밝자 유인숙ㆍ공서린(孔瑞麟)ㆍ홍언필은 석방한다는 명이 있었고, 조금 있다가 또 심달원ㆍ안정ㆍ이구를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 제공이 서로 이르기를, “차야(次野)는 반드시 면하게 될 것이다.” 하니, 차야가 슬피 울었다. 차야는 이자의 자인데, 최후에 석방되었다. 정암이 통곡하면서, “우리 임금을 뵙고 싶다.” 하였다. 제공이 서로 권면하면서, “조용하게 취의(就義)함이 마땅하오. 울어서는 무엇하겠소.” 하였다. 서로 술을 권하며 한껏 마셨는데, 정암이, “조용하게 취의하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소마는 다만 우리 임금을 다시 뵈올 수 없음이 한스럽소. 만약 우리 임금을 뵈옵게 된다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소.” 하면서, 갇힐 때부터 밤새도록 통곡하던 것을 이튿날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제공이 옥중에서 의복을 찢어서 거기에다 소장을 써서 올리기를, “신들은 모두 미치고 어리석은 자질로서, 성명(聖明)을 만나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경광(耿光 임금의 위의)에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임금은 장차 성군이 되리라는 것만 믿고 충정을 다했습니다. 뭇사람의 뜻을 거슬렸으나 다만 임금 있는 줄만 알았을 뿐, 딴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임금이 요순 같은 착한 임금이 되기를 바랐을 뿐, 어찌 자신을 위한 꾀를 도모하였겠습니까. 하늘의 해가 밝게 비추고 있으니, 맹세코 딴 사심이 없었습니다. 신들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합니다마는, 다만 사류의 화(禍)를 한번 개시하게 되면 국가의 명맥에 관계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천문(天門 임금 계신 궁문)이 막혀 심회를 계달(啓達)할 길이 없으나, 말없이 길이 하직함은 실로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다행히 친히 물으시면 만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뜻은 넘치고 말은 슬퍼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혹은 김구가 지었다 한다. 판의금 이장곤(李長坤), 지의금 홍숙(洪淑), 승지 성운(成雲) 및 대간이 김전 등과 함께 앉아서 공 및 조광조ㆍ김식ㆍ김구를 추국하기를, “사사로운 붕당을 맺어 궤격(詭激)한 것이 버릇되었다. 후진을 유인하여 권력 있는 요직을 점거하고 명성과 위세로써 서로 의지하며, 자기 패와 다른 자는 배척하고 자기 패에 아부하는 자는 진용(進用)하니, 국론이 거꾸로 되고 국사가 나날이 그릇되게 하였다.” 하니, 공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금년 34세로서 나이 젊고 어리석으며 성품이 편벽하였습니다. 외람되게 육경(六卿)에 올라 항상 두려워했으며, 국은에 보답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논사(論思)할 즈음에는 한결같이 정도로 나오기를 힘쓰고 밤낮으로 근심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붕당을 서로 맺어서 궤격한 것이 버릇되어 국론이 거꾸로 되고 조정 정사를 나날이 그릇되게 하였다고 하나, 신은 실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암을 우두머리로 하여 아울러 같은 죄과로 논하여 사율(死律)에 해당시켰는데, 삼공(三公)이 논의를 고집하여 사율을 감하고 금산(錦山)으로 장배(杖配)하게 되었다. 다음날 17일에 배소를 분정(分定)한 8명을 금부에 다시 모이도록 명하고, 승지 성운이 교지를 전하였는데,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던 신하로서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한 다스림을 보기 기약하였으니,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았음은 아니다.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에서 한 처사가 과오를 저지르는 데 이르러 인심을 불평하게 한 까닭에 부득이 죄주는 것이다. 내 마음인들 어찌 편하겠으며, 죄주기를 청한 대신인들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해서 그 기미를 먼저 막지 못했음이다. 만약 율대로 죄를 준다면 반드시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나, 너희들이 사심 없이 국사를 했으므로, 말감(末減)해서 죄를 주는 것이다. 너희들이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있어서 보통 관원이 아니므로 특히 관대한 형벌을 행하고, 또 말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내 마음을 알고 가라.” 하였다. 나머지는 김구ㆍ윤자임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판서ㆍ양사 장관을 차출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특지였다. 공이 김전 및 대간ㆍ승지와 함께 조광조 등을 추문(推問)하여 시추(時推 당시에 추문함)한 조광조 등 4명을 사율(死律)로 정하고, 박세희(朴世熹) 등 4명을 장류(杖流 형장으로 때린 다음 유배함)하여서 종으로 삼도록 하였다. 임금이 그 장본(狀本)을 보류하고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는데, 유생들이 궐정(闕庭)에서 통곡하고, 약도(約徒)는 궐문에서 소장을 올렸다. 이런 일들이 도리어 임금을 협박하였다는 말을 사실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으므로, 임금이 조광조와 김정(金淨)에게 사사(賜死)하면서 김근사에게 판부하도록 명하였다. 김근사가 사관(史官)의 붓을 빼앗고, 용기를 내어 적었다. 봉교(奉敎) 채세영(祭世英)이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적극 간하고, 김근사가 빼앗아 간 붓을 도로 빼앗으니 좌우가 숙연(肅然)하였다. 영상과 우상이 면대하기를 청해 적극 간하니, 사율을 감해서 장배(杖配)하도록 명이 내렸다. 공은 시일이 얼마 안 되어서 금부를 사직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전일 조광조 등을 추문할 때에 공이 금부 당상으로 있으면서 죄인이 성명을 자(字)로 부르는 것을 금하지 않아서, 능만(凌慢)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파직하도록 청하였다. 창녕(昌寧)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살림이 넉넉하였다. 악공(樂工)과 가희(歌姬)를 두고 술과 고기를 풍부하게 갖추어서 날마다 놀이하며 매와 개를 부려서 사냥하는 것을 일삼았다. 편하고 한가롭게 세상을 마쳤으니 일생 부귀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적가(嫡家)에 자녀가 없어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후세에 전하지 못하게 되었음이 한스러우니, 한탄을 금할 수 있으랴.



병진년과 정사년은 어찌 할 수 없는 해 / 丙辰丁巳奈何天

배권(주1)을 통곡한 지 20년이네 / 痛哭杯棬二十年

황각(의정부)(주2)에 2공이 되었음은 선조가 적선한 덕이었고 / 黃閣貳公由積善

흰 머리로 세 번이나 파출되었음은 많은 허물을 저질렀던 탓이다 / 白頭三黜坐多愆

송추는 막막하게 무덤을 에웠고 / 松楸漠漠圍雙壟

지척이건만 망망하게 구천(황천)을 격했다 / 咫尺茫茫隔九泉

전(奠) 드리기를 마치니 해가 서산에 저무는데 / 奠罷□□山日暮

아우와 형이 동문 앞에서 눈물 뿌린다 / 弟兄揮淚洞門前

하였다. 이 시는 공이 성묘하고서 느낌이 있어 지은 것이다.



[주1]배권 : 어머니가 사용하던 잔과 광우리를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차마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어머니를 사별(死別)했다는 뜻으로도 쓰임.《禮記》〈玉藻篇〉

[주2]황각 : 한(漢) 나라 승상의 청사(廳事). 궁궐 문을 주색(朱色)으로 칠했으므로 승상의 처소는 황색으로 칠해서 분별되게 하였다 함.

 






김세필 전(金世弼傳)

1473년(성종 4)∼1533년(중종 28).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 아버지는 첨정 훈(薰)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학(翯)의 딸이다.



김세필은 계사생이고 자는 공석(公碩)이다. 을묘년에 생원이 되었고 병진년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호는 십청헌(十淸軒)이었다. 폐출되어 죽었다.

