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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록 보유 (己卯錄補遺卷上) 해제 2

칠봉인 2017. 6. 18. 08:36

기묘록 보유 (己卯錄補遺卷上) 해제  2

 

이윤검 전(李允儉傳)

1451(문종 1)∼1520(중종 15).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자문(子文). 할아버지는 달량만호(達梁萬戶) 지로(智老)이고,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순생(順生)이며, 어머니는 회덕현감 유맹지(柳孟智)의 딸이다.



이윤검은 □□생이고 자(字)는 자문(子文)이다.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기묘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있었는데, 망명(亡命)한 사람 김식(金湜)을 숨겨 주었다는 죄목으로 잡혀 와서 형벌을 받았다. 죄를 면하고 파직되어 돌아와서, 걱정하고 분히 여기다가 죽었다.

보유 : 이희민(李希閔)의 아비이다. 경진년 이신(李信)의 고사(告辭)에, “김대성(金大成)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를 능히 용납할 자는 오직 영해뿐이다.’ 하였다.” 한 말이 있었던 까닭으로 김식을 숨겼다는 의심을 받아서 잡혀 심문받았으나 증거가 없었으므로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최명창 전(崔命昌傳)

1466(세조 12)∼1536(중종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여신(汝愼)·자신(子愼), 호는 송석거사(松石居士).

천보(天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원사 유(濡)이고,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철손(鐵孫)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예경(尹禮卿)의 딸이다.


최명창은 병술생이고 자(字)는 자신(子愼)이다. 갑자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배척당해서 산직(散職)에 있었다.

보유 : 기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자 슬퍼하던 끝에 병이 나서 오랫동안 과거 공부를 폐하였다. 갑자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예조 참판으로서 배척당해서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경진년 여름에 병으로써 사직하고 돌아와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다.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기를 구하였는데, 감사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법을 지켜서 굴복하지 않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었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여생을 마쳤다. 대개 공이 김안로(金安老)를 소인(小人)이라고 지목했던 까닭으로 한번 물리침을 당한 다음 회복되지 못 하였다. 공이 죽은 다음 해에 김안로가 패하였다. 공은 셋집에서 살다가 만년에 성(城) 동쪽 쌍계동(雙溪洞)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스스로 송석거사(松石居士)라 호(號)하니, 쓸쓸하고 청빈함이 숨어 사는 사람 같았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가 송정기(松亭記) 및 공의 비명(碑銘)을 지었다 한다.

 






윤세호 전(尹世豪傳)

1470(성종 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영(士英). 태산(太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잠(岑)이고, 아버지는 직장 지준(之峻)이며,

어머니는 이계창(李繼昌)의 딸이다



윤세호는 경인생이고 자(字)는 사영(士英)이다. 계해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까지 올랐으나 물리침을 당하고, 외임(外任)으로 삼척(三陟)ㆍ진주(晉州) 등 고을을 역임하였다.

보유 : 이때에 전라 감사가 되어 부임할 제 우연히 충청 감사 신제(申濟)와 이야기하다가, 공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을 어찌 죽이기까지 하였는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였다. 당시 재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탄핵 파직되었으나, 오래 되지 않아서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외임으로 삼척ㆍ진주를 역임하였는데, 신묘년 3간(奸) 심정(沈貞)ㆍ이항(李沆)ㆍ김극복(金克福) 이 패하게 되자, 비로소 조정에 있게 되었으며 6경(卿)으로 올랐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였는데, “일을 집행함이 견고(堅固)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공경하며 선을 행한 것을 간(簡)이라.” 한다 하여서, 공간공(恭簡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이계맹 전(李繼孟 傳)

1458(세조 4)∼1523(중종 18).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또는 묵암(墨巖).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며, 부여감무 의(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대정(大種)이고, 아버지는 영(潁)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이계맹은 무인생이고 자(字)는 희순(希醇)이며, 기유년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호방(豪放)하여서 품행을 구속받지 않았다. 기묘년 선비들이 이런 것을 단점으로 여겼고, 자신도 당시 논의에 부족함을 알아서 김제(金堤)에 있는 시골집에 물러가서 살았다. 사화가 일어난 뒤에 남곤(南袞) 일파가 공이 선비들에게 분함을 품었다고 여겨서 그를 급급(汲汲)히 인진(引進)하여 당인(黨人)을 미워하는 데 함께 하라고 다시 찬성으로 삼았으나, 공은 조금도 예전 일을 혐의쩍게 여기지 않고, 매양 당인을 해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조정에서 주장하여 금고(禁固)된 사람들을 풀어 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집권자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명망이 중한 노인이었으므로 비록 현저한 배척은 받지 않았으나 조정에 겨우 용납되었다. 시사(時事)를 개관(槪觀)하고, 걱정하고 분하게 여기다가 죽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었다. 에, “희순 이계맹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와 문장을 칭찬하였다. 전주(全州)에서 살았으며 깨끗한 행실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하였다. 전주는 김제라 하는 것이 옳다.

척언 : 계유년에 내가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이상(二相) 이계맹(李繼孟)은 평안 감사가 되었다. 그때에 그를 헐뜯는 자가 나에게, “이공이 덕암(德岩) 위에다가 특별히 큰 누각을 짓는데, 규모가 굉장하고 역사(役事)가 거창하여서 백성이 매우 원망하고 괴로워한다.” 하였다. 나는 듣고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또 서쪽[西路]에서 오는 사람에게 물은즉 대개 같은 말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앞서 말한 자도 신용할 만한 사람이니 그 사람의 말이면 한 사람의 말만으로 믿어도 좋은데, 뒤에 들은 말도 이와 같으니 이것은 반드시 틀림없는 일이다.” 하였다. 원(院)의 동료들과 의논하고, 탄핵하여 계(啓)하기를, “평양은 유람할 곳이 가장 많아서, 우리 나라에 제일이므로 별도로 누각을 구축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곤란한데 더구나 급한 일도 아니니, 곧 추문(推問)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여, 곧 윤허가 내렸고 또 체임(遞任)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다시 들은즉 다만 일 없는[遊手] 관속(官屬)을 사역(使役)했을 뿐이었고, 두어 칸 정자를 지었는데 열흘이 못 되어서 마쳤다 하니, 그릇된 소문이 이와 같았다. 이공은 도량이 넓어서 후진(後進)을 충심으로 대접하였다. 비록 헐뜯음과 논박을 당해도 조금도 혐의쩍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권장하였다. 오래 되지 않아서 공이 참찬(參贊)이 되었는데, 나는 검상(檢詳)으로서 공의 집에 가서 뵈었다. 지난날 그릇된 일로써 마음에 아직 미안하여 머뭇거리며 사과하니, 공은 술을 내어 마음을 풀고 크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주장해서 나를 논박한 사람이 자네라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소문이 그릇된 것이니 어찌 꺼림칙한 형적(形迹)이나마 남길 것인가. 내 일찍부터 자네 형제의 지기(志氣)를 아름답게 여겼다. 더욱 힘쓰고 게으르지 말라.” 하였다. 오히려 선진(先進)에게 칭찬을 받았다. 한 번 논박을 만나면 원망과 분한 마음을 품어 문득 중상하기를 생각하는 자와는 기상이 같지 않았다.

보유 : 젊었을 때 김일손(金馹孫)ㆍ이주(李冑)와 같이 학업에 뜻을 두고 교유하였는데, 한훤(寒暄) 선생은 항상 공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로써 허여(許與)하였다. 여러 차례 변란을 겪어 몸은 유배당했으나, 우뚝하게 조수(操守)가 있어 속상(俗尙)을 따르지 않았다. 사림(士林)이 중히 여기고 의지하여서 군자라 일렀다. 무인년에 지진이 일어나는 재변(災變)이 있어서 장순손(張順孫)을 파직하고 조계상(曹繼商)을 파출(罷黜)하였다. 이때에 공은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있다가 돌아와서 이 일을 듣고 시사(時事)를 개탄하였다. 드디어 당시 논의에 의심을 받아 논핵당하여 이상(二相) 자리에서 갈렸다. 얼마 안 되어 휴직하기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갔으나, 다시 찬성(贊成)으로 임명되었다. 사림에게 화를 얽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라는 말을 주장하면서 그들을 죄에서 풀고자 하였으나, 되지 않았고 얼마 후에 죽었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였는데, “공경하고 바르며 자혜(慈惠)로운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을 제도 있게 주관하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하여, 문평공(文平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상 전(申鏛 傳)

1480(성종 11)∼1530(중종 25).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용(大用), 호는 위암(韋庵).

좌의정 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자준(自準)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말평(末平)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신상은 경자생이고 자(字)는 대용(大用)이다. 무오년에 진사가 되었고, 계해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비록 파척(罷斥)까지는 당하지 않아서 조정에 겨우 용납되었으나, 항상 산반(散班)에 있다가 죽었다.

태상(太常)에서, “신상의 사람됨은 천성이 단정하고 응중(凝重)하였으며, 마음씀이 견고하고 확실하였다. 덕성(德性)을 수양하였고 지절(志節)을 숭상하였다. 사람을 충(忠)과 신(信)으로써 접응하고, 정사(政事)는 공경을 다해 집행하였다. 이해(利害) 관계에는 조심하여 생각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당시에 촉망받고 추중(推重)받는 것은 비록 기묘년의 여러 현인이라도 공의 위에 나설 사람이 없으니, 후세 사람이 경앙(景仰)할 사실을 시호(諡號)에 자세하게 밝히는 것이 가하다. 지위는 비록 6경이나 공의 덕으로 본다면 만족하다 할 수 없다. 또 52세에 죽어서 크게 쓰이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시법을 상고하니, ‘충신(忠信)으로써 남을 사랑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한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사욕을 이겨낸 것을 절(節)이라 한다.’ 하였다.” 하여, 문절공(文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사균 전(李思鈞傳)

1471(성종 2)∼1536(중종 3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희(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반(繼潘)이고, 아버지는 판관 식(埴)이며,

어머니는 부사 김숙(金潚)의 딸이다



이사균은 신묘생이고 자(字)는 중경(重卿)이다. 무오년에 급제하였고, 정묘년에 중시(重試)하였다. 기묘년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임명되었다. 당인(黨人)을 치죄(治罪)함이 불가함을 적극 논하다가 배척을 받아 산반(散班)에 있게 되었다. 뒤에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보유 : 성품이 거만하였고 작은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기묘년의 여러 사람과 화

협(和協)하지 못하여서 여러 번 탄핵받았고 지방으로 나가서 전주 부윤이 되었다. 사화가 일어난 뒤에 남곤(南袞) 일파는 공이 그들에게 분함을 품어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드디어 부제학에 제수되었고, 공은 명을 받은 다음 곧 길을 떠났다. 정암(靜庵)ㆍ충암(冲庵)이 귀양가던 도중에 공의 행색(行色)을 듣고 서두르면서, “우리들이 저놈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고, 모두 멀리 피하려 하였다. 공은 그들이 있는 곳을 탐문(探問)하고 몸소 방문하였다. 그들이 정사를 하면서 원한을 모으게 된 사실을 책망한 다음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작별하였다. 숙배(肅拜)하던 날에 그들에게 죄주는 것이 불가함을 극진하게 아뢰었다. 이리하여 배척을 받고 산지(散地)에 있게 되었다. 신묘년 세 간흉이 패한 뒤에 비로소 청요직(淸要職)에 제수되었고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그때는 영상(領相) 홍섬(洪暹)이 이조 정랑이었는데, 술이 흠뻑 취해서 허항(許沆)의 집을 지나갔다. 허항은 묵은 분함을 품고 있었으므로 홍섬이 취한때를 노려 죄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마침내 김안로(金安老)에게 무함(誣陷)하기를, “홍섬이 저의 집에 와서 책상 위에 있는 〈속강목진회기(續綱目秦檜記)〉를 보고 나에게, ‘가군(家君 부친)이 일찍이 그대에게 이 글을 읽히고자 하였었다.’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안로가 크게 성내어 홍섬을 신문하고, 그의 아비인 의정(議政) 홍언필(洪彦弼)까지도 아울러 죽이고자 하였다. 홍섬은 신문 중에 2백여 대의 곤(棍)을 맞았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공이 좌우(左右)에게 말하기를, “홍섬은 어리석은 아이이니 가여울 것도 없지마는, 다만 천관(天官 이조 벼슬)으로 입사(入仕)하였은즉 당시의 이름난 명사들이다. 내가 그의 아비를 자세하게 아는데 참으로 망령된 사람이다. 그러나 애매한 일로써 명사를 죽이는 것은 임금의 누(累)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들의 억울함을 신구하고자 하여, 낭관(郞官)을 시켜 계초(啓草)를 쓰게 하니 좌우가 묵묵히 말하지 않았다. 공이 독촉하여 그만두지 않으니 김 상공(金相公 김안로)에게 물어본 다음에 계(啓)하는 것이 가하다는 이가 있었다. 공이 벌컥 화를 내면서,”살리고 죽이는 권리는 임금에게 있는 것이다. 어찌 대신에게 물어서 결정할 것인가. 비록 묻는다 하더라도 어찌 무고(無辜)한 사람을 차마 죽을 곳에 두라고 할 것인가.” 하고, 곧 계목(啓目)을 써서 친히 예궐(詣闕)하였다. 임금도 그들의 애매한 정상을 듣고 드디어 옳다고 윤허하여, 죄를 결정해서 정배(定配)하였다. 대관(臺官)이 즉시 공을 논박하여 면직되었다. 얼마 뒤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경상 감사로 좌천되었다. 배사(拜辭)하던 날, 김안로가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안에다가 전송하는 자리를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숭례문(崇禮文)을 경유해서 갔다. 대개 예전에는 3공이 길섶에 나와서 전송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공이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서 소환되자, 중한 견책(譴責)을 받게 될까 의심하여 걱정하고 분하게 여기다가 등창이 나서 충주(忠州) 객관에서 죽었다. 향년(享年) 68세였다.

 






유인숙 전(柳仁淑 傳)

1485(성종 16)∼1545(인종 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명(原明), 호는 정수(靜叟). 의(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식(宗植)이고, 아버지는 사간 문통(文通)이며,

어머니는 이추(李抽)의 딸이다.



유 인숙은 을사생이고 자(字)는 원명(原明)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경오년에 급제하였다. 승지로서 배척을 당해 경주 부윤이 되었다. 또, 무고를 당하여 신문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정유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보유 : 사화(士禍)가 나던 날, 도승지로서 조옥(詔獄)에 갇혔다가 얼마 뒤에 석방되어서 경주 부윤이 되었다. 경진년 가을에 김해 사람 김억제(金億齊)가 송사에 지고 그 고을 부사 박영(朴英)을 원망하여서, 박영이 공과 함께 집정(執政)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는 무고를 하였으므로, 국문(鞫問)을 당했다. 공은 부임한 뒤에 일찍이 박영을 보지 못했다는 증거를 대어 무고란 것이 밝혀졌고, 김억제는 무고한 죄로 반좌(反坐)되었으나 공도 면직되어 시골에 우거(寓居)하였다. 신사년 가을에 관망(觀望)하여 세도쪽에 붙었다는 것으로써 고신(告身)을 빼았겼다. 정유년 겨울에 다시 등용되어 대각(臺閣)을 역임(歷任)하고, 갑자기 경상(卿相) 자리에 올랐다. 을사년 명종(明宗)이 즉위할 때에, 숭정(崇政) 이조 판서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기(李芑) 등에게 배척당하여 귀양가게 되었고, 또 정순붕(鄭順朋)이 모함하여 도중에서 자살하라는 명이 뒤쫓아 내렸다. 며칠 뒤에는 역적으로 논죄(論罪)되어, 아들 유희증(柳希曾)ㆍ유희안(柳希顔)ㆍ유희맹(柳希孟)ㆍ유희민(柳希閔)이 모두 연좌되어서 죽었다.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에 붙은 이름도 없는 방서(謗書)를 올려서, 드디어 죄를 더했다. 여러 아들의 집과 재산을 관(官)에서 몰수하였다. 지금 임금 경오년에, 영의정 이준경(李俊慶)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신원(伸冤)하여, 정축년 겨울에 공의 관작을 회복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신광한 전(申光漢傳)

1484(성종 15)∼1555(명종 10).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

기재(企齋)·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공조참판 장(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형(泂)이다.

어머니는 사포(司圃) 정보(鄭溥)의 딸이다.



신광한은 갑진생이고 자(字)는 한지(漢之)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경오년에 급제하였다. 승지로서 배척당하여 삼척 부사가 되었다가 곧 파직되었으나, 정유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승지는 이조 참의로 하는 것이 옳다.

보유 : 이조 참의로서 배척당하여 삼척 부사가 되었다가, 경진년 가을에 면직되었다. 신사년 가을에는 어리석고 망령스러운 자라고 징계를 받아 축출당하고 관직을 삭탈당하여, 여주(驪州)에 우거하였다. 정유년에 다시 등용되었고, 갑진년에는 이조 판서로서 대제학을 맡았다. 을사년 가을에는 우참찬으로서 두 번이나 충순당(忠順堂)에 입시하여 면대하였고, 위사훈록(衛社勳錄)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궤장(几杖)을 받은 다음 죽었다. 호(號)는 기재(企齋)이다. 정유년 겨울에 위사훈록이 혁파되었다. 1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였는데, “넓게 듣고 많이 보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거처하는 데에 공경하게 하고 행신하기를 간소하게 하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하여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정순붕 전(鄭順朋 傳)

1484(성종 15)∼1548(명종 3).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이령(耳齡), 호는 성재(省齋). 포(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평 충기(忠基)이고, 아버지는 헌납 탁(鐸)이며,

어머니는 도진손(都震孫)의 딸이다. 형조판서 백붕(百朋)의 아우이다.



정순붕은 갑진생이고 자(字)는 이령(耳齡)이며, 갑자년에 급제하였다. 참의(參議)에서 전주 부윤이 되었다가 곧 파직되었고, 정유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보유 : 이조 참의로서 배척을 당하여 전주 부윤이 되었다. 경진년에 면직되었고, 신사년 가을에는 종[奴]의 얼굴같이 하고 아첨한다는 일로써 관작을 삭탈당했다. 정유년에 다시 등용되어 청현(淸顯)한 벼슬을 역임하였다. 을사년 가을에 공조 판서로서 글을 올려, 좌의정 유관(柳灌)ㆍ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ㆍ형조 판서 윤임(尹任)을 대역(大逆)으로 모함하여 위사원훈(衛社元勳)이 되었다. 아들과 사위도 모두 공(功)이 기록되었고, 우의정으로 뛰어오른 후 죽었다. 지금 임금 경오년에 관작을 삭탈당했고 정축년에는 공권(功券)을 혁파했으며, 자손들은 과거 보는 것을 정지시켰다. 공은 20년 동안이나 폐출(廢黜)되어서 군색한 것이 의식(衣食)이었으므로 생계를 영위(營爲)하는 마음을 일찍이 잊지 못 하였다.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병을 무릅쓰고 예궐(詣闕)하여서, 무함으로 남을 해치고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하여 또 글을 올려서 무함하였으니, 그의 탐독(貪毒)한 것이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의 무리보다 심하였다.

 



이성동 전(李成童傳)

생몰년 미상.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차옹(次翁), 호는 졸옹(拙翁). 수양(守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중손(仲孫)이고, 아버지는 판관 희안(希顔)이다



이성동은 □□생이고 자(字)는 차옹(次翁)이다. 을묘년에 급제하였고 예조 참의로 있다가 파직되었다.

보유 : 기묘년 6월에 예조 참의로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7월에 사간(司諫) 이청(李淸)ㆍ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ㆍ정언(正言) 김전(金錢)ㆍ권전(權磌) 등과 함께 소를 올려 3공의 재기(才氣)와 장단점을 논하여, 임금에게 그들의 단점을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10월에는 대사헌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합사(合辭)하여, 정국 공신으로 외람되게 기록된 사람을 삭제하도록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에는 전 대간(臺諫)을 거느리고 예궐하여, 조광조 등과 함께 옥에 가서 그들과 같이 죄받기를 청하였다.

이듬해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다시 등용되어 1521년 강원도관찰사·예조참의를 지냈으나 조광조 일파로서의 죄가 추론되어 삭직당하였다.

 







유용근 전(柳庸謹傳)

1485(성종 16)∼1528(중종 2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규복(圭復). 균(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습(仁濕)이고,

아버지는 판서 빈(濱)이며, 어머니는 이인행(李仁行)의 딸이다.



유용근은 을사생이고 자(字)는 규복(圭復)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병자년에 급제하였다. 절도사로서 진원(珍原)에 귀양갔다가, 연일(延日)로 옮겨서 무자년에 죽었다.

보유 : 공은 얼굴 생김새가 엄숙하고 거룩하였다. 모략에 능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능하여서 동배(同輩)들은 장수 재격(才格)으로 기대하였다. 기묘년에 승지로 있었는데, 이때에 북방에서는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이 많았다. 임금은 적변(賊變)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이상(二相) 이장곤(李長坤)을 북방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조 판서 신상(申鏛)이 계하기를, “좌찬성과 우찬성을 일시에 체임하면 아상(亞相 재상의 다음 자리)의 중임을 오래 비우게 되니 마땅하지 못합니다. 지금 북도에 비록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이 있긴 하나, 다시 더 큰 일이 있으면 또 어떤 사람을 보내렵니까. 승지 유용근 같은 젊은 사람을 보내어 저 땅을 순무(巡撫)하게 하고, 변경 일을 위임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는 중신(重臣)을 보내어 변경을 진압하고자 하였는데, 경의 말도 마땅하다. 유용근을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병사(兵使)로 삼아라.” 하였다. 12월에 임소(任所)에서 귀양살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적소에서 죽었다. 적가(嫡家)에는 자녀가 없었다.

 






김구 전(金絿 傳)

1488(성종 19)∼1534(중종 2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

의몽(義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예(司藝)이고, 아버지는

대흥현감(大興縣監)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이겸인(李兼仁)의 딸이다.



김구는 무신생이고 자(字)는 대유(大柔)이다. 정묘년에 생원과 진사에 장원하였고,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부제학으로서 해남(海南)에 귀양갔고, 계사년에 왕은(王恩)을 입어 석방되었으나 곧 죽었다.