보유 : 기묘년 초겨울에 하정사(賀正使)로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입시하였다. 《논어(論語)》를 강독하다가.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는 대목에 이르러, 공이 글로써 진계(進啓)하기를, “사람은 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다는 것을 알면, 깨닫고 속히 고치는 데에 용감하면 충후한 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여 선한 데로 옮기지 아니하면, 마침내 자포자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까닭에 부자(夫子 공자)께서,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하였고, 또,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아니하면, 이것이 허물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허물이 있건마는 거기에 집착하여서 고치기를 꺼린다면 그런 뒤에 바야흐로 허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부자께서는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수양하여 선한 데로 옮기는 뜻이 지극한 것을 허여하신 것입니다. 저번에 조광조(趙光祖)의 무리들이 당우(唐虞) 시대의 다스림을 본받고자 하니, 전하께서는 높이고 총애하여 신임하셨습니다. 이때에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하루아침에 옛것을 개혁하고 다시 새롭게 해서 3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사를 시행하고자 하였는데, 전하께서 그 사람들을 지나치게 임용하였으므로 도리어 오늘날에 근심을 끼쳤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세대의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비록 거동에 지나친 잘못이 있었으나, 옛 시대의 착한 정사를 인용하여 속히 공효(功效)를 이루려는 정성을 번거롭게 한 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그 과격함을 책망하고 온유 화완(溫柔和緩)한 방향으로 인도하여 다시 변화하도록 하였더라면, 전하의 포용하는 덕이 장차 옛 제왕과 꼭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더하여 귀양보내어 쫓아버리고 관련시켜 한 당파로 몰아 죄주었으니, 전하의 선을 좋아하시는 마음이 한편으로 치우쳤다는 것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옛사람 중에는 배를 타는 것으로 비유하여, 한편으로만 무겁게 하면 배가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지난날의 허물을 과감하게 고치는 데 꺼리지 마시어서, 허물 있는 사람이 장차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막지 않으시기를 삼가 원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3공인 김전(金銓)ㆍ남곤(南袞)ㆍ이유청(李惟淸)이 예궐(詣闕)하여서 죄주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조옥(詔獄)에 가두어서 국문한 다음 벼슬을 삭탈하고 파출하였다. 충주(忠州)의 도관원리(都官院里)에서 살다가 죽었다. 아들 김저(金䃴)는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을사년에 이조 전랑(吏曹銓郞)으로서 죽음을 당하였다.








 


유운 전(柳雲傳)

1485년(성종 16)∼1528년(중종 23).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종룡(從龍),

호는 항재(恒齋) 또는 성재(醒齋). 증조는 효반(孝班)이고,

할아버지는 양손(良孫)이며, 아버지는 사지(司紙) 공좌(公佐)이다.



유운은 을사생이며 자(字)는 종룡(從龍)이다. 신유년에 진사(進士)하고 갑자년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대사헌이었는데, 파직되어서 고향에 돌아갔으나 정권을 잡은 자가 모해하여서 사건이 예측할 수 없었다. 술을 한없이 마시다가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

척언 : 종룡 유운은 성품이 호탕하여서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0세에 과거에 올랐는데 장원 다음이었으며, 25, 6 세에는 벌써 3품에 올랐다. 일찍이 충청 어사(忠淸御使)가 되어서 처음 공주에 들어갔는데, 반드시 얼굴이 절묘한 기생이 천침(薦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워서 기다렸다. 고을 원은 어사는 딴 사신과 달라 잘못하다가는 서리 같은 위엄을 거스르게 될까 두려워서 감히 기생을 보내지 못하고, 다만 통인(通引)을 보내어 호위해서 자도록 하였으므로, 밤이 새도록 기다렸으나 사람 자취조차 없었다. 이른 아침에 떠나면서 절구(絶句) 한 수를 침병(寢屛)에 적었는데,



공산 태수는 위엄만 겁내었고 / 公山太守㥘威稜

어사의 풍류는 알아주지 못하네 / 御史風流識未曾

빈 사관에 미인 없이 긴 밤을 새우니 / 空館無人消永夜

남쪽으로 온 내 행색이 중보다 담박하여라 / 南來行色淡於僧

하여서, 듣는 자가 크게 웃었다.

보유 : 일찍이 공산 병풍에 적은 시를 보니, 호방하여 얽매인 곳이 없음은 천성이 그런 것이었다. 첩을 두어 사람 두었으므로 정암(靜庵)이 공도(公道)로써 책망하였다. 하루는 취해서 기생과 함께 초헌(軺軒)을 타고 갔다. 정암이 이 소문을 듣고 곧 쫓아가서, 부모가 남겨 준 몸을 조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더럽힌다는 뜻으로 크게 책망하였다. 공이 빙긋이 웃으며 답하기를, “상말에, ‘개가 물었던 꿩을 성황신이 먹는다.’ 했소. 저것들이 비록 창녀들이지마는 어찌 나를 더럽히겠소.” 하였다. 정암도 웃으면서, “종룡은 보기 드문 선비이나, 다만 여색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지키지 않는다.” 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행검을 닦지 않는다 하여 충청 감사로 좌천되었다. 일찍이 여울에 있는 돌을 두고 시를 짓기를,



밉구나, 너 여울 가운데 돌이여 / 惡爾灘中石

비쭉한 것이 숨었다가 다시 흐른다 / 槎牙隱復流

돌기둥 되어서 서지 못하고 / 復爲砥柱立

공연히 뱃길만 방해하네 / 空作礙行舟 하였다.

과만(瓜滿 임기가 만기된 것)이 되어서 체임(遞任)하게 되었는데, 대관(臺官)이 청해서 그대로 유임시키고 바꾸지 않았다. 이때에 앞서 각 도 고을에 여악(女樂)을 폐지하였다. 지평(持平) 이연경(李延慶)은 공이 직산현(稷山縣) 누(樓)에서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벌였다는 말을 잘못 듣고, 국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이 앞장 섰으니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체임하도록 논박하였다. 그러나 옥당(玉堂)에서는 차자(箚子)를 올려서, 공이 그렇지 않고 또 사실 없이 떠도는 말로써 방백(方伯) 같은 중신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구원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공이 이연경에게 분함을 품었을 것이라 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되어서는 사직하는 소를 한 번 계(啓)하였는데, 사화를 구원하기가 급해서 집의(執義) 윤세림(尹世霖), 장령(掌令) 이겸(李謙)ㆍ임추(任樞), 지평 조광좌(趙光佐)ㆍ신변(申抃) 등과 함께 모두 사은(謝恩)할 것과 대관이 서로 만나는 예[會禮]를 잊고, 복합(伏閤)해서 논계하기를, “사건이 만약 반역일 것 같으면 공명정대하게 처단할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이 일은 비밀이라 하니, 이것은 간사한 자가 비밀리 논계한 것입니다. 대저 비밀리 한 논계라는 것은 종사(宗祀)를 위태롭게 하는 조짐입니다. 까닭에 전일 이줄(李茁)이 비밀리 논계했을 때에, 대관이 그 퍼져 나가는 폐해를 논했으므로 전하께서도 명백히 아시었을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는 모두 어질고 착한 사람이니, 진실로 몸소 다스림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일이 벌써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의리상 직사(職事)에 나아갈 수 없으니, 신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서 간사한 사람의 마음을 쾌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또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은 평소부터 물망이 없다고 탄박(彈駁)하여 이빈(李蘋)을 후임으로 하였다. 이빈은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있다가 올라와서, 공이 사은숙배도 하지 아니하고 문득 논쟁(論爭)하여서 사체(事體)를 잃었다고 논박하였다. 이리하여 파직되어 안성(安城)에 우거하였다. 신사년 가을에 형세를 관망하여서 권세에 따랐다는 것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해 겨울에 남곤(南袞)이 대간을 부추겨서 당파로 몰아 올린 소장(疏章)에 공의 이름이 4번째로 적혀 있었고, 정암ㆍ충암(冲庵)ㆍ김대성(金大成)은 모두 이미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공은 화가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미치리라 의심하고 분해하면서 죽을 작정으로 술을 한없이 마셨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 하였다. 적가(嫡家)에는 자녀가 없었다.





 


문근 전(文瑾傳)

1471년(성종 2)∼미상. 관은 감천(甘泉).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

손무(孫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숭질(崇質)이고,

아버지는 부사 빈(彬)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관(瓘)의 형이다.







문근은 □□생이고 자(字)는 사휘(士輝)이다. 병진년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파직되었다.