보유 : 갑술년에 홍문관 저작(著作)으로서 경연에 입시했다가, 《강목(綱目)》에, 간특하고 숨어있는 죄[奸伏] 적발했다는 대목을 진강(進講)하게 되었을 때, 계하기를, “인신(人臣)은 백성을 성(誠)과 신(信)으로써 인도하고, 총찰(聰察)하는 것은 일삼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대개 풍자한 것이었다. 공은 정치의 원리[洽體]를 알아서, 어떤 일에든 바르게 간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므로 사림(士林)이 중하게 여겼다. 사화가 일어나자 제공(諸公)과 함께 조옥에 갇히어, 정암(靜庵)ㆍ충암(冲庵)과 같은 죄목으로 국문받았다. 공초하기를, “신은 나이 32세입니다. 성품이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습니다. 다만 옛사람이 스승과 벗끼리 돕던 일을 사모하여 뜻이 같은 사람과 교유했을 뿐입니다. 인물을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게 하는 것은 신같이 지위 낮은 자의 할 바가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자를 미워하였습니다. 한갓 공정한 논의를 알아 서로 시비했을 뿐입니다. 붕당을 맺어 과격하게 하고 국론을 거꾸로 되게 하며, 나라 정사를 나날이 그릇되게 했다는 것은 신의 실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사형으로 정해 있었는데, 임금이 특명으로 곤장을 쳐서 유배하도록 하였다. 또, 대신이 고집하여 형장(刑杖)을 결행(決行)하고 개령(開寧)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7일에 다시 의금부에 모이도록 명하여 전지를 받고 떠났다. 김정전(金凈傳)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12월에 배소를 절도(絶島)로 옮기게 되어서 남해(南海)에 정배되었다, 경진년 봄에 부인 □씨가 한 필의 말로 짐 한 바리와 창두(蒼頭 종) 5, 6명을 거느리고 공의 배소에 뒤따라갔다. 이때는 김대성(金大成)이 도망중이어서 탐색이 엄중하였다. 갈림길을 지키는 군졸이 서로 바라보면서 수직(守直)할 정도이고, 무릇 나그네가 있으면 모두 수검(搜檢)한 뒤에 보내었다. 경상 감사 반석평(潘碩枰)이 길에서 여행하는 어떤 부인이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길가에 머물러 사정을 물어본 다음, 민망하고 측은하게 여겨서 양식과 물품을 찾아 주고, 또 하도(下道)로 가는 영리(營吏)를 시켜 배행(陪行)하게 하였다. 공은 드디어 죽림(竹林) 속에 집을 짓고 살았다. 신묘년 11월에, 임피(臨陂)로 옮겨졌다가, 계사년에 사(赦)를 입자 곧 예산(禮山)으로 달려가 부모의 무덤에 곡하고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대개 남해에 있을 때에 부모의 상을 당했던 것으로 추세(追稅 뒤를 좇아서 복을 입음)하는 정성을 펴고자 하였던 것인데, 병들어서 1년 만에 죽었다. 공은 필력이 경건(勁健)하여 종요(鍾繇)ㆍ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본받았다. 일찍이 중국 사람이 공의 글씨를 보배로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드디어 쓰지 않았으므로 그의 필적이 세상에 드물다. 아들 김균(金鈞)은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공서린 전(孔瑞麟傳)

1483(성종 14)∼1541(중종 36).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희성(希聖)·응성(應聖), 호는 휴암(休巖).

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로(悌老)이고, 아버지는 의달(義達)이며,

어머니는 박원인(朴元仁)의 딸이다.



공서린은 계묘생이고 자(字)는 희성(希聖)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승지로서 배척받아 외관(外官)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분격한 마음을 품고, 당시 재상을 지척(指斥)하여 봉사(封事)를 올려 논란(論難)하고 천심(天心)이 깨닫기를 희망하였으나, 도리어 중상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뒤에 다시 산반(散班)에 등용된 다음 죽었다.

보유 : 천성이 강직하여 사소한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승지로 임명되어서 보익(補益)한 것이 많았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에 마침 윤자임(尹自任)과 숙직하였었다. 근정전(勤政殿)에 불빛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윤자임 및 주서(注書)ㆍ한림(翰林)과 함께 합문(閤門) 밖에 나아갔다가 함께 하옥되었으나 영상(領相)이 구원하여 다음날에 석방되었다. 이날 전(前) 승지 유인숙(柳仁淑)ㆍ홍언필(洪彦弼)과 함께 미복(微服)을 하고 대궐 뜰에 나아가서 계하기를,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옥에 나아가서 그들과 같이 죄를 받겠습니다.” 하며, 종일토록 논계하였다. 그 뒤에 공은 황해 감사로 나갔는데, 소장(疏狀)을 올려 당인(黨人)이 죄가 없다는 것을 극력 말하여 거의 중죄(重罪)에 빠질 뻔하였다. 특별히 관작을 삭탈하도록 명하였으나 오래지 않아서 다시 등용되었다.

 



한충 전(韓忠傳)

1486(성종 17)∼1521(중종 1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 청주 출생이며

호군(護軍) 자강(自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지(智)이고,

아버지는 주부 창유(昌愈)이며, 어머니는 교위(校尉) 강철손(姜哲孫)의 딸이다.



한충은 병오생이며 자(字)는 서경(恕卿)이다. 계유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이르렀는데, 곧 거제(巨濟)에 귀양갔다. 또 무함을 받아서 옥중에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척언 : 승지 한충은 기개가 호방(豪放)하였다. 일찍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고, 음률을 좋아하였다. 계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홍문관 전한(典翰)으로서 주청사 검찰관(奏請使檢察官)에 충수되어 북경에 갔다. 점 잘 치는 자가 있었으므로 역관(譯官)을 시켜 평생의 길흉을 물었더니, 점쟁이가 운수를 점쳐 보고, 다만 장두체(藏頭體)로 된 시 한 수를 적어서 주는 것이었다. 그 시에,



소년 시절부터 재예는 천마산과 견준 듯 / 少年才藝倚天摩

손으로 용천검을 잡아 몇 해나 갈았던가 / 手把龍泉幾歲磨

돌 위의 오동은 소리를 발할 참인데 / 石上梧桐將發響

소리 가운데 율려는 청화함이 있다 / 音中律呂有淸和

입으로는 3대 시서의 가르침을 전하고 / 口傳三代詩書敎

글은 천추 도덕의 물결을 일으킨다 / 交起千秋道德波

가죽 폐백으로 이미 현사의 값을 정했는데 / 皮幣己成賢士價

가생은 왜 홀로 장사를 원망하던가 / 賈生何獨怨長沙 하였다.

돌아와서는 곧 당인으로 몰려서 귀양갔고 오래지 않아 또 곤장을 맞고 옥중에서 죽었다. 평생 운수가 그 점쟁이의 시와 방불하였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었다. 장두체라는 것은 마(摩) 윗쪽을 떼면 수(手)로 되고 마(磨) 윗쪽을 떼면 석(石)이 되며, 향(響) 윗쪽을 떼면 음(音)이 되고 화(和) 왼편을 떼면 구(口)가 된다. 다른 것도 이와 같다.

보유 : 스스로 송재(松齋)라고 호(號)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지평(持平)으로 있었는데 모친의 병보(病報)를 듣고 예궐하여서 사표를 바쳤더니, 특별히 휴가[由暇]를 주도록 명하였다. 청주(淸州)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니, 의원이 가르쳐 주기를 목욕하는 것이 치료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 목욕은 하였으나 또 이질에 걸렸다. 직무를 오랫동안 비워 둘 수 없으므로,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세(賦稅)와 공(貢)을 바치는 것은 하나같이 그해 농사의 재해 정도에 달렸는데, 다만 수령이 실지로 답험(踏驗)하는 데에 조심하지 않습니다. 농작(農作)은 또 식량과 종자가 있어야 하는데, 두가지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폐농하게 됩니다. 청컨대 묵은 밭의 세(稅)를 혁파하고 지난해의 조곡(糶穀)은 징수하지 말며, 재해를 실지대로 고찰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해소시키소서.”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서 그 말을 받아들이고 또 휴가를 하사하였으니, 그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성심은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무인년에 검찰관에 뽑혀서 상사(上使) 남곤(南袞), 부사(副使) 이자(李耔)와 함께 북경에 갔었는데 잘못된 종계(宗系)를 분변하여 바로잡도록 주청하는 일이었다. 공은 바른말로 항쟁하고 대궐 뜰에 서서 황명(皇命)을 기다려서 허가를 얻은 다음 돌아왔다.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수 없다 하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10여 번이나 바쳐, 종백(宗伯 예부의 우두머리)의 제본(題本)을 얻고 칙서(勅書)를 받아 들고서야 돌아왔다. 임금은 일행에게 특별히 장획(藏獲 노비)과 토지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공은 일이 완결되지도 않았는데 문득 상을 받게 되어[賞賜] 마음이 편하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그 밭 15결(結)에서 나오는 세를 곤궁한 고모에게 주어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북경에 있을 때에 상사 남곤이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부사 이자가 약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공이 이자의 귀에 대고, “저 놈이 반드시 사림을 도륙할 것이오.” 하였더니, 이자가 정색하면서 엄절(嚴截)하게 꾸짖은 일이 있었는데, 남곤이 그 사실을 알고 한을 품었다. 공이 예전에 응교(應敎)로 있을 때 근친(覲親)하고 올라오다가 길에서 유생을 만났다. 그 사람은 민폐를 아뢰는 글 한 편을 주면서 이름은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공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선비라 생각하고 그 글을 계달(啓達)하였다. 물색하여 찾으니 진위(振威)에 사는 무뢰한 권탁(權鐸)이었다. 이해 가을에 공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니, 충청수군절도사로 제수되었다. 12월에 언관이, 공이 조광조와 서로 붕당을 맺었고 권탁의 익명서를 속여 상달(上達)했다는 것으로써 논박하여, 거제에 안치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서기(書記)에, 서경(瑞卿)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서경(恕卿)이라고 지목되어서 신문을 받았다. 장차 심리하려던 밤에 옥중에서 죽었는데, 음경(陰莖)이 한 자 넘게 빠져나와 있었다. 액살(縊殺 목졸려 죽음)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윤자임 전(尹自任 傳)

1488(성종 19)∼1519(중종 1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경(仲耕). 잠(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강(之崗)이고, 아버지는 파평군(坡平君)  금손(金孫)이며,

어머니는 김태경(金泰卿)의 딸이다



윤자임은 무신생이고 자(字)는 중경(仲耕)이며,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승지로서 북청(北靑)에 귀양갔는데 울분으로 인한 병으로 죽었다.

보유 : 사화가 일어나던 날 우승지로서 좌승지 공서린(孔瑞麟)과 함께 숙직하였다. 초저녁에 공이 달빛을 따라 홍문관에 가서 응교 기준(奇遵)과 간의대(簡儀臺)에서 별을 보고 있었는데, 기준은 공의 매제(妹弟)였다. 조금 후 정원에서 급보하기를, “재상 몇 사람이 서문(西門)으로 가만히 새어 들어와서 입궐하였고, 근정전(勤政殿)에는 불빛이 보이며 군사가 에워싸고 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정원에서 모르는 일이 어찌 있으리오.” 하였다. 정원에 돌아와서 좌승지 및 주서ㆍ한림과 함께 합문(閤門 대궐 속문) 밖에 나아가니 김전(金詮)ㆍ이장곤(李長坤)ㆍ고형산(高荊山)ㆍ심정(沈貞)ㆍ성운(成雲)이 촛불을 켜고 모여 앉아 있었다. 이때에 밀계(密啓)한 듯한 남곤ㆍ홍경주는 여기에 없었으니 반드시 글을 가지고 임금 앞에 있었는 듯하다. 공이 앞에 나가, “재상이 입궐하면서 정원에 알리지 않은 것은 과연 무슨 일이오?” 하니, 여러 사람이 서로 보기만 하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이장곤이 앉았다 섰다 하면서 말할 듯하다가 감히 말하지 못 하였다. 공이 내시(內侍)를 청하게 하였으나 또한 통하지 않았다. 잠깐 뒤에 내시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을 부르니, 성운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주서 안정(安挺)이 뒤쫓았으나 들어가지 못 하였다. 조금 있다가 성운이 나오더니 소매 속에서 작은 종이 쪽지를 내어 이장곤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정원에 숙직하던 4명과 홍문관에 입번(入番)하였던 2명이 모두 하옥당했는데, 그때는 밤이 2경이었다. 그날 밤 초경에 승전 내시(承傳內侍 임금의 말을 출납(出納)하는 내시) 신순강이 임금 앞에서 참소하기를, “윤자임이 여러 재상이 모인 곳에 와서, 정원 모르게 예궐한 뜻을 묻고 면대(面對)하고자 하여 내시를 불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운이 소명(召命)을 받고 들어올 때에는 주서 안정을 시켜 끌어내게 하는 등 언사가 불공(不恭)스러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박세희(朴世熹)와 윤자임은 모두 무예가 있으니, 더욱 두렵다.” 하였다. 이러므로 대신들이 모두 면죄하기를 청했으나 마침내 되지 않았다. 다음날 박세희ㆍ기준ㆍ박훈(朴薰)과 함께 같은 죄목으로 국문을 받았으니, “조광조 등에게 아부하여서 과격한 말을 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공이 공초하기를, “신은 나이 32세입니다.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미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글을 읽어서 옳고 그름은 대강 압니다. 국가 일에 대하여 논사(論思)할 때에 혹 조광조ㆍ김정(金淨)ㆍ김식(金湜)ㆍ김구(金絿) 등의 의견과 같았으므로 인해서 교유한 것뿐입니다. 의논한 바가 과격했던 것이지, 신이 아부했다는 것은 터무니없습니다.” 하였다. 위의 네 사람은 장류(杖流)하기로 되었던 것이나 대신이 구원하여서 장(杖)은 속(贖)으로 바치고 온양(溫陽)에 부처(付處)되었다. 17일에 의금부에서 다시 모여 함께 전지(傳旨)를 받고 떠났다. 이장곤ㆍ김정ㆍ김구의 전(傳)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12월에 배소를 북청(北靑)으로 옮겼다가 죽었다.

 






박세희 전(朴世熹傳)

1491(성종 22)∼?.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안의(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미창(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이며,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박세희는 □□생이고 자(字)는 이회(而晦)이다. 갑술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승지로서 강계(江界)에 귀양가서 죽었다.

보유 : 사화가 일어나던 날 충암(冲庵) 김정(金淨)과 함께 조옥에 갇혔다. 윤자임(尹自任)ㆍ기준(奇遵)ㆍ박훈(朴薰)과 같은 죄목으로 국문받았다. 공이 공초하기를, “신은 나이 28세입니다. 나이가 젊을 뿐 아니라 성품 또한 거칠고 어리석어서, 행검(行檢)이 없었습니다. 옛사람의 글을 읽고 시의(時宜 그때 사정)를 참작해서 일을 정성으로 하는 것이 신의 직분입니다. 조광조는 신이 어려서부터 교유하였고 김정ㆍ김구(金絿)는 항상 사귀었으니,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 줄은 모르고 따랐을 뿐이요, 아부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죄를 입어서 처음에는 상주(尙州)로 유배가게 되었다가, 12월에 극변(極邊)인 강계에 안치되었는데 10여 년 지나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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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국 전(金正國傳)

1485(성종 16)∼1541(중종 3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은휴(恩休).

아버지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연(璉)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수 지(芝)의 딸이며, 안국(安國)의 동생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김정국은 을사생이고 자(字)는 국필(國弼)이다. 정묘년에 생원이 되었고 기사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황해 감사가 되어 지방에 있다가 사화를 듣고 소(疏)를 초(草)해 올리고자 하였다. 조금 뒤에 사건이 급하게 되어 소를 올려 보아도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듣고 한갓 화(禍)를 격하게 할까 염려하여 중지하였는데, 대간이 이 일을 알게 되어 곧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서 시골에 돌아왔다. 본적(本籍) 중, 성명 위에 불초(不肖)라는 글자가 있었다.

보유 : 남양(南陽)의 망동(芒洞)에 살았는데, 배우는 자가 문하에 모여들었다. 다시 등용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 참판에 이른 다음 죽었다. 호(號)는 사재(思齋)이다. 저술은 《척언(摭言)》ㆍ《기묘당적(己卯黨籍)》ㆍ《역대제왕전수도(歷代帝王傳授圖)》가 세상에 행(行)한다.

사재(思齋) 김국필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이다. 기묘년에 당인이 패한 뒤 파직되어 고양(高陽) 시골집에 돌아와서 호(號)를 은휴(恩休)라고 지었다. 마음이 너그럽고 학문이 깊어 후인의 모범[矜式]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 두 형제를 세상에 흔하지 않은 사람[二難]이라 하였다. 모재가 아우에게 절구 3수를 부쳐 보냈는데,



은휴와 은일(모재의 정자 이름)은 뜻이 서로 같기도 한데 / 恩休恩逸意相同

아우는 호수 서편에 형은 동편에 있다 / 弟在西湖兄在東

임금을 모시는 단심은 너나없어 / 拱北丹心無彼此

때때로 머리 조아리며 영봉을 향한다 / 時時稽首向瀛蓬

자네는 쉬면서 임금 은혜가 무거운 줄 느꼈지 / 子休正感君恩重

내 편함도 또한 은혜로세 / 我逸銜恩亦復然

쉼과 편함 백년 동안에 무슨 일 할까 / 休逸百年何所事

강구의 노래와 화봉의 축원으로 요의 시대에 춤이나 추자 / 衢謠華祝舞堯天

편하고 쉬고 하는 아우와 형이 / 逸逸休休弟與兄

화락하게 여생을 즐긴다 / 熙熙皞皞樂餘生

성은은 본래부터 하늘과 같은 것 / 聖恩自是天同大

넘어진 움도 비와 이슬의 은총에 젖는다 / 顚蘗猶沾雨露榮

하고, 또 서문(序文)에, “우리집 형제는 똑같이 형편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은총을 받았건마는 능히 마음을 다해 은혜를 갚지 못했네.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속였으니, 죄는 베어져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은은 관대하여 스스로 편하도록 허락하시었네. 살고 있는 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은일이라 이름하였더니, 아우도 또한 은휴라고 정자를 이름하였는 바, 신자(臣子)가 삼가 성은을 잊지 못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하였다. 사재가 차운하기를,



영달함과 휴일함이 은혜 입기는 같았으니 / 芬榮休逸被恩同

어찌 영원(형제)끼리 서쪽과 동쪽으로 격한 것을 한하리오 / 敢恨鴒原西隔東

한가히 늙어서 더욱 맛을 알 것은 / 閒到暮年尤覺味


한가히 늙어서 더욱 맛을 알 것은 / 閒到暮年尤覺味

인간에도 곤봉이 있다는 것입니다 / 人間還有一壼蓬

아우는 한가롭고 형은 초탈하여 남은 소원 없으니 / 弟休兄逸餘無願

행지를 계연에게 물은 것과 같이 하겠는가 / 行止寧同問計然

오가면서 서로 쉼과 편함을 자랑하는 외에 / 來往相誇休逸外

은혜를 머금고 길이 태평성대를 송축합니다 / 銜恩長頌太平天

쉬는 아우의 마음 편한 형님과 같소 / 休弟心情同逸兄

한 집에서 안락하게 여생을 보냅니다 / 一窩安樂送餘生

사는 것 한가하니 다시금 성은이 중함을 깨닫겠소 / 居閒更覺君恩重

임금의 은혜가 영화로운 벼슬뿐이라 말하지 마오 / 莫說君恩只宦榮 하였다.

 






이청 전(李淸傳)

1483(성종 14)∼1549(명종 4).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아(季雅). 기묘명인(己卯名人)의 한 사람이다.

판중추부사 계전(季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파(坡)이고,

아버지는 덕윤(德潤)이며, 어머니는 이찬(李儧)의 딸이다.



이청은 계묘생이고 자(字)는 계아(季雅)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고 신미년에 급제하였다. 사인(舍人정 4품 벼슬명)으로서 파직되었다. 정유년에 다시 등용되어 벼슬을 경상 감사까지 지내고 죽었다.

보유 : 앞서 연산(燕山)이 자기의 어머니 윤씨(尹氏)가 비명(非命)으로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때 논의에 참여하였던 신하와 봉사(奉使)하였던 신하를 모두 대역(大逆)으로 몰아서 추죄(追罪 죽은 뒤에 죄주는 것)하고 8촌까지 연좌(緣坐)시켰는데, 공은 사약 승지(賜藥承旨)였던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와 연좌되어서 귀양가게 되었다. 연산의 음탕함과 포악함이날이 갈수록 심하여짐을 보고, 중한 견벌(譴罰)을 받게 될까 겁내어서 드디어 도망하였다. 살갗을 변색시키고자 하여 뙤약볕에 몸을 쬐기도 하고, 또 때를 묻혔으나 그래도 변색되지 않았다. 성명마저 갈고 바위틈에 살면서 절에 가서 밥을 얻어 먹었는데, 한 곳에서 한 끼니씩만 얻어 먹으며 여러 산을 돌아다녔다. 반정(反正)한 뒤에 과거에 올라서 높고 요긴한 자리를 역임하였다. 12월에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었다. 오래지 않아서 영남을 안찰(按察)하면서 시서(詩書)와 연락(宴樂)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촛불을 켜서 놀이 시간을 연장하기도 하였는데, 온 도(道)에서 풍류 관찰사(風流觀察使)라고 일컬었다. 체임되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성종조(成宗朝)에 공혜왕비(恭惠王妃)가 죽은 다음 숙의(淑儀) 윤씨를 올려서 비(妃)로 삼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을 낳아 은총이 융숭하니,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숙원(淑媛) 양가(良家)의 딸이었던 정씨(鄭氏)와 엄씨(嚴氏)를 말한다. 을 투기하였고 임금에게도 불손하였다. 하루는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있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성종의 모후(母后)인 소혜(昭惠)의 존호 가 크게 노하여, 천위(天威)를 격동시켰다. 임금이 외정(外庭)에 나가자 대신 윤필상(尹弼商) 등이 영합하여 의논을 올려 윤씨를 폐하여 친정으로 나가게 하였다. 윤씨는 밤낮으로 울부짖어 피눈물이 이어졌으며 궁중을 훼방함이 나날이 심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윤씨의 동정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인수대비가 그 내시에게 윤씨는 소세(梳洗 머리 빗고 낯 씻는 것)하고 곱게 단장하여 후회하는 뜻이 없다고 회보(回報)하도록 교사(敎唆)하였으니, 마침내 임금이 그 거짓말을 믿고 죄를 더했다.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서 얼룩진 수건을 그의 어머니 신씨(申氏) 신(申)을 혹은 신(辛)ㆍ신(愼)이라 했는데 자세하지 않다. 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다행하게 보전되거든 이 수건을 전해서 나의 슬프고 원통하였던 사연을 알려 주오. 또 나를 어련(御輦)이 다니는 길가에 묻어서 임금의 거마(車馬)라도 보게 하여 주오. 이것이 나의 원이오.” 하였다. 드디어 건원릉(健元陵) 가는 길 곁에 장사지냈다. 그 뒤 인수대비가 죽고 연산이 즉위한 다음, 신씨가 나인(內人)과 통하여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렸다. 연산은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모(親母)로 알았다가, 중종(中宗)의 모후(母后)인 정현(貞顯)의 존호이다. 또한 숙의(淑儀)로서 비로 승진하였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는, 폐비(廢妃)하자는 의견을 바쳤던 대신과 그때 봉사하였던 사람들을 괘씸히 여겨 모두 관(棺)을 쪼개어 시체를 베고 뼈를 부수어서 바람에 날렸다. 그 죄에 연좌되어 참형(斬刑)에 해당한 자로서 이미 죽은 자까지 아울러 시체를 베게 하였다. 숙원 정씨와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ㆍ봉안군(奉安君)도 모두 제 명에 죽지 못 하였다. 사묘(私廟) 지금 종부시(宗簿寺)로 되었다. 를 세워서 원묘(原廟)와 같이 제(祭)하고 윤씨의 무덤을 회릉(懷陵) 지금은 석난간(石欄干)만 남기고 모든 의위 석물(儀衛石物)은 철거하였다. 이라 하였다. 옥당 부수(玉堂副守) 수장(壽長)이 일찍이 말하기를,

“윤씨는 총애를 믿고 무례하였으므로 모후가 시기하고 미워하였고 죄를 얽어서 임금의 성냄을 격동시켰으며, 대신은 아첨으로 임금의 뜻을 순하게 따르고 조금도 바로잡아 구하지 않아서 드디어 큰 죄로 저촉되었다.” 하였다.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는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소장을 올려서 후일에 폐단이 될 것을 극진하게 아뢰었으나 이미 미치지 못했다. 연산이 음탕하고 포악함은 모두 임사홍(任士弘)이 사심(私心)을 갖고 배후에서 유도(誘導)한 것이라 한다.