보유 : 경상도 용궁(龍宮)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기묘년 여름에, 경상도는 지역이 넓고 사람이 많아 한 해 동안에 두 번 안찰(按察)하지 못한다 하여, 낙동강을 중심으로 갈라서 좌도와 우도에 따로 관찰사를 두었다. 11월에 좌도 관찰사 이항(李沆)과 상주(尙州)에서 모였다. 한창 잔치를 벌였는데 문득 사화 소식이 들렸다. 공은 추연(愀然)히 낯빛을 변하고 먼저 숙소에 가서 새벽까지 앉아 있었다. 이항은 기쁜 듯 다행히 여기며 밤새도록 술을 즐기고 온갖 우스개짓을 하면서, 공이 불평하게 여기는 뜻이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항이 대사헌이 되어서는 곧 공을 논박하여서 파직되게 하고 좌우도는 병합하여 예전 제도와 같이 하였다. 신사년 9월에 거짓으로 명망을 도둑질했다는 것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용궁 고향에서 살다가 죽었다.




 


권벌 전(權橃 傳) 봉화 유곡

1478년(성종 9)∼1548년(명종 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곤(琨)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사빈(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윤당(尹塘)의 딸이다.

의정부 우찬성 역임



권벌은 무술생이고 자(字)는 중허(仲虛)이다. 병진년에 생원이 되었고 정묘년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파직되었다. 계해년에 소명(召命)을 받고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되었다.

보유 :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辛允武)가 죄를 당한 것은 정부(政府)에 딸린 종 정막개(鄭莫介)가 고변(告變)한때문이었다. 박영문은 공조 판서였는데 논박을 당해 벼슬이 갈렸다. 항상 분한 마음을 품고 신윤무의 집에 와서 어지러운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신윤무는 반드시 사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어서 만류하였다. 정막개는 성품이 본디 교활하였다. 박영문과 신윤무의 집에 출입이 잦았는데,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얽어서 고변하였던 것이다. 딴 증거는 없고, 다만 고변한 자의 말만으로 추핵(推覈)하여 대역으로 논죄하였다. 고변한 자에게는 예에 따라 죄를 당한 사람의 가재(家財)ㆍ전택(田宅)ㆍ노비를 상으로 주고 특별히 당상직(堂上職)을 더하였으며, 또 은대(銀帶)와 의장(儀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으나, 조정 논의는 그자와 반열을 함께하기를 수치로 여겼다. 임금은 한창 충의(忠義)한 자로 여겨 궁내(宮內)에서 하사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대중(臺中)에서 큰 소리로, “정막개가 박영문과 신윤무의 모의를 듣고 여러 날 만에 고하였으니, 거기에 대한 죄를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구설(口舌)의 공으로 과람하게 상주고, 진신(縉紳)들의 반차(班次)에 외람히 참여하였으니, 종말의 폐단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빨리 관직을 삭탈하도록 청하자.” 하니, 동료들이 모두 용기를 내어 곧 계청하여서 삭탈시키게 하자 하였으나, 공이 근친(覲親)하려고 시골에 갔다가 돌아오니 계청하려던 일을 중지하고 있었다. 공은 동료들이 이미 정했던 일을 정지한 잘못을 탄박(彈駁)하고, “어리석고 천한 무리가 외람히 조정 반차에 참여하였으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모리(謀利)하는 자가 앞다투어 영귀(榮貴)함을 흠모하여 정막개와 같이 요행으로 공을 이루게 하면 무궁한 화가 이번 일을 좇아 시작될 것입니다.” 하고 극론하였다. 임금이 곧 정막개의 관작을 환수하도록 명하니, 조야에서 쾌하게 여겼다. 기묘년 2월에 예조 참판으로 임명되었다. 시사에 걱정이 많음을 보고 제공(諸公)을 위해서 힘껏 말했으나, 제공이 따르지 않으므로 6월에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가기를 청하였다. 경진년에 승지 때의 사건으로 추론(追論)되어서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곧 안동(安東)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사년에 소명(召命)을 받고 외관(外官)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번 이직(移職)되어서 육경(六卿)이 되었다. 을사년에 인종(仁宗)이 빈천(賓天)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공이 찬성(贊成)으로서 충순당(忠順堂)에 입시하여 좌의정 유관(柳灌)ㆍ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ㆍ형조 판서 윤임(尹任) 등의 죄상을 극력 구원하였다. 이튿날 이기(李芑)의 후임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게 되자 또 차자를 올려서 두 유씨의 무죄함을 극간하였다. 또 윤임의 죄목에서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하였다는 것은 없애기를 청하였더니, 정순붕(鄭順朋)이 격노해서 소를 올려 3명의 죄상을 극언하였다. 다시 충순당에서 인대(引對)할 때에 공은 사죄하고 바로 물러났다. 유관ㆍ유인숙ㆍ윤임 등을 죽인 다음 입시하였던 여러 재상은 모두 책훈(策勳)되었는데, 공은 파직당하고 시골에 돌아왔다. 정미년 가을에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 벽에 적힌 무명방서(無名謗書)를 고발하여서, 그때문에 죄를 더하게 되었다. 을사년에 집권하였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공을 구례(求禮)에 부처(付處)하도록 하였다가 두 번째는 태천(泰川)으로 배소를 옮겨 정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또 삭주(朔州)로 옮겼다. 무신년에 적소에서 죽었다. 지금 임금 원년 정묘 10월에 3공이 계(啓)하기를, “권 모는 덕행이 순수하고, 충성이 아울러 지극하였습니다.” 하여, 관위(官位)를 회복하도록 명하게 되었다. 12월에 경상 감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하기를, “권모는 충의와 풍절(風節)이 이와 같으니,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추증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그 장계를 정부에 내려 논의하도록 하였더니, 대신들이 논의하여 이르기를, “두 사람의 학행(學行)이 빛나서 칭도(稱道)할 만하니, 추증하여 사기(士氣)를 더욱 떨쳐 일으키고 유도(儒道)를 더욱 소중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므로, 좌의정으로 추증하였다.

태상(太常)에서 논의하기를,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덕은 강유(剛柔)를 갖추었다. 풍신(風神)이 빼어났고, 의도(儀度)가 준엄하였다. 겨우 황도(주)를 면할 만한때에 벌써 문사(文辭)가 이루어졌다. 학문은 자기를 위하여 힘써서 잠깐이라도 폐하지 않았으므로 확충하고 수양하는 데에 근본이 있었고, 정성이 깊어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보도(輔導)하는 데에 책임을 다했다. 낯빛을 화하게 하여 물(物)을 접응(接應)하니 상냥한 모습이 있었고, 낯빛을 엄정히 하여 조정에 나오니 늠름하여 범하기 어려웠다. 동료들은 넓고 거룩한 기국(器局)에 탄복하였고, 후학들은 검소하고 간약(簡約)한 조수(操守)를 흠모하였다. 기묘년 변이 시작할 무렵에 조화시키던 일은 유식한 자에게 칭찬받았고, 을사년 화가 참혹할 때에는 구원하는 것이 여러 번 무죄인 자에게 미쳤다. 곧은 마음은 화(禍)와 복(福)으로 변경되지 않았고, 절조는 편하고 험한 것에 따라 변함이 없었다. 꺼리고 싫어함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로 지적하니 조정 반열이 목을 움츠렸고, 위태롭고 의심하는 때를 즈음해서 정대히 의논하니 권세 잡은 간인(奸人)이 등에 땀을 흘렸다. 아, 임금을 섬기는 충성과 몸 가지는 바름은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공과 같은 사람을 얻기란 쉽지 않다. 국운이 불행하여서 간사한 무리가 함께 배척하니 한갓 해바라기 같은 정성만을 품었고, 마침내 시랑(豺狼) 같은 황포(荒暴)한 자에게 죽었으니 어찌 천운이 아니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시법(諡法)을 상고하건대, 임금을 섬기는 데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곧은 도(道)가 흔들리지 않음을 정(貞)이라 하였으므로,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하였다.



[주]황도 : 황(黃)은 황구소아(黃口小兒)를 말하는 것인데 3세 이하를 가리키는 것이고, 도(悼)는 7세를 말하는 것이다. 황은 도 이하인 만큼 황도라 하면 곧 7세를 말하는 것이다.《예기(禮記) 곡례(曲禮) 상(上)》





 


조정암 전(趙靜庵傳)

1482년(성종 13)∼1519년(중종 1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한성 출생. 육(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손(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의(誼)의 딸이다.