성종[成廟]이 폐비에게 사사(賜死)한 전지(傳旨)에,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날 궁중에 있을 때에 포악이 나날이 심해져서 이미 3전(三殿)에게 순하지 않았고, 또 내 몸에도 흉포한 짓을 방자하게 하였다. 나를 경멸하기를 노예같이 대접하여 심지어는 ‘발자국마저 깎아버리겠다’ 하였다. 이런 것은 특히 자질구레한 일이니 족히 논할 것도 아니다. 일찍이 역대 모후가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일을 보고는, 스스로 좋은 일이라 하며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혹 가슴에 품기도 하고 혹 상자에 감추기도 하였다. 오직 그 꺼리는 사람을 없애려는 것뿐이 아니고, 장차 내 몸도 해롭게 할 것 같다. 항시 하는 말이,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 하였다. 이것은 부도(不道)한 일로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이나, 그래도 대의(大義)로 처단하는 것만은 차마 하지 못하고 폐해서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 외인(外人)이 원자(元子)가 점점 자람을 보고 전후로 분분(粉粉)하게 폐비에 대한 일을 말하는 바, 오늘날에 있어서는 깊은 염려가 될 것이 없지마는, 후일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흉험한 성품으로 위엄과 복을 마음대로 하는 권리를 잡게 되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고 발호(跋扈)한 뜻은 나날이 더욱 방자하여져서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 때와 같은 화가 곧 이르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이에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약 주저하여 큰 계책을 일찍 정하지 않으면 국사는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후회하여야 소용 없을 것이요, 나는 종사에 큰 죄인이 될 것이다. 옛날에 구익(鉤弋)은 아무런 죄도 없었으나, 한(漢) 나라 무제(武帝)는 오히려 만세(萬世)를 위한 계책으로 죽였다. 하물며 이렇게 흉험하고 또 사(赦)하기 어려운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현재 있는 그 집에서 죽게 하나니 종사를 위한 큰 계책으로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 5월 20일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冊)에 밝게 나타나서 오직 국인이 함께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천왕(天王 중국 황제)도 또한 폄출(貶黜)함을 허락한 것이니, 어찌 다시 논의할 것이랴. 내 덕이 박(薄)해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여 위로 우리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 우리 신민(臣民)의 바람을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어찌 다함이 있으랴. 그러나 천지와 조종의 음우(陰佑)에 힘입고, 3전(三殿)의 정녕(丁寧)한 가르침을 받들어 내 몸은 당(唐) 나라 중종(中宗)과 같은 화를 면했고, 죄는 진(晉) 나라 가후(賈后)와 같이 간악함을 밝혔다. 이것을 대신이 함께 기뻐하여 하례(賀禮)한 것이다. 내 지금도 지난일을 생각하고 밤중에 탄식하며, 홀로 앉아 잠들지 못한 것이 몇 날 밤인지 모른다. 비록 영원히 먹을 것을 주지 않더라도 혼(魂)인들 어찌 원통하게 여길 것이며 내 어찌 불쌍하게 여기리오. 다만 어미가 자식 덕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임금으로서 내리는 혜택이고, 후일의 간계(奸計)를 미리 막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정사이다. 이러니 저군(儲君 세자)의 심정을 생각할 때 어찌 측연(惻然)하지 않으랴. 이제 그 묘를 특별히 윤씨의 묘[尹氏之墓]라 명명한다. 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고 묘 있는 곳에서 명절마다 제를 지내게 하여 그 자식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혼이나마 감동하게 한다. 비록 백년 뒤에라도 이 제도는 길이 고치지 말고, 아비의 뜻을 준수(遵守)하라.” 하였다. 병진년 봄에 연산이 윤씨 묘를 옮길 뜻으로 의논하였다. 신종호(申從濩) 공이 당시 예조 참판으로 있었는데, 유독 성종의 유교(遺敎)를 지지하면서 옮기지 못함을 극력 말하여 천위(天威)가 비록 벼락 같았으나 굽히지 않았다. 사당과 신주를 세우려는 의논을 하게 되어서는, 옛 제도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장사지내면 반드시 신주가 있어서 신을 의지하게 하고 반드시 사당이 있어서 제사를 받드는 것입니다. 윤씨는 성궁(聖躬 임금의 몸)을 낳아 길렀으니 사당 제도에 따라서 받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선묘(先廟 성종)에 죄를 지었으니, 예(禮)에 비추어서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한(漢) 나라 소제(昭帝)는 모친 조첩여(趙婕妤 구익 부인)를 위해서 원읍(園邑)을 설치했고, 또 장승(長丞 장(長)과 승(丞) 두 관리)을 시켜 제(祭)를 받들고, 수호하는 것을 법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묘를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위현성전(韋玄成傳)에, ‘효소태후(孝昭太后 구익 부인)의 침사(寢祠)와 원(園)을 수축하였다.’ 하였으니, 다만 침사만 있었고 서울에는 묘(廟)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위(魏) 나라 명제(明帝)의 어미 견후(甄后)는 유사(有司)가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해서 별도로 침원(寢園)을 세우도록 청하였으므로 주가(奏可)라 하였습니다. 대저 강원은 제곡(帝嚳)의 비(妃)이며 후직(后稷)의 모(母)입니다. 주 나라는 후직을 높혀서 시조(始祖)로 삼았은즉, 강원을 제사지낼 곳이 없는 까닭에 특별히 묘를 세워서 제사지냈던 것입니다. 그 일이 같지 아니한데, 위 나라 신하가 예(例)로 삼은 것은, 대개 한때 억지로 꾸민 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한나라 일을 본받고자 하면 억지로 꾸민 그릇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한 나라 무제와 위 나라 문제는 모두 유교가 없었으니 지금 사세와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선묘와 의(義)가 끊어졌는데, 전하께서 사사 은혜로써 예(禮)를 해침은 불가합니다. 비록 묘와 신주를 세우지 않고, 다만 묘에 제사지낸다 하더라도 또한 효도를 다하기에 족합니다.” 하였다. 이 논의가 비록 쓰이지는 않았으나 지론(持論)이 매우 정대하였으므로 뭇 논의가 능히 굽히지 못 하였다.

[주]구익(鉤弋)은 아무런 죄도 없었으나 : 구익은 궁전의 명칭으로, 조첩여(趙婕妤)가 구익궁에 있었으므로 구익 부인이라 하였다. 구익 부인은 한 무제의 애희(愛姬)인 동시에 소제(昭帝)의 어머니였는데, 태자는 나이가 어리고 어미는 나이가 강장하니 장차 정사를 간섭할까 염려하여, 아무 죄도 없는데 무제가 고의로 사사하였다

 



최산두 전(崔山斗 傳)

1483(성종 14)∼1536(중종 31).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

나복산인(蘿葍山人). 아버지는 한성판윤 한영(漢榮)이며,

어머니는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사숙하였다. 장령과 의정부 사인을 지냈다.



최산두는 계묘생이고 자(字)는 경앙(景仰)이다. 갑자년에 생원이 되었고,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사인(舍人)으로서 동복(同福)에 귀양갔다가 계사년에 은사(恩赦)를 입고 석방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

패관소록(稗官小錄)어숙권(魚叔權)이 지었다. : 공이 시장(試場)에서 지은 〈통감부(通鑑賦)〉는 호방(豪放)하고 동탕(動盪)하여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해남의 귤정(橘亭) 윤구(尹衢)와 나재(懶齋) 유성춘(柳成春)과 한때 명성이 나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호남 삼걸 두구춘(湖南三傑斗衢春)’이라 일컬었다. 공이 먼저 과거에 올라서 옥당(玉堂)에 뽑혀 들어갔고 스스로 호를 신재(新齋)라 하였다. 일찍이 귤정에게 부친 시에,



강 길에는 봄 찾아감이 더디니 / 江路尋春晩

그대를 생각하며 달 아래 걷는다 / 思君步月時

해마다 산 사이 골짜기엔 / 年年山間谷

한정 있는 분수에 곡진하게 따른다 / 曲隨分有涯  하였다.

보유 : 공은 대대로 광양(光陽)에 살았다. 친척이 모두 군보(軍保)로서 여러 진(鎭)에 예속되어 수자리를 지냈다. 공이 일찍이 사신(使臣)으로서 고향에 와서는 반드시 여러 진과 주읍(主邑)에서 술과 안주를 구하고, 그들이 머무는 영(營)과 막사[廨]에 가서 엎드려 술잔을 올리며, 감히 영귀(榮貴)한 것으로써 종족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일찍이 검상(檢詳)으로 있을 때 사인사(舍人司)에 소용되는 약재(藥材)를 여러 고을에서 구해서 통서(通書)에 공도 함께 이름을 적었다. 한림(翰林) 이구(李構)가 민폐를 아뢰면서 특별히 이 일을 들어서 아뢰었다. 그 일을 추문(推問)할 때 공은 장령(掌令)이었는데, 마침 합사(合辭)하여 사직하는 일이 있었다. 사세가 매우 난처하게 되어서 약재 사건의 추문을 곧 피하지 못 하였고, 사인 민수천(閔壽千)ㆍ소세양(蘇世讓)은 파직되었다. 그 뒤 간절하게 사직하여 벼슬이 갈렸으나, 12월에 이것을 허물로 잡혀 동복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장옥 전(張玉傳)

1493(성종 2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강(子剛), 호는 유정(柳亭). 균(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맹희(孟禧)이고, 아버지는 집의 충보(忠輔)이며,

어머니는 김약평(金若枰)의 딸이다.



장옥은 계축생이고 자(字)는 자강(子剛)으로 을해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검상(檢詳)으로 있다가 물리침을 당해 지방에 보임(補任)되었다. 병술년 중시(重試)에 올라 다시 서용(敍用)되었으나 곧 딴 일로 인하여 귀양가게 되었다.

보유 : 일찍이 심사순(沈思順) 형제와 서로 친하였다. 그 아비 심정(沈貞)이 양천(陽川)의 공암(孔岩) 서쪽 언덕에다가 집을 짓고 소요(逍遙)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 제목(題目)으로 지은 시를 널리 구하고 공에게는 서문(序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아름답게 칭송한 글을 써서 잘 보이려고 하였으나, 그 때문에 지위가 현저하게 높아지지는 않았다 한다. 중시에 올랐으나 다시 산관(散官)으로 서용되었다.

 



이희민 전(李希閔 傳)

1498(연산군 4)∼? 조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효옹(孝翁). 지로(智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순생(順生)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윤검(允儉)이며,

어머니는 훈련원참군 최계한(崔季漢)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이희민은 □□ 생이고 자(字)는 효옹(孝翁)이다. 경오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병자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파직되었는데 곧 이윤검(李允儉)의 아들이다.

보유 : 10월에 지평으로 임명되어서,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외람되게 기록된 사람을 삭제할 것을 논핵하였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 궐문에 달려가 먼저 와 있던 지평 이연경(李延慶)과 홍문관 정자(正字) 권장(權檣)이 함께 보루문(報漏門) 앞에 도착하니, 판서 김정(金淨)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이조 좌랑 구수복(具壽福)이 대내에서 나와 그 옆에 함께 앉아 서로 말하면서 얼굴빛이 파래졌을 뿐 화가 일어난 이유를 측량할 수 없었다. 드디어 이연경과 함께 월화문(月華門)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부장(部將)이 막으므로 들어가지 못 하였다. 김근사(金謹思)가 말하기를, “궐내에는 잡인(雜人)이 출입할 수 없다.” 하고, 또, “지평은 이미 갈렸는데 무슨 명색(名色)으로 입계(入啓)할 것이오.” 하였다. 공이 분히 여겨 탄식하면서 바로 경연청(經筵廳)에 들어가 영상(領相)에게 고하기를, “사건이 갑자기 일어났고, 전혀 비밀입니다. 저희들의 관직은 이미 갈렸으나 오랫동안 시종 반열에 있었는데 어찌 감히 근심도 없는 양 물러 앉겠습니까. 좌우에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없어서 국가 대사를 민멸해 버리고 전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더욱 민망합니다.”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선 물러나거라. 임금이 매우 노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을 죄주려 하나 우리들이 어찌 사류(士類)를 죽이고자 하리오. 마땅히 힘껏 주선하여 구제하리라.” 하고, 드디어 봉교(奉敎) 조구령(趙九齡)ㆍ채세영(蔡世英)ㆍ권예(權輗)를 시켜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공 등이 물러나니 밤은 벌써 5경이었다. 영추문(迎秋門) 밖에서 우상(右相) 안당(安瑭)을 만났다. 이연경이 급히 가서,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직 대상(大相)에게 희망을 걸 뿐입니다.” 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12월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선산(善山)의 고향에 돌아가서 살았다.