관직은 부제학



조광조(趙光祖)는 임인생이고 자(字)는 효직(孝直)이며, 경오년 진사에 장원하였다. 천(薦)으로써 참상(參上)직에 특배(特拜)되어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가 되었다. 을해년에 급제하여 벼슬을 대사헌까지 하였다. 능성(綾城)으로 귀양갔다가 곧 사사(賜死)되었다.

기묘년 8월 정해일에 주강(晝講)을 하다가, 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였습니다. 도학에 침잠하여 문구(文句)에 일삼지 않았으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습니다. 한 시대 사람이 많이 헐뜯고 나무라서, 광자(狂者)라 하거나 화태(禍胎)라 하여 붕우들도 절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했으나, 입지(立志)한 것이 매우 독실하여서 조금도 흔들리거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반정(反正) 초기에 그 학문으로써 후생을 인도하니 그를 따라서 감발(感發)한 자가 많아 비록 필부였으나 사류(士類)를 도야하고 성취한 공이 조정에 미쳤습니다. 폐조(廢朝) 때 판탕(板蕩 국정이 문란함)한 뒤에 사기(士氣)를 붙들어서 고동(鼓動)시켰고, 신이 약간 개발한 것도 모두 이 사람을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음애일록(陰崖日錄) : 조효직 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죽었으니, 아, 사람이 죽었다 하는데,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널리 배우고 힘껏 행하였다. 잇달아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청현직 벼슬을 지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도에서도 이탈하지 않았으니, 사림(士林)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국가가 중흥할 운수를 당해서 조야에서 유신(維新)하기를 바랬다. 까닭에 공은 홀로 침착하게 건의하여 선왕(先王)의 법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스스로 세상에 흔하지 않은 지우(知遇)라 하여 교화할 조목을 밟지 아니하고 등용되었는데, 특별히 공을 대사헌으로 제수하여 군중의 바람에 부흥하였다. 기강(紀綱)을 파악하여 명령하면 행하여지고 금하면 그쳤다. 그러나 후진 여러 현사(賢士)는 넓고 기(氣)가 날카로워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점차적으로 개혁함이 없었으므로 험한 세정(世情)에 저촉되어 인심이 크게 어그러졌다. 공이 신 대용(申大用 신상(申鏛))ㆍ권중허(權仲虛 권벌(權橃))와 함께 신(新)ㆍ구(舊) 두 사이를 조화시켜서 파국(破局)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신ㆍ구가 서로 미워하여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사람의 꾀한 것이 착하지 못했음이랴. 아, 옳고 그름이 비록 한때는 혼돈했으나 정상(情狀)이 후일에는 반드시 드러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운운하리오. 머리 말과 편(篇) 끝은 음애전 가운데에 자세히 적혀 있다.

척언 : 회령(會寧) 성 밑에 살고 있던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가만히 먼 곳 야인과 공모(共謀)하고 갑산부(甲山府)에 들어와서 백성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다. 무인년에 남도 공사(南道共使)가 밀계(密啓)하기를,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잠입하여 어렵(漁獵)하면서 왕래하나 무리가 많아서 잡기 어렵습니다.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쳐 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3공과 병조와 변경(邊境) 일을 아는 재상을 불러서 논의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것을 징계하지 아니하면 성 밑에 살고 있는 야인들도 잇달아 반란할 것입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감사ㆍ병사(兵使)와 함께 적을 잡아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먼저 비밀 교지(敎旨)로써 본도(本道)에 알리고, 또 병기ㆍ갑옷ㆍ기계 따위를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지방(李之芳)을 보내도록 명하고, 특히 어의(御衣)와 활ㆍ화살을 하사하여서 즉일 하직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서 소대(召對)하고 이어서 전송하는 잔치를 벌였다. 3공 및 여러 신하가 좌우에 시위(侍衛)하였는데, 나는 병방 승지(兵房承旨)로서 참석하였다. 내시가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와서 입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곧 윤허가 내리니 조광조가 나와서,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적이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병가(兵家)에는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경법(經法)과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 가는 것은 농노(農奴)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청종(聽從)하기를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그 지방으로 보내려던 것도 파하였다. 조광조는 3품관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또 대간이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았고, 홍문관에서도 날마다 논계하였다. 하루는 조광조가 부제학으로서 스스로 소장(疏章)을 짓고 동료를 거느려 정원(政院)에 나아가서, “오늘도 이 일에 대해서 윤허를 받지 못하면 집으로 물러갈 수 없다.” 하고, 날이 저문 뒤에 대간도 모두 옥당(玉堂)에 몰려와 머물러 있었다. 계하는 것이 닭이 울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승지들은 모두 책상을 의지하여 깊이 잠들었으니, 모두 염증(厭症)과 괴로움을 느꼈다. 대내(大內) 엄밀한 곳에 중사(中使)가 밤새도록 출입하면서 번거로이 계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임금인들 어찌 듣기를 싫어하지 않았으랴.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반드시 충성과 착한 도로써 임금의 마음과 맺고, 임금의 마음이 트인 곳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토록 핍박하고도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조광조가 패한 뒤에 임금은 곧 소격서를 다시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 대사헌 조광조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하였는데, 반드시 의리를 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종횡으로 드나들면서 말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비록 깊은 겨울이나 한여름이라도 한낮이 되도록 중지하지 않았다. 입대할 때에 한 말은 윤허받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함께 입시한 자는 매우 괴로워하고 모두 싫어하는 빛이 있었다.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衙門)에 출사(出仕)하는 길에서 찬성(贊成) 고형산(高荊山)을 만났는데, 인사하지 아니하고 지나갔으므로 미워하는 자들이 이를 갈았다. 한(漢) 나라 《사기》를 상고하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되어서 마음에 승상(丞相)을 가볍게 여기고 만나서도 예를 갖추지 않았고, 장탕(張湯)은 어사가 되어서 매양 아침에 정사를 아뢰기 시작하여 해가 돋은 다음에 파하니, 승상은 자리만 지킬 뿐이고 천하 일은 모두 장탕이 결정하였다. 두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거만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다가 화를 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군자가 처신하는 데 있어 공경하고 겸손하는 것이 복을 누리는 기초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참언(僭言)상사(上舍) 정사원(鄭士元)이 지은 것이다. : 김사재(金思齋)가 지은 척언(摭言)에, “정암(靜庵) 선생이 소격서를 혁파하는 일에 대해 계달(啓達)하기를 닭이 울 때에 이르도록 그만두지 않아서 임금의 듣기 싫어하는 뜻을 범했으니, 이는 간언을 할 때에 기미를 보아 점진적으로 하는 도리[納約自牖之道]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진 사람이 성의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범연하게 상인(常人)의 마음으로써 요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저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당연한 도리로써 인도하고 지성(至誠)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힘쓸 뿐이니, 어찌 딴 짓을 헤아릴 것이랴. 만약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요량하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어찌 군자가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이루기에 급한 마음이겠는가. 선생이 중종(中宗)께 지우(知遇)하였을 때에,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선생의 한 말씀으로써 조정의 중론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임금에게 득의(得意)한 것이 오로지했다 할 수 있다. 소격서를 혁파하는 것도 또한 임금을 바루는 도리의 하나였다. 여러 달을 논계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은즉, 천의(天意)를 돌리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음에 있었다. 까닭에 선생은 임금을 공경하는 의(義)를 궁리하고 못다한 정성을 확충해서 여러 차례 계하여 그만 두지 않아 밤중에 이르니 정성이 마침내 천심(天心)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 복합(伏閤)할 때에 반드시 미리 재계(齋戒)하고 성심으로 하기를 생각해서 임금이 감동되기를 기대한 것이 정 부자(程夫子)가 진강(進講)한 뜻과 같았으니, 보통 사람이 능히 엿보고 측량할 바 아니다. 그 계사(啓辭)를 내가 보지는 못했으나, 반드시 임금의 한 점 트인 곳을 인해서 계발(啓發)한 것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였으리오. 옛적에 명도(明道 정호(程顥)) 선생은 소대(召對)했을 때 오시(午時)가 되어야 비로소 물러났고, 회암(晦庵) 선생은 조정에 있으면서 진강할 때와 주사(奏事)할 때에 말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선생의 한 바가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매양 소대할 때에 말을 그치지 않아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선생이 강독하기를 반복해서 임금에게 의리를 익히 알아듣도록 하며, 함양하고 훈도(薰陶)하여서 깨닫지 못하는 중에 성덕(聖德)을 성취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물며 임금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던 선생으로서,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하지 아니하고 딴사람에게 미루는 것이 가하겠는가. 옛적에 이천(伊川) 선생이 진강할 때, 항상 그 문장의 뜻 외의 것을 반복하고 추리해서 밝히니 듣던 자가 탄복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한 바도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적신(賊臣) 남곤(南袞)이 화얼(禍孼)을 꾸며서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죄다 죽인 그 사건이 선생의 처사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하고는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미워하는 자가 모두 이를 갈았다.” 하였으나, 소식(蘇軾)의 무리가 이천 선생을 원수같이 본 것이 정자가 미움받을 허물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가하겠는가. 소망지(蘇望之)와 장탕(張湯)의 일에 있어서도 또 어진지 어질지 않은지, 간사한지 바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한 말은 불합리함이 심하기도 하다. 학술이 밝지 못한 사람이 도학(道學)의 귀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상정(常情)으로 현인(賢人)을 논의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 바, 김공(金公)을 정인 군자(正人君子)라고 하는데 소견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유 : 을해년 여름에 이조 판서 안정민(安貞愍)이 계하기를, “진사(進士) 조모(趙某)는 경술(經術)에 밝고 행검(行檢)이 있어서 성균관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니, 등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계자 격식(階資格式)에 구애되어서 보통 예(例)와 같이 참봉(參奉)으로 조용(調用)하면, 사림(士林)을 권장하기에 부족합니다. 육품(六品)의 준직(準職)에 제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여 곧 사지(司紙) 벼슬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 알성 별시(謁聖別試)에 응시하여 을과(乙科)에 첫째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다가 감찰(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졌고,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어서는 대간인 권민수(權敏手)ㆍ이행(李荇)들이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은 잘못에 대해 탄핵하였다. 정축년에 수찬(修撰)에서 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역임하였고, 8월에는 전한(典翰)이 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사직하는 글에, “소신(小臣)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실지로 힘쓰지 못했던 까닭으로 식견이 나날이 공소(空疎)하여지고, 직임(職任)은 매우 무거우니 마음에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사사로 동료(同僚)에게,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다스림에 뜻이 있는데, 외람되이 시종하는 반열에 끼어 있으니, 어찌 스스로 편하겠는가. 물러가서 힘껏 배워 학문이 성취한 다음 다시 와서 벼슬하면 반드시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궁벽한 고을에 보임(補任)되기를 청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 학술에 전심하다가 다행히 버리지 않으시고 수용(收用)하시면, 백성을 다스리고 학문을 이루는 데에 거의 양쪽으로 완전할 것이다.’ 하였으나, 소신이 생각만 하고 감히 우러러 계달하지 못 하였습니다. 전에 응교로 삼으시고 특별히 4품 계자에 뛰어올리실 때에 반드시 사면하고자 하였으나,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습니다. 또 사사로 생각하기로는, ‘이 4품 관직에 3년 만 종사하면 국사(國事)를 거의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마는, 한 달 동안에 또 전한(典翰)으로 된 다음에는 사람과 벼슬이 합당하지 못하여, 전에 먹었던 생각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하는 바를 보는 것인데, 소신은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은택을 입었으니, 어찌 그 직위를 무턱대고 차지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정월에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올려서 부제학으로 제수하였고, 5월에는 동부승지로 옮겼다. 이에 우부승지 김정(金淨)이 진계(進啓)하기를, “조모는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성학(聖學 임금의 학문)을 보익한 것이 컸으므로, 중론이 모두 그 직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곳이니 진실로 사람을 가려서 맡길 것이요, 또 입시하여서 논란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 업무를 전적으로 맡는 것만 못합니다. 전하께서 조모가 경연관으로서 합당하다는 것을 참으로 아신다면 반드시 딴 관직에 이임(移任)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이 조광조와 임무를 같이 하는 것은 진실로 다행입니다마는, 경중을 헤아려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도로 임명되었다. 임금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뜻을 모았으므로 더욱 의중(倚重)하였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서 쉽지 않은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을 내는 근본이니 근본이 바르지 아니하면 정체(政體)가 확립되지 못하고 교화를 행할 수 없다 하여, 매양 입대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생각하기를 오래하여 신명을 대하듯 하였다.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말한 것은 바른말 아닌 것이 없었다. 마음속에 온축(蘊蓄)된 것을 자세히 논하고 극진하게 말하였다. 혹 날이 저물더라도 임금이 모두 허심(虛心)으로 귀를 기울여 듣고 날마다 더 권장하였다.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도록 청하였고 속고내(速古乃)를 잡으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며, 선왕의 법을 밝혀서 차례로 거행하였다. 《소학(小學)》을 인재 양성의 근본으로 삼고 향약(鄕約)을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 하니, 백료(百僚)가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 없었고 사방에서 바람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무인년 겨울에 특별히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온축된 의리가 바람을 내어서 풍속을 고동(鼓動)하였다. 염치를 숭상하고 병이(秉彝)를 떨쳐 일으키어 효제를 숭상하니, 온 나라 백성이 분발하여서 따랐다. 기묘년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란 자가 사림을 모함하여 헐뜯다가 일이 발각되어 정신(廷訊)하게 되었다. 선생이 대성(臺省) 장관(長官)으로서 국정(鞫庭)에 참석하였으나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벼슬을 갈도록 논란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5월에 다시 대사헌으로 되었으며 임금의 총애는 더욱 융숭하여 능히 사퇴하지 못 하였다. 도(道)를 행하기 어려움을 알고, 당시 사세에 크게 걱정스러움이 있음을 생각하여 진계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수보(修補)하고 거행하는 일은 모두 선조(先朝) 때에 미처 못한 바입니다. 훗날 소인이 만약 소술(紹述)이란 말을 빌려서 중상(中傷)한다면, 선한 무리가 위태합니다. 근래에 노산(魯山)에게 제(祭)를 지내고 소릉(昭陵)을 회복하는 등의 일은 모두 뜻있는 사람들이 행하고자 하였으나 되지 않았던 것인데, 성세(聖世)에 와서 시종하는 신하가 건의하여 거행한 것입니다. 또 신씨(愼氏)를 다시 세우라는 논의는 김정(金淨)ㆍ박상(朴祥)이 상소까지 하였는 바, 이것은 정당한 논의이나 당시에 논란하던 자는 그들을 대죄(大罪)로 처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등등의 일은 모두 소인이 구실로 할 바이며, 사림의 화근이 여기에 잠복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모르고 계셔서는 불가하며, 또한 원자(元子)에게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師道)는 비록 서지 않았으나, 조정 선비로서는 붕우간에 서로 책선(責善)하는 의리가 있으니, 붕우의 도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훗날에 군자를 무함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당류(黨類)라고 지목하여 송(宋) 나라 원우(元祐) 연대의 일같이 할 것입니다. 서로 친교를 맺어서 왕래하는 자는 모두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고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도를 강론한 것인즉 이것은 국가의 복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정직한 선비가 세상에 성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붕우 사이에 교유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서로 자뢰하여 유익하고자 함인데, 어찌 이런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여염에서도 모두 큰 화가 반드시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바, 대개 예전 일에 깊이 징계되었던 것입니다. 개국 이래로 사림의 화가 끊이지 않았으나, 군자가 국사(國事)에 힘을 기울여 거의 성공한 적은 있었으나, 패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소신은 폐조 때 사림의 화를 눈으로 직접 보았으므로, 도무지 벼슬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로서 이 세상에 나서 무심할 수 없었고, 외람되이 성은을 입어서 마지못해 종사하거니와 다만 두려워하는 마음만은 사람마다 있습니다. 국가가 비록 한때는 공고(鞏固)하더라도 후사(後嗣)에 가서는 위태하지 않은 적이 드무니, 가장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그런즉 선생이 염려한 바는 세대가 바뀌어진 뒤를 생각하였던 것인데, 어금니를 갈고 입맛 다시던 자가 곁에 있어서 가만히 틈을 엿볼 줄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이 올바른 논의에 용납되지 못하여 원망이 가슴에 쌓였던 참인데, 선생이 임금의 지우(知遇)로 말미암아 학자들이 추향(趨向)을 같이하고 소민(小民)이 선(善)을 칭도(稱道)하니, 그들은 이런 점을 구실로 하여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홍경주(洪景舟)를 시켜 초방(椒房 내전) 액리(掖吏 내시)를 인연하여, 인심이 죄다 조씨에게 쏠렸다 하여 임금의 뜻을 흔들리도록 하고, 또 이치에 닿지 않는 참언(讖言)으로 금원(禁苑) 나뭇잎에 무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겁나게 하였다. 정국 4등 공신(靖國四等功臣)의 명단을 삭제하던 날, 교묘하게 온갖 간계를 얽어서 북문을 열도록 청하고, 밀계를 올려서 드디어 선생을 죄인의 괴수로 만들었다. 잡아다가 곧 쳐서 죽이고자 하여 흉한 기구를 이미 전(殿) 뜰에 벌여 놓았으나, 다행히 수상이 임금의 옷깃을 잡아당김으로써 정성이 천심을 감동되게 하였고, 벼락 같은 위엄이 조금 누그러져서 조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에 도성 안 약도(約徒)로서 차자(箚子)를 올리는 자가 궁성에 몰려와서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고, 관학 선비들은 대궐 뜰에 호곡(號哭)하여서 소리가 대내에 들렸다. 이러므로 참소하는 자는 구설거리를 더했고 임금의 의혹은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다시는 임금의 용안을 볼 수 없어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으니, 공의 지성도 또한 극진하였다. 김정ㆍ김식(金湜)ㆍ김구(金絿)와 같은 말로 추국(推鞫)당했는데 공이 공초(供招)하기를, “사(士)가 세상에 나서면 믿는 바