 



김광복 전(金匡復 傳)

생졸년 미상.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극기(克己)이다. 이다.

부친은 고원군수(高原郡守) 김화(金鏵)이다.



김광복은 □□ 생이고 자(字)는 극기(克己)이다. 신유년에 생원하였고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전라 도사(全羅都事)로서 경성 교수(鏡城敎授)가 되었다가 죽었다.

 

정응 전(鄭譍 傳)

1490(성종 21)∼1522(중종17).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응지(譍之), 호는 소우당(素愚堂). 효경(孝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穗)이고, 아버지는 돈녕부정 인후(仁厚)이다. 어머니는 최순(崔洵)의 딸이다.



정응은 경술생이고 자(字)는 응지(譍之)이며 갑술년에 급제하였다. 전한(典翰)으로 부여(扶餘)에 귀양가서 분하게 여기다가 죽었다.

보유 : 공은 천자(天資)가 영매(英邁)하며 서한(西漢)의 문체가 있었고, 응교 기준(奇遵)은 금같이 빛나고 옥같이 윤택하며 염계(濂溪)의 학문을 깊이 깨달았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젊고 단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쌍벽(雙璧)으로 지목하였다. 임금은 그들의 재기를 중하게 여겨 품계의 차례를 밟지 않고 등용하였으므로, 조급하게 승진시킨다는 비난이 있었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임금이 대간과 시종을 다 갈도록 명하였는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이 이부(吏部)를 감독하여 주의(注擬 후보로 망에 올리는 것)하고, 계하기를,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은 적임자가 모자라 개차(改差)할 수 없으니 유임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전한(典翰)으로서 동료 중에 논의를 주장하고 소장(疏章)을 올려 극진하게 간하였다. 공이 지은 소가 지극히 정성스러웠으며, 또, “함께 조옥(詔獄)에 내려 그 죄를 같이 받겠습니다.” 하였다. 12월에 추죄(追罪)할 때에 부여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죽었다.

 



기준 전(奇遵 傳)

1492(성종 23)∼1521(중종 16).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

아버지는 응교(應敎) 찬홍(禶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조카는 고봉 기대승이다



기준은 임자생이고 자(字)는 자경(子敬)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고 갑술년에 급제하였다. 응교(應敎)로 아산(牙山)에 귀양갔다가 온성(穩城)으로 배소를 옮긴 후 곧 사사(賜死)되었다.

척언 : 전한(典翰) 기준이 하루는 금중(禁中)에서 숙직하였는데, 꿈에 북관(北關)의 나그네가 되어 고생스럽게 발섭(跋涉)하는데, 나그네 길에서 새로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강과 산은 고국과 같구나 / 異域江山古國同

천애에 눈물 흘리며 외로운 배에 의지했다 / 天涯垂淚倚孤篷

밀물 소리는 적막한데 관문은 닫혔고 / 湖聲寂莫關河閉

나뭇잎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비었다 / 木落蕭條城郭空

들길은 가늘게 가을풀 속에 갈라졌고 / 野路細分秋草裏

인가는 저녁볕 가운데에 많이 있다 / 人家多在夕陽中

만릿길 가는 돛, 돌아오는 배 없어라 / 征帆萬里無回棹

푸른 바다 아득한데 소식도 통할 수 없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고,

문득 깨었으나 꿈을 기억하여 관벽(館壁)에 적어 두었는데 오래지 않아 죄를 당했다. 기묘년 가을에 호서(湖西)로 귀양갔다가 북도의 온성으로 배소가 옮겨졌다. 도중에 보는 것이 모두 시 가운데 풍경이므로 말을 멈추고 그 시를 읊조리면서 슬퍼 목이 메이니, 사람의 일이란 모두 전정(前定)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사림(士林)이 전해 외우면서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보유 : 사화가 일어나던 날 수찬 심달원(沈達源)과 함께 입번(入番)하였다. 초저녁에 승지 윤자임(尹自任)이 찾아와 간의대(簡儀臺)에 함께 앉아서 별을 보고 있었다. 정원(政院)에서 변을 알리는 것을 듣고 각자 직소(直所)로 돌아갔는데, 조금 있다가 심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16일에 조광조(趙光祖)의 과격한 논의에 아부하였다는 이유로 국문받았다. 공은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나이 28세입니다. 소년 적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정성껏 하는 것이 마땅하고, 조정에 있으면 충성과 의리를 정성껏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뜻이 같은 사람과 옛 도를 강구하여 나라를 요순(堯舜) 시대의 다스림과 같은 경지에 이르도록 기약하였습니다. 선한 자는 허락하고 선하지 못한 자는 미워하였습니다. 조광조는 어렸을 때부터 교유하였고, 김식(金湜)ㆍ김구(金絿)ㆍ김정(金淨)은 근래에 상종하였는데,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지는 모르고 교유하였을 뿐이며 아부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였다. 윤자임ㆍ박세희(朴世熹)와 같은 죄목으로 형장(刑杖)으로써 때려 유배하기로 정하여졌는데, 3공이 고집하여 형장은 속(贖)을 바치고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에 나가 있었는데, 금부에 돌아오라는 명이 있어 8명이 함께 승지 성운(成雲)에게 전지를 받고 떠났다. 이보다 앞서 공의 형인 기형(奇逈)이 문관으로서 어미를 봉양하기 위해 고을 원이 되기를 청해서 무장(茂長)에 있었다. 공이 호서(湖西)에 귀양간 다음에는 소식이 드물었다. 울적한 중에 산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는[陟屺雲望] 회포를 풀고자, 고을 사람과 산에 올랐다. 첩첩한 산이 하늘을 버티어서 더욱 아득하니, 아무런 것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으므로 도로 배소에 돌아왔다. 온성으로 옮긴 뒤에 그 일이 발각되어 잡혀와 추국당하게 되니, 그때 현감 배철중(裵鐵重)이 죄인을 마음대로 놓아 주어 임의로 출입하게 하였다는 이유였다. 배철중은 중한 죄를 받게 될까 두려워서, 공이 도망쳐 갔다가 스스로 돌아왔다고 공초하였다. 이리하여 공이 조옥에 갇혔고 형장으로 때리는 신문(訊問)을 받게 되었다. 공이 옷을 찢어서 진정서(陳情書)를 올렸는데, “신이 경망하고 죄가 무거우니 감히 입을 열어 성청(聖聽)을 더럽힐 바가 없습니다마는, 작은 회포라도 다 아뢰지 못한다면 또한 성세(盛世)에 아름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달[月]을 넘기자 아비가 죽었고, 안아서 양육된 것은 오직 편모(偏母)를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모자가 서로 보전하여 살아왔으며 신이 죄를 당할 때에 어미는 무장(茂長)에 있었습니다. 신이 귀양갔음을 듣고 밤낮으로 호읍(號泣)하였으며, 질병이 겹쳐서 목숨을 보전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 보고자 하나 국법(國法)이 지중하여 소망을 이룰 수 없어 애닯고 민망스러움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배소를 온성으로 옮기게 되어서는 망령된 생각에 지역이 남북으로 멀리 떨어졌으니 한번 변새(邊塞)에 가면 종신토록 다시 볼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서로 통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한 번이라도 상면하여 영결하고 싶었습니다. 슬픈 마음을 스스로 이기지 못 하였고 배소가 옮겨갈 일이 다가왔으므로 경솔하게 나갔던 것입니다. 나갔다가 다시 생각하니 도망쳐 돌아가 비록 어미를 본다 하더라도 어미가 더욱 놀랄 것이고, 또 뒷일도 난처할 것이므로 척연(惕然)히 회개하고 배소에 돌아왔던 것입니다. 도망쳤다는 죄를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우나, 그날을 넘기지 않고 돌아왔고 또 다른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오히려 사(士)라는 반열에 참여했던 자인데 어찌 망명(亡命)의 인간이 되어 백일하(白日下)에 삶을 구하려 하겠습니까. 하물며 군부(君父)의 명은 천지간에 피할 곳이 없는 것인데 어찌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모자 사이의 절박한 정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이 죄를 당하는 것은 당연하나 바야흐로 효도하는 도리로 나라를 다스리는 중이니 조그마한 정을 살피시면 또한 하나의 생성(生成)하시는 덕일까 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불쌍하게 여기소서.” 하였다. 이에 형장으로 처결(處決)하고 배소에 돌려보내서 위리안치(圍離安置)하도록 명하게 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추론(追論)되어 자결(自決)하라는 명이 내렸다. 아들 기대항(奇大恒)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주]산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는 :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행산(太行山)에 올라서 구름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옆사람에게, “내 어버이 집이 저 구름 밑에 있다.” 하면서, 오랫동안 섭섭하게 여기다가 구름이 날아간 뒤에 내려왔다 한다.

 







박상 전(朴祥 傳)

1474(성종 5)∼1530(중종 25).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소(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


박상은 갑오년생이고 자(字)는 창세(昌世)이다. 신유년에 급제하였는데

물리침을 받아 외임(外任)으로 되었다가 병술년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당상(堂上)으로 승진하였다.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었는데 조방언(曹邦彦)에게 욕을 당한 다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간 후 분해하다가 죽었다. 호(號)는 눌재(訥齋)이다.

보유 : 을해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있었는데,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과 함께

구언(求言 왕이 신하의 직언을 구함)하는 교지(敎旨)를 받고 절에 모여 자면서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청하기로 합의하였다. 각자 소장(疏章)의 초고를 지어서 빠른 시일에 다시 모였는데

충암(冲庵)의 초고(草稿)를 본 다음, 공은 드디어 붓을 버리고 초고도 내지 않았다.

연명하여 상소하였더니 대성(臺省)에서 사의(邪議)라고 지목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구언하면서, “말한 자를 죄주는 것은 상언(上言)하는 길을 막는 것이니 죄줄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대간은 상언하는 길은 작은 일이라 하며 죄주기를 힘껏 청하여서 드디어 도배(徒配)되었다.

이때문에 조정 논의가 대립되어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었다. 병자년 여름에 비로소 공 등이 옳다고 대간과 시종이

교대로 소장을 올려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이해 겨울에 다시 서용되어서 첨정(僉正)이 되었다. 정축년 봄에 공의

어머니가 나이 80이 되었으므로 봉양하기를 청해 순천 부사로 되었으나, 기묘년 겨울에 또 물리침을 받았다.

병술년에 충주 목사로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뽑혀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였다.

기축년에 나주 목사로 되었는데 감사 조방언(趙邦彦)이 고하(考下)로 만들었다.

무릇 당상으로서 수령이 된 자는 거중(居中)이라도 예(例)에 따라 파직되는 것인데

조방언이 공을 고하에 둔 것은 욕보임이 심한 것이었다. 이때문에 분해하던 중 병이 되어 마침내 죽었다.

《눌재집(訥齋集)》이 세상에 행(行)한다. 박눌재는 성품이 간결하고 강직하여 허여(許與)하는 사람이 적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이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했고, 비록 여러 번 물리침을 받았으나

고치지 않았다. 심정(沈貞)이 양천(陽川)에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일세(一世)의 작자(作者)에게 글을 청해서

현판에 썼는데, 공의 시에,



산 중턱에는 상과 접시를 벌였고 / 半山排案俎

가을 구렁에는 항아리와 주발을 벌였다 / 秋壑闢尊盂

하는 글귀가 있자, 심 정승이 자기를 기롱한 것임을 알고 드디어 뽑아 버렸다

 



이충건 전(李忠楗傳)

?∼1521(중종 16).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눌재(訥齋)·목수(木叟).

영의정 직(稷)의 현손이며, 계령(繼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생(叔生)이고,

아버지는 승문원권지부정자 윤탁(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이충건은 □□생이고 자(字)는 자안(子安)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고 을해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파직되었고 오래지 않아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서 고문받고,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죽었다.