는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국가의 병통은 이(利)가 나는 근원에 있다는 망령된 요량으로 국운을 새롭게 하여 무궁토록 하고자 했을 뿐이었고, 딴뜻은 전연 없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는 사율(死律)로 정했으나, 마침 영상(領相)이 구원하여서 능성(綾城)으로 장배(杖配)하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금부(禁府)에 모여서 전지(傳旨)를 받고 갔다. 김 판서와 김 제학 등의 전(傳)에 자세하다. 얼마 뒤에 대간이 죄를 더하도록 청하여, 적소(謫所)에서 사사(賜死)하도록 명하였다. 아이 종이 도사(都事)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선생은 도사에게 “주상 전하께서 신에게 사사하셨으니 죄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들은 다음에 죽겠다.” 하고, 뜰에 내려가 북쪽을 향해서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교지를 받았다. 임금의 체후(體候)가 어떤가를 묻고, 다음으로 3공ㆍ6경ㆍ대간ㆍ시종의 성명을 낱낱이 물은 뒤에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바꿔 입는데, 금오랑(金吾郞) 유엄(柳渰)이 재촉하는 빛이 보였다. 선생은 크게 탄식하면서, “조서(詔書)를 안고 주막에 엎드려 울던 옛사람과 어찌 그다지도 다른가.” 하였다.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임금을 사랑한 것이 아비를 사랑함과 같았다. 하늘의 해가 나의 단심(丹心)을 비출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약을 마시고 죽으니, 12월 20일이었고 나이는 38세였다. 다음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 밑에 반장(返葬)하니, 선생이 남긴 뜻이었다. 선생이 죽던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는 각각 두 돌림이었고, 남북으로는 각각 한 돌림이었다. 남북으로 두른 바깥쪽에 또 두 줄기 무지개가 띠를 드리운 듯한 것이 하늘에 뻗쳤고, 또 미방(未方)에는 한 발 남짓한 한 줄기 무지개가 있었는데, 모두 한참 지나서 사라졌다. 이때에 아들 조정(趙定)은 5세였고, 조용(趙容)은 2세였는데, 조정은 일찍 죽었고 조용은 벼슬하여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아들이 없어서 종질(從姪) 조순남(趙舜男)으로 후사를 삼았다.

인묘(仁廟) 을사년 봄에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소장을 올려서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모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업을 받았습니다.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인 사예(司藝) 신(臣)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전해 왔으며,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吉再)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 됩니다. 그 학문의 연원(淵源)과 행신의 바름과 설시(設施)한 방법이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궐문에 엎드려 세 번이나 소장을 올리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타일렀다. 대간과 시종도 또한 차자를 올려서 간절하게 아뢰었다. 6월 30일에 하교하기를 “조광조의 일은 일찍이 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때 일이므로 경솔하게 고치지 못 하였던 것이다. 지금 내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조광조의 관작과 품계를 회복하라.” 하였다. 지금 임금 무진년 여름에 태학 유생 홍인헌(洪仁憲)ㆍ이계(李啓)들이 소장을 올려서 공부자(孔夫子)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선유(先儒) 조모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품(資稟)이 이미 다르고, 확충(擴充)하여 수양한 것이 도가 있었습니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여서 드디어 큰 선비가 되었습니다. 용이 풍운을 만난 것처럼 우리 중묘의 지우(知遇)를 얻어서 후직(后稷)과 설(契)이 임금을 섬기던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요순의 다스림을 그 임금에게 기대하였습니다. 《소학》의 가르침을 밝혀서 인재를 떨쳐 일으키고, 천거하는 과거를 설치하여 준예(俊乂)를 숭장(崇獎)하였습니다. 한 시대의 인재를 양성하여 거의 삼대(三代) 시대와 같이 융성할 뻔하였는데, 간사한 사람이 질투하고 한 그물에 화를 얽어서, 도를 일으키며 다스림을 이루려는 기회를 중도에서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50년 동안은 온 나라 인심이 소경과 귀머거리 같아서 탐내는 것이 버릇으로 되고, 어진 사람을 원수같이 보는 바, 이것은 기묘년 사화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베이고 사그라든 나머지에서도 간혹 스스로 분발하여서, 의를 흠모하고 이(利)를 부끄러워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왕사(王事)에 급할 줄 아는 연이어진 정기(精氣)가 오늘까지 내려온 것은 모두 광조의 힘이니,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俊慶)이 서로 잇달아 계청하고 옥당에서도 높은 관작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기를 청하였던 까닭에, 영의정으로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 소장을 올려 논열(論列)하였다. 모두 신원소(伸冤疏) 가운데 있다.