보유 : 기묘년 12월에 관작을 삭탈당했다. 신사년 겨울에 송사련(宋祀連)이 고발한 서기(書記)에

공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문을 받고 유배되어 가다가 청파역(靑陂驛)에서 죽었다.

아들 이염(李爓)은 문과에 뽑혔고 손자 이현배(李玄培)도 또한 문과에 장원하여 지위가 높았다.



 

양팽손 전(梁彭孫 傳)

1488(성종 19)∼1545(인종 1).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

직장 사위(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담(湛)이고,

아버지는 이하(以河)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


양팽손은 □□생이고 자(字)는 대춘(大春)이다. 병자년에 급제하였고 홍문관 교리로 파직되었다.

보유 : 능성(綾城)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기묘년 12월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아들 양응정(梁應鼎)ㆍ양응태(梁應台)는 다같이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높았다




 

이약빙 전(李若冰傳)

1489(성종 20)∼1547(명종 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 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이약빙은 기유생이고 자(字)는 희초(熹初)이다. 계유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고 갑술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파직되었고, 정유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척언 : 세종 19년에 교서 내리기를, “공순공(恭順公) 이방번(李芳蕃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과 소도공(昭悼公) 이방석(李芳碩 태조의 여덟째 아들)은 모두 의척(懿戚)으로서 불행하게 후사(後嗣)가 없다.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를 공순공의 후사로 삼고,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를 소도공의 후사로 삼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별로 이의가 없었다. 병자년에 지금 임금이 폐주(廢主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할 뜻으로 군신(群臣)에게 부의[延訪]하니 논의가 분분하여 마침내 거행하지 못 하였다. 기해년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이 소장을 올려 연산(燕山)과 노산(魯山)의 후사를 세워 그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청하자, 대간이 옥에 잡아와 추문하기를 청하여 결국 파직되었으니, 세속이 변하였음을 볼 수 있다.

보유 : 12월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충주(忠州)의 북촌(北村)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준암(樽嵓)이라 호(號)하였다. 노산과 연산이 임금의 지친(至親)인데 그 제사를 궐하고, 복성(福城)은 임금이 총애하던 아들인데 원통함을 품고 죽었음을 항상 분하게 여겼다. 다시 서용되어서 한산 군수로 되어서는 글을 올려, “끊어진 세대를 잇고 억울한 죽음을 신원(伸冤)하는 것은 성주(聖主)의 어진 정사입니다. 만약 삼강(三綱)의 부식(扶植)하고 윤리를 바로하고자 한다면 먼저 두 왕의 사당을 세우고 복성의 원통함을 씻어야 한다.” 하였다. 대간이 잡아다 추문하기를 청해서 면관(免官)되었다가 얼마 뒤 다시 서용되었다. 을사년에 좌통례(左通禮)로서 귀양보냄을 당했으며,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배소에서 사사(賜死)되고 가산을 몰수당했다. 이보다 앞서 공의 막내 아들인 이홍윤(李洪胤)이 윤임(尹任)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기유년에 가문의 화가 저절로 일어나서 공의 여러 아들과 공에게 수업한 시골 선비가 모두 큰 죄에 빠지고 고을은 강등되어 현(縣)으로 되었다. 오직 공의 장자인 이홍남(李洪男)만이 그 사건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면죄당하였고, 손자 이민각(李民覺) 또한 문과에 합격하였다. 지금 임금 경오년에 공의 관작을 회복하고 가산을 돌려주었다. 또 기유년에 있었던 원통한 일을 신설(伸雪)하고 고을은 다시 목(牧)으로 되었다.




 

윤개 전(尹漑 傳)

1494(성종 25)∼1566(명종 2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서파(西坡).

좌참찬 형(炯)의 종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구몽(龜夢)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손(李孫)이며, 어머니는 윤백연(尹伯涓)의 딸이다.


윤개는 갑인생이고 자(字)는 여옥(汝沃)이며 병자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좌랑으로서 물리침을 받아 외관(外官)이 되었다. 한어(漢語)에 능하였으므로 세상에 겨우 용납되었다.

보유 : 을사년에 인종(仁宗)이 중국 사신을 맞이할 참인데, 대간이 예조 판서 임권(任權)이 예모(禮貌)를 많이 실수하였다는 이유로 탄박(彈駁)하였으므로 특별히 공을 예조 판서로 삼아 맞이하였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니, 빈천(賓天)을 당하여 매우 슬픔[擗踊]에 있던 중이나 모든 의례와 제도가 약간 정돈되었다. 충순당(忠順堂)에 입시하여 유관(柳灌) 등의 죄상을 논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위사 공신(衛社功臣)으로 기록되고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좌의정에 이른 다음 죽었다. 정축년에 위사 공신은 혁파되었다. 손자 윤담휴(尹覃休)도 문과에 합격하였다.




 

구수복 전(具壽福 傳)

1491(성종 22)∼1535(중종 30).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백응(伯凝)·정지(挺之), 호는 병암(屛菴)·수재(睡齋).

강(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참의 신충(信忠)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현감 의영(宜榮)의 딸이다. 동생은 수담(壽聃)이다.


구수복은 신해생이고, 자(字)는 백응(伯凝)이다. 경오년에 생원이 되었고 병자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좌랑으로서 파직되었다가 계사년 가을에 다시 서용되어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있다가 죽었다.

보유 : 처음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검열(檢閱)로 천거되었고, 주서(注書)로 옮겼다가 부수찬으로 승진되었다. 정언(正言)으로 이임(移任)되었고 다시 수찬으로 되어서 4년 동안에 6번이나 옮겨졌으며, 이조 낭관으로 뽑혀 들어갔다. 사화가 일어나기 전 저녁에 이조에서 숙직하였는데, 밤 2경에 정원에서 급히 부르므로 달려가 문 서쪽 틈으로 경연청에 이르니, 대간ㆍ홍문관ㆍ승지ㆍ주서ㆍ한림을 모두 갈아치우고 승전(承傳)을 받도록 독촉하는 것이었다. 공은 사건의 단서를 알 수 없어 승정원 관리에게 물으니, 승정원 관리도 또한 모른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남곤(南袞)과 이장곤(李長坤)에게 고하기를, “대간ㆍ시종과 사필(史筆) 잡은 자를 일시에 다 갈아서 조정의 이목(耳目)이 없어졌으니, 한밤중의 이 일이 장차 묻혀 없어져 이름을 적을 수 없습니다. 사유를 자세히 들은 다음에 적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상 정광필(鄭光弼)이 소명(召命)을 받들고 바쁘게 입궐하므로 공이 나아가 묻기를, “뜻밖에 이런 큰 변을 만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 들은즉, 이자(李耔) 등이 모두 금부에 하옥되었다 합니다. 변이 일어난 연유를 모르고 어찌 차마 승전(承傳)에다가 이름을 적겠습니까.” 하니, 영상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사세(事勢)를 보아서 하리라.” 하였다. 승지가 두 세 번 사람을 보내 묻기를, “이름을 적지 않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직무를 폐각(廢閣)했다는 것으로 입계(入啓)하겠다. …… 계달(啓達)하여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영상이 말리면서 “지금 임금께서는 심히 노하여, 만약 아뢰면 나이 젊은 낭관(郞官)이 반드시 큰 죄를 입을 것이다.” 하여, 드디어 계하지 않았는데, 그 후임자를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공은 짧은 지팡이와 짚신으로 이름난 산과 경치 좋은 지역을 편답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찾아다녔다. 속리산의 훌륭한 경치를 가장 사랑하였고, 숲 속과 샘가에서 시를 읊조리면서 즐기느라 돌아갈 줄 몰랐다. 김태암(金兌岩)이 사는 시골에 의지해 머물다가 그대로 집을 정했다. 계사년에 조정에서 경이 오랫동안 내쳐져 있었다 하여 의논하여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제수하였는데, 을미년에 관아에서 죽었다. 공의 성품은 분잡(紛雜)하거나 화려함을 즐기지 않고 오직 담백한 것을 좋아하였다. 평상시에는 온화한 말과 유순한 낯빛으로 남에게 거슬리지 않으나, 일을 당하면 문득 대항하는 낯빛과 준엄한 말로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남에게 경복(敬服)하는 바가 되었다. 또 후학을 힘껏 권하여서 성취한 자가 많았다. 아들 구절(具折)은 문과에 뽑혔다.




부 김태암(附金兌岩)




김태암은 경자생이고 자(字)는 탁이(卓爾)이며, 보은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기개가 헌앙(軒昻)하고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다. 남의 착함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남의 다급함을 구제하느라 집안 일은 상관하지 않았다. 무인년에 유일(遺逸 초야에 있는 학덕이 높은 사람)로서 천거되어서 연원 찰방(連原察訪)으로 임명되었으나, 12월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구 좌랑(具佐郞)이 파직되어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곧 전토를 주어서 농장을 만들고 살게 하였다. 날마다 함께 즐겁게 놀다가 수명을 다하고 집에서 죽으니[考從] 향리에서 사복(思服)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축년 겨울에 동류들과 함께 속리산 도솔암(兜率庵)에 가서 충암(冲庵)을 방문하고, 그대로 복천사(福泉寺)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독하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벗에게 주는 시에,




그대 가는 길은 평평한 큰길이구려 / 君去平平大道通

바위 위에 남아 있는 나의 뜻 그지없어라 / 分離岩上意無窮

서울 벗들이 나의 소식 묻거든 / 洛中故舊如相問

산마을 늙은이라고 일러주오 / 爲報山村一老翁 하였다.

일찍이 나그네 길에서 우연히 공을 만났는데, 공의 나이가 70이었으나 신색(神色)이 엄숙하고 동작과 언사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나에게 이르기를, “젊었을 때에 학문을 하지 않아서 홀로 모진 목숨 보전하고 고요하게 평생을 보낸다.” 하였다. 이날 밤에 바람이 쓸쓸하고 달이 밝았는데, 공이 슬프게 노래하고 강개하면서 밤새도록 자지 않았다.

 




윤구 전(尹衢 傳)

1495(연산군 1)∼?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

할아버지는 경(耕)이며, 아버지는 생원 효정(孝貞)이다.


윤구는 을묘생이고 자(字)는 형중(亨仲)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고 병자년에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으로 있다가 죄를 입었으나, 정유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패관소록(稗官小錄) : 윤귤정(尹橘亭 윤구의 호)이 일찍이 의제(義帝)를 위해 발상(發喪)하는 논문(論文)을 지었는데 온 세상에 전해졌다. 뒤에 참판(參判) 나세찬(羅世纘)이 북경에 가서 《향시록(鄕試錄)》을 보니 귤정이 지은 논문이 그 중에 실려 있었다. 고관(考官)이 비평하기를, “어느 곳이라도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리오마는 양광(兩廣 중국의 광동성과 광서성)이 아니면 서북 지방의 과시(科試)였을 것이다.” 하였는 바, 이 논문이 어느 경로를 좇아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보유 : 좌의정 김응기(金應箕)가 대간이 논박한 차자로 인해 여러 달을 두고 면직되기를 청해서 윤허를 얻었다. 공이 주서로서 왕명을 받들고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 신용개(申用漑)의 집에 가서 복상(卜相 정승될 만한 사람을 고름)하고 정원에 돌아왔다. 승지 박세희(朴世熹)가 맞이하여 묻기를, “오늘 복상된 사람은 반드시 안당(安塘) 어른이겠지.” 하였다. 공이 공손하게 대답한 뒤에 복명(復命)하기를, “영의정 정광필은, ‘마음가짐과 일처리하는 것은 오직 안당이 첫째다.’ 하였고, 우의정 신용개는, ‘만약 직책의 차례를 말한다면 김전(金銓)ㆍ이계맹(李繼孟)이 있지마는 안당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여, 드디어 안당을 정승으로 삼았다. 사화가 일어난 뒤에 당시 재상이 ‘전일 복상할 때에 신 문경(申文景 신용개) 공은 이계맹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박세희의 말을 듣고 말을 다르게 복명하였다.’ 하여 추문하고, 박세희까지 죄주고자 하였으나 공을 죄주는 것만으로 그쳤다. 고향인 해남(海南)에 물러가서 살던 중 다시 서용되어서 전라도 도사(都事)로 되었다. 그때 관찰사는 윤개(尹漑)였는데, 동년(同年)으로서 방백(方伯) 자리에 있다 하여 겸손해하여 항상 편복(便服)으로 남청방(南廳房 도사가 있는 방)에 가서 이야기 하였다. 순찰하면서 담양에 이르자 부사 이현(李俔)이 감사와 도사에게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야기가 지난 일에 이르자 공이 말하기를, “이계맹은 행검을 단속하지 않아서 당시 논의가 단점으로 여겼는데, 어찌 복상하는 서열에 논의될 수 있으리오. 다만 신 문경과 술벗이어서 서로 허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 까닭으로 나에게 허물을 돌리고 죄를 더해서 숨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다만 나에게만 죄주었을 뿐이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아들 윤홍중(尹弘中)ㆍ윤의중(尹毅中)이 아울러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윤의중은 벼슬이 영귀(榮貴)하였다.