행장(行狀)의 대략에, “선생은 천분(天分)이 매우 기이하고 무리에서 뛰어났다. 난새[鸞]가 머무른 듯 따오기가 우뚝한 듯하였고, 옥처럼 윤택하고 금처럼 정순(精純)하였다. 또 아름다운 난초가 꽃다움을 떨치고, 밝은 달이 빛을 나타내는 듯하였다. 나이 17, 18세 적에 개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능히 어지러운 세상을 당해 험난함을 무릅쓰면서, 한훤(寒暄) 김 선생(金先生)을 희천(熙川) 적소에서 스승으로 섬겼다. 《소학》을 독신(篤信)하였고, 《근사록(近思錄)》을 숭상하였다. 일찍이 밤낮으로 가다듬고 신칙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며, 언행을 단속하는 데에 옛 가르침을 상고하였음은 공경함을 갖는 법이었다. 강습하는 여가에 종일토록 우뚝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모신 듯하였고 대원(大原 근본되는 학문)을 수양하며, 굳게 견디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고요함을 주로 하는 학문이었다. 후진을 권장하면서 각자 그 재질대로 하였다. 본분을 지키는 행실이 나타나서 재주가 한 세상을 인도하기에 족하고, 영특한 재화(才華)가 밖으로 발(發)하여 도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했다. 그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 백료(百僚)가 다 마음을 기울였으니, 한 시대 사람들을 감복하도록 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왕신(王臣 참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신하)으로서 구오(九五)의 성한때를 당해서, 나아가면 날마다 세 번이나 인접하였고 물러나면 사람들이 다투어 가며 손을 이마에 얹었으니, 이것은 상하가 서로 기뻐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할까. 하늘은 체동(螮蝀 무지개의 이명)을 그 사이에서 가만히 없애지 못하여, 위로는 그의 뜻이 크게 시행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아래로는 그 덕택이 널리 덮임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때 운수와 나라의 액운에 관계된 것이었다. 천지가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고 귀신이 조희(調戲)한 바이니, 선생께서야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 천도는 본디 떳떳함이 있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다. 방훈(放勳 요(堯) 임금)의 남긴 뜻을 중화(重華)가 아름답게 이루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이로 말미암아 방향을 알게 되었고, 세상 다스림은 이로 말미암아 화평을 거듭하게 되었으며, 사문(斯文)은 이를 힘입어서 무너지지 않았고, 국맥(國脈)은 이로 말미암아 무궁하였다. 이에서 말한다면, 한때 사림의 화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께서 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인도한 공이 또한 후세에 미친 것이다. 또 한 가지 말이 있다. 주(周) 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한때는 성현의 도가 행해지지 못했으나, 오히려 만사에 행하게 되었다. 대저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덕과 재주로써 쓰이기만 되었더라면, 왕도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귀취(歸就)한 바는 의견을 발표해서 후세에 법을 보이고 만 것에 불과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운수는 진실로 알 수 없지마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선생의 나아옴이 이미 이로써 이름하였으니, 그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음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유독 한스러운 것은 그의 실덕(實德)을 능히 밝혀서 우리 동방의 후생(後生)을 다행하게 하지 못했음이다. 또 대저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고 하면서 어찌 일찍 한 번 이루게 하는 데 만족할 수 있었으리오. 반드시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가 많아진 뒤에 크게 구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그렇지 못 하였다. 첫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크게 발탁되어서 높은 벼슬에 갑작스럽게 올랐고, 두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물러가기를 구했으나 이루지 못 하였으며, 세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귀양가던 날로 마친 것이었으니, 앞에서 이른바,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 많아진 뒤에’ 한 것은 모두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 의견을 발표해서 후세에 법을 보이는 일은 이미 미칠 수 없었은즉,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던 뜻은 마침내 어떠하였던가. 이런 까닭으로 논쟁하는 무리의 끝도 없는 말이 도리어 화복(禍福)과 성패(成敗)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世道)는 더욱 구차하여졌고, 이에 방자하게 지목하여서 서로 헐뜯고 비웃었다. 행신하는 자는 꺼리고 선비를 가르치는 자는 경계하였으며 선량한 자를 원수로 삼는 자는 효시(嚆矢)로 삼아서 우리 도의 병통을 중하게 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방훈의 남긴 뜻을 중화가 능히 따라서 사도를 붙들고 국운을 길게 한 훌륭한 뜻이리오. 또 후세의 착한 임금과 어진 정승이 무릇 세도를 바로잡을 책임을 맡은 자와 더불어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깊이 살펴서 힘껏 구원할 바이다. 그러므로 근년 이래로 바꿔 옮기고 고쳐서 새롭게 하여 호오(好惡)를 밝게 보인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선비된 자가 아직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霸道)를 천하게 알며, 정도(正道)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며,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자신을 수양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쇄소(灑掃)ㆍ응대(應對)하는 것으로써 이치를 궁구하여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데에 이르러서 차차로 능히 흥기 분발(興起奮發)하여 큰일을 하니, 이는 누구의 공이며,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인가. 상천(上天)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고, 성조(聖朝)의 교화(敎化)도 이에서 무궁하게 된다. 후일에 붓을 잡는 이가 만약 이를 상고하게 되면,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채는 사책(史冊)에 기재되어서 생각하고 읊조리는 이에게 전파됨이 더욱 많을 것이다. 어찌 이것으로써 한할 것이랴.”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태상에서 시법을 상고하였는데, “도덕이 있고 넓게 들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바름으로써 복사(服事)한 것을 정(正)이라 한다.” 하여,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내렸다. 중간에 서서 기대지 않는 것을 정(正)이라 한다고 한 곳도 있다.

능성현(綾城縣) 사람이 선생을 추모하여 서원을 지었는데, 방백(方伯)이 사유를 갖추어서 계문(啓聞)하므로, 죽수서원(竹樹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또 서적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선생은 한양(漢陽) 사람이다. 한양이 지금은 양주(楊州)에 예속되었는데, 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지었다.

효직(孝直)이 처음에는 호남 능성현에 귀양갔는데, 얼마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고사(故事)에, 재상에게 사사할 때에 어보(御寶)가 찍힌 문서가 없고 다만 왕지(王旨)만 받들어 시행하였다. 금오랑이 귀양지에 도착하여 선지(宣旨)하니, 공은, “국가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이 초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장차 간사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소장을 올려 말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다. 목욕한 다음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조용하게 죽으니, 38세였다.

눌재(訥齋) 박 창세(朴昌世 박상(朴祥))가 시를 지어 곡(哭)하기를,





 


남대(어사대)의 옛 자의가 / 不謂南臺舊紫衣

우거로써 초초하게 고향에 돌아올 줄 알았으랴 / 牛車草草故鄕歸

훗날 지하에서 서로 만날 때엔 / 他年地下相逢處

인간의 만 가지 잘못은 말하지 말자 / 莫話人間萬事非

하고, 또,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악수하면서 / 分手院前曾把手

그대가 황각(정부)에서 주애로 감을 괴이하게 여겼다 / 怪君黃閣落朱崖

주애와 황각을 분별하지 마소 / 朱崖黃閣莫分別

겨우 구원(황천)에 이르게 되면 차등 없다오 / 纔到九原無等差 하였다.

 


공의 당손(堂孫) 조충남(趙忠男)이 퇴계(退溪)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퇴계가 시를 짓기를,



의봉이 임금의 뜰에 상서롭게 노닐던 것을 생각했는데 / 相思儀鳳瑞王庭

어제 옥수(남의 후손을 기리는 말)를 만나 그의 전형(얼굴 모습)을 상상한다 / 玉樹今逢想典刑

성스럽고 아름다움을 내 어찌 유양(남의 장점을 들어서 말함)하리오 / 聖美揄楊吾豈敢

눈서리 천리길에 그대 옴이 미안하다 / 雪霜千里愧君行  하였다.








박영 전(朴英傳)

1471(성종 2)∼1540(중종 35).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지(祗)의 딸이다.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박영은 무자생이고 자(字)는 자실(子實)이다.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으나 물러나서, 벼슬길에 이르기를 구하지 아니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천거에 의하여 다시 조정에 나와서 벼슬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배척당해 김해 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또 무함으로 인하여 신문(訊問)을 당하였는데 다리뼈가 부서지고 꺾어졌으나 겨우 죽음만은 면했다. 돌아가서 여러 가지 방문(方文)으로 치료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보유 : 대대로 선산(善山)에서 살았다.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전 교리(校理) 정붕(鄭鵬)과 이학(理學)을 강론하였으며 의술(醫術)에는 더욱 정묘하였다. 무인년에 천거되어 승지로 임명되었다. 그때에 도승지 권벌(權橃)이 진계하기를, “내의원 제조를 《대전(大典)》에는 다만 승지가 겸한다 하였으니, 도승지가 으레 겸임하는 것은 법의 본뜻이 아닙니다. 지금 승지 박영은 의약(醫藥)에 정(精)하고 밝으니, 겸임시켜서 어약(御藥) 조제하는 것을 감독케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공은 굳이 사퇴하였는데, 당시 논의는 두 사람을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사화가 일어나자 공은 병조 참판으로서 배척당했다. 경진년에 김해 부사가 되어 선산에서 물길을 거쳐 부임하였다. 고을 백성 김억제(金億齊)가 송사(訟事)에 진 것을 소리치면서 박영을 원망하여,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집권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했다고 얽어 무고하였다. 조옥에 잡혀 와서 추문당했는데 혹독한 형신을 받았다. 뼈가 부서진 뒤에 비로소 김억제가 무고한 것임을 알고 드디어 사건을 드러내어, 경주가 비록 같은 도(道)이나 거리가 멀어서 부임한 뒤에 일찍이 유인숙을 본 적이 없다는 일과 김억제가 송사에 진 일을 신문하도록 아뢰면서, 증거를 대어 무고라고 논란하였다. 김억제는 반좌(反坐)되고 공은 수레에 실려 고향에 돌아왔는데 신사년 가을에 관작을 삭탈당했다. 일찍이 낙동강 서쪽 언덕에 따로 작은 정자를 짓고 편액(扁額)을 □□라 하였다. 항상 아이 종을 시켜 약재를 채취해 두고 인명을 구제하였다. 다시 서용(敍用)되어서는 경상도 좌병사 자리를 구했으나, 얼마 못 되어서 죽었다. 젊었을 때는 쾌활하여서 구속받지 않았다.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하루아침에 문득 벼슬을 사면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평소에 지향하던 것을 바꾸고 글을 읽으니, 정운정(鄭雲程) 선생이 성리서(性理書)를 가르쳤고, 늙은 뒤에는 매우 상득(相得)하여 서로 돕는 즐거움이 있었다. 덕행(德行) 높은 모습이 순후(醇厚)하고 원만하였으며,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데에는 스스로 깨닫는 것을 우선하였다. 저술한 시와 문이 모두 학문을 깨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의약에도 마음을 써서 인명을 구제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대개 사마공(司馬公)의 뜻이었다.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러 죽었다.

이복고(李復古 이언적(李彦迪))는 만시(挽詩)를 지어서 곡하기를,



하늘이 사문을 버리지 않아서 / 天不喪斯文

동국에 아직도 사람이 있었네 / 東隅尙有人

연원은 원래 유래한 것이 있었고 / 淵源元有自

영매한 기상은 또 무리에서 뛰어났다 / 英邁又超倫

헌면은 구름 밖의 것으로 여겼고 / 軒冕浮雲外

흐르는 물가에서 시를 읊조렸다 / 吟哦逝水濱

학문을 탐색하여 오묘함을 다했고 / 窮探極遐妙

높이 진순한 경지에 들었다 / 高步入眞純

바람과 달 끝없는 지경이고 / 風月無邊境

하늘과 땅 눈에 가득한 봄이었다 / 乾坤滿眼春

한 가닥 물 근원으로서 넓고 아득함을 보나니 / 一源觀浩渺

만 가지 물이 모두 화락하고 순후하였다 / 萬物惣熙淳

그윽한 공부는 시 천 권을 검토하였고 / 幽討詩千卷

맑은 흥취는 술 한 항아리를 즐겼다 / 淸歡酒一樽

인명을 살리는 데에는 약물에 의지하고 / 活人憑藥餌

나라의 병통을 고치는 것은 경륜 속에 숨겨져 있다 / 醫國祕經綸

나이 많은 때에 태운을 만났고 / 遲暮時逢泰

풍운에 신세가 다시 둔(비색)하였다 / 風雲道更屯

단심은 하늘 북쪽을 향했고 / 丹心天北極

백발은 바다 동쪽에 늙었도다 / 素髮海東濬

도용(백성을 덕화하는 일)하는 솜씨를 펴지 못했으니 / 未展陶鎔手

차라리 확삭(늙어서도 게으르지 않는 것)한 신하와 같이 하였다 / 寧同矍鑠臣

남긴 글은 사류에 전해졌고 / 有言傳士類

생민의 복 없음을 탄식하다 / 無福嘆生民

어리석은 몸이 일찍이 가르침을 입었으나 / 愚魯蒙曾擊

어긋나서 친자하지 못 하였다 / 乖離炙未親

덕용을 때로 잠깐씩 뵈었으나 / 德容時暫接

아름다운 가르침은 자주 듣기 어려웠다 / 嘉訓聽難頻

마을 농가에서 만났을 때 특히 관곡하였고 / 村墅逢殊款

산당에서 모이게 됨은 인연이 있었다 / 山堂會有因

티끌 회포는 도리어 국척했고 / 塵懷還跼蹐

좋은 언약은 마침내 모순되었다 / 良約竟矛盾

봄에 작별한 뒤로 의용이 격했고 / 春別儀形隔

가을로 기약한 것은 꿈만이 새롭구려 / 秋期夢想新

갑자기 신선길로 떠났음을 듣고 / 忽聞仙路遠

큰 의논이 없어졌음을 길이 통탄한다 / 長痛大論湮

거문고 줄이 끊어졌으니 / 妙絃從此絶

그윽한 회포를 누굴 향해 말하리 / 幽抱向誰陳

늦은 가을 남쪽으로 가는 길 / 秋晩南行路

석 잔 술로 다만 눈물 적신다 / 三杯但沾巾 하였다.



 

부 정붕 전(附 鄭鵬傳)

1467(세조 13)∼1512(중종 7).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선산 출신.

희언(希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由)이고, 아버지는 현감 철견(鐵堅)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척언 : 사문(斯文) 정붕(鄭鵬)은 선산(善山)이 본관이다. 남에게 구속됨이 없고 높은 절조가 있었다. 일찍이 연산조 때 홍문관 교리로서 일을 논란하다가 장배(杖配)되었다. 반정 후에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또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는데 벗들이 취임하기를 권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서 사퇴하였으며 그 뒤에도 여러 번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은명(恩命)이 간곡하시므로 부득이 조정에 나갔으나, 마음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향에 물러와서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다.” 하였다. 마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있었는가를 물으니, “내가 교리로서 사은(謝恩)하고 대궐에 들어가서 승정원 문 앞에 나아가니, 서각(犀角)띠를 맨 재상이 돌아서서 있었다. 내가 놀라 머뭇거리며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조금 있다가 돌아보는데 그의 용모를 보니 곧 홍경주(洪景舟)였고, 그의 지위를 물으니 찬성(贊成)이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에 놀라워서 몸을 피해 물러났고, 벼슬에 뜻이 없어졌다.” 하였다. 최후에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다. 부임하여 정사를 간략하게 잘 다스렸다. 창산(昌山) 성희안(成希顔)과는 젊었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때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잣과 꿀을 부탁하였다. 정(鄭)은 답하는 편지에,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民間) 벌통 속에 있는데, 태수(太守 원)된 자가 어디서 구하겠소.” 하였더니, 창산이 부끄럽고 후회되어서 사죄하였다. 그 뒤에 또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돌아와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연산조에 운정(雲程)이 홍문관 교리로 있었는데, 연산이 옥당(玉堂)에게 묻기를, “내가 정성근(鄭誠謹)을 베어 죽이고자 하는데, 가부를 논의해서 말하라.” 하였다. 여러 관원이 다 모여서 운정(雲程)을 기다렸다가 결정짓고자 하였다. 운정이 와서는, “베어 죽임이 가합니다.” 하였다.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이 깜짝 놀라, “운정이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한 사람 죽는 것과 우리들 모두 죽는 것과 어느 편이 낫겠소.” 하였다. 어떤 사람이 송당(松堂)에게, “정 선생의 옥당에서의 논의는 비상시에 처신하는 데에는 능하다 할 수 있으나, 출처(出處 진퇴)로써 말하면 극진하지 못한 듯하다.” 하니, 송당도, “그렇다.” 하였다. 정운정 선생은 영남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크고 거룩하였으며, 신장이 8척이었다. 성리학(性理學)에 연구하여 정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논어(論語)》의 글과 같이 하면 내가 이적(夷狄)을 가르치더라도 또한 인의(仁義)를 알게 하겠다.” 하였다. 연산 초년에 조정에 벼슬하였는데, 하루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문묘(文廟) 위판(位板)을 승사(僧舍)에 옮기는 꿈을 꾸었다.” 하였다. 연산이 황란(荒亂)하게 되어서 성균관을 연산이 놀이하는 장소로 만들고, 위판을 고산암(高山庵)으로 옮겼다. 또 태평관(太平館)에 옮겼다가 다시 장악원으로 옮겼다. 위판의 차례가 없었고, 향불도 오랫동안 끊어져 신(神)과 사람이 분하게 여김이 지극하였다. 그때에 강혼(姜渾)ㆍ심순문(沈順門)이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정을 나누는 기생이 있었다. 선생이 두 사람을 경계하여, “빨리 멀리하여서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 하였다. 강(姜)은 곧 버렸으나 심(沈)은 선생의 경계를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두 기생이 궁중에 뽑혀 들어가서 연산의 총애를 받았고, 심은 마침내 잘못도 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을 탄복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문묘가 헐릴 것을 안 것은 아마 미리 요량했던 것이었고, 대개 꿈에 보았다는 것은 핑계한 것이리라.” 하였다.



[주]거문고 줄이 끊어졌으니 : 춘추시대 초(楚) 나라 사람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鍾子期)는 음조를 잘 들었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은 뒤에 자기의 음조를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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