 

심달원 전(沈達源傳)

1494(성종 25)∼1535(중종 3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용(子容). 영의정 회(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湲)이고,

아버지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순문(順門)이며, 어머니는 이의구(李義坵)의 딸이다.

영의정 연원(連源)의 동생이고, 금천현감(衿川縣監)을 지낸 형(泂)에게 입양되었다.

좌의정 통원(通源)의 형이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기원(器遠)의 4대조이다.


심달원은 갑인생이고 자(字)는 자용(子容)이며 정축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쫓겨나 외관(外官)이 되어 조정에 겨우 용납되었다.

보유 : 공이 홍문관 수찬으로서 번을 마치고 집에 있다가 사화가 일어나기 전 낮에 입직하였다. 정자(正字) 김명윤(金明胤)이 대직(代直)하기를 간청하므로 공이 부득이 입직하였고 김은 즉시 돌아갔다. 공이 응교 기준(奇遵)과 밤에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어 함께 조옥에 갇혔다가 먼저 석방되었으나, 겨우 산질(散秩)에 용납되었고 좌통례(左通禮)로 있다가 죽었다. 아들 심전(沈銓)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영귀(榮貴)하였다.




 

조언경 전(曹彦卿傳)

1487년(성종 18)~1521년(중종 16). 본관은 창녕(昌寧)자는 국로(國老)이다.

증조는 조변륭(曺變隆)이고, 조부는 조구서(曺九敍)이다. 부친 조계은(曺繼殷)과

모친 송담(宋譚)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언경은 □□생이고 자(字)는 국로(國老)이며 을해년에 급제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파직되었다.

보유 : 교서관(校書館)에서 벼슬이 올라 이조 좌랑으로 되었다. 일찍이 병조 좌랑 김극개(金克愷)와 동료로서 교분이 두터웠는데, 궐직하였다 하여 파직시키니 당시 논의가 우도(友道)로 보아서는 박하고 정직한 것은 아름답게 여겼으나, 정조(政曹 이조)로서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논란되어 벼슬이 갈렸다. 사화가 일어나자 외지로 나가서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보임되었다가 다시 이조 낭관으로 임명되었다. 마침 김안로(金安老)를 이조 참의로 의망(擬望)하게 되었는데, 공이 붓을 잡고 쓰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미움을 받아 파출(罷黜)되었다.




 

임권 전(任權 傳)

1486(성종 17)∼1557(명종 12).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사경(士經), 호는 정곡(靜谷). 보은현감 효돈(孝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안군수(邃安君守) 한(漢)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유겸(由謙)이며,

어머니는 청단찰방(靑丹察訪) 이신(李愼)의 딸이다.


임권은 병오생이고 자(字)는 사경(士經)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기묘년 사화 때에 면직되었다. 뒤에 집의(執義)로 되었으나, 청류(淸流)라 하여 물리침을 당해 외관으로 되었다. 곧 파직되었으나 정유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보유 : 기묘년에 홍문관 박사로 있었는데, 말을 잘못한 까닭으로 좌천되었다. 경진년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교리로 되었다. 야대(夜對)할 때에, “조정에 탐심 많은 대적(大賊)이 있다.” 하였다. 임금이 누구인가를 물었으나 바로 권신(權臣)을 지적하지 못하고, 관(館)에 물러나와서 짐짓 무반(武班) 두어 사람의 이름을 들어서 말막음을 하였다. 이날 밤에 심정(沈貞)이 공의 아버지인 판서 임유겸(任由謙)을 찾아가서, “나는 일찍이 교리를 단아(端雅)한 사람이라 말하였는데 이제 말하는 것을 들으니 모두 기묘년 사람들의 버릇이오. 부형되는 사람이 마땅히 엄하게 단속하여 화를 끼치지 말게 하오.” 하였다. 임유겸은 벌벌 떨면서 답하지 못하였다. 경인년에 장순손(張順孫)이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에 공이 집의로 있었는데 강순손이 갈아치우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임모는 시종 자리에 두는 것이 알맞다.” 하므로, 장이 급히 계하기를, “임모는 청류편 사람이어서 대간에는 알맞지 않으므로 체임하고자 하나, 말리는 자가 있으므로 감히 계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까닭을 묻지 아니하고 ‘알았다.’라고만 하였고, 홍문관에서 논계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공에게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청류측 사람은 모두 나의 벗이다. 그러나 내가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어찌 사퇴하리오.” 하였다. 당시 논의는 김안로를 인용(引用)하려고 하여 조정 논의가 분분하였다. 공은 집의로서 당시의 폐단을 아뢰면서 소장(疏章)을 올려서, 지금 조정 신하가 같은 패끼리 붕당(朋黨)을 맺는다고 아뢰었다. 대사간 심언광(沈彦光)이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서 귀양보내고자 하였으나 관직만 떨어지게 되었다. 예산(禮山)의 농막(農幕)에 돌아가서 그곳에서 종신할 듯하였는데, 김안로가 패한 뒤에 다시 서용되어서 벼슬이 우참찬까지 올랐다.

태상에서 시법(諡法)에, “바른 도(道)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정(貞)이라 하고, 가(可)함을 바쳐 그른 것을 바꾸게 하는 것을 헌(憲)이라 한다.” 하여, 정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의 맏아들 임중신(任重臣)이 소퇴휴(蘇退休 소세양)에게 비명(碑銘)을 청했더니, 퇴휴가 시를 주기를,




섭섭하다, 이 사람은 구원을 격했구나 / 惆悵期人隔九原

늙은 마당에 눈물 뿌리며 새로이 기록하노라 / 白頭揮淚記新銘

세 조정에서 이룬 사업은 역사에 남겠지 / 三朝事業應留史

한 조각 비석에 어찌 나의 정을 다하리 / 一片貞珉詎盡情

혜초는 꺾어지고 난초는 말라도 향기는 남고 / 薰折蘭枯香不滅

용이 죽고 호랑이는 가도 자취는 오히려 분명한 것이다 / 龍亡虎逝迹猶明

이제 영자를 만나 밤새워 이야기하니, 서로 대면한 듯 / 今逢令子連宵話

옛벗의 모습이 의연하여라 / 相對依然舊典刑 하였다.




 

안처순 전(安處順 傳)

1492(성종 23)∼1534(중종 29).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사재당(思齋堂). 남원 출신.

구(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주부윤 지귀(知歸)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기(璣)이며,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 능성현령(綾城縣令) 옥산(玉山)의 딸이다.


안처순은 □□생이고 자(字)는 순지(順之)이며 갑술년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박사로 있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 고을 현감이 되기를 청한 다음 파직되었다.

보유 : 남원에서 대대로 살았다. 정축년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구례 현감 자리를 정하였다. 《충암집(冲庵集)》에 송별시가 있는데, 그 시에,




효도로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만나 / 孝理逢明代

경연의 시종신을 내보내게 되었네 / 經帷掇從臣

마음가짐이 무거운 짐을 지듯하니 / 立心如任重

가는 곳마다 인을 행할 수 있으리 / 隨處可行仁

축수잔은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널리 입혀지고 / 壽洞沾惇寡

예악의 다스림은 산골 백성에게 입혀지리 / 弦歌被洞民

북당에서 기뻐하며 경축하는 기운이 / 北堂歡慶氣

훈훈히 온 백성의 봄이 되리 / 薰作百家春

하고, 또,




자네가 표연하게 떠나는 것 부러워하니 / 羡爾飄然去

응당 슬픔과 기쁨을 고르게 할 것이다 / 還應偸戚均

정위(모친)를 모시려고 전폐를 멀리하니 / 庭闈遙輦陛

시골에는 마음으로 친한 자가 가끔은 있으리라 / 鄕邑間心親

조각달은 남방에 임했고 / 片月臨炎徼

강 흐름은 바닷가에 닿았다 / 江流接海漘

하늘 남쪽에 편지마저 끊어지려니 / 天南書問絶

풀이 돋아나는 봄에 서로 생각하리 / 相憶草生春

하였다. 정암(靜庵)도 또한 시 두어 편을 지어서 전송하였다.

공이 공사를 보던[簿書] 여가에 일찍이 쌍계사(雙溪寺)에 유람하면서 시를 짓기를,




이끼 낀 길을 천천히 걸으니 발이 저절로 올라가게 되고 / 徐步苔□足自躋

산당 돌비는 옛 일을 상기할 만하다 / 山堂石□事堪稽

아득히 오랜 옛적 삼한 선비가 놀았고 / 蒼茫千古三韓士

방박(울퉁불퉁함)한 것은 지금 쓴 것과 같이 네 글자가 적혀 있다 / 磅磚如今四字題

만세 문장은 일월을 부호했고 / □世文章扶日月

당시 필법은 널리 전했다 / 當時筆法可端倪

청학을 사랑해서 선부(신선 이 사는 골)를 찾았으나 / 爲憐靑鶴尋仙府

솔 향기가 소매에 가득할 뿐 길이 아득하다 / 滿袖松香路欲迷

하였다. 이해 겨울에 파직되었고, 곧 죽었다.




 

채세영 전(蔡世英 傳)

1490(성종 21)∼1568(선조 1)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영지(英之). 호는 임진당(任眞堂). 효순(孝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담(潭)이고, 아버지는 첨정 자연(子涓)이며, 어머니는 유효용(柳孝庸)의 딸이다.




채세영은 경술생이고 자(字)는 영지(英之)이다. 경오년에 생원이 되었고 정축년에 급제하였다. 한림으로 있다가 물리침을 당해서 외관으로 되었다가 겨우 조정에 용납되었다.

보유 : 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에 공은 봉교(奉敎)로서 기별을 듣고 차마 물러나 앉을 수 없어 본관(本館)에 달려가니 벌써 모두 파직된 뒤였다. 갈 곳을 몰라 머뭇거리는 참인데, 영상(領相)이 공과 봉교 조구령(趙九齡)ㆍ권예(權輗)를 시켜 전직(前職)대로 사책(史冊)을 편수(編修)하게 한 까닭으로 본관에 있었다. 이튿날 도승지 김근사(金謹思)와 함께 조광조(趙光祖) 등의 조율장(照律狀 일종의 기소 문서)을 친계(親啓)하였다. 임금이 김근사에게 판부(判付)하기를 명하니, 김근사는 어전에서 사관이 가진 사필(史筆)을 빼앗으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이 진계(進啓)하기를, “비록 죄 있는 사람이라도 국인(國人)이 모두 죽여야 마땅하다 한 뒤에라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죄목은 모두 죽일 만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국가의 대사를 대신에게도 가부를 묻지 않고 홀로 결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사필은 다른 사람이 잡을 수 없습니다.” 하고, 도로 빼앗으니 좌우가 숙연하였다. 판부한 것이 내려지니, 대신이 면대하기를 급히 청하는데 말이 매우 간측(懇惻)하였다. 임금의 노기가 조금 풀려서 조광조와 김정(金淨)의 죽임을 감해서 모두 장류(杖流)시키도록 하고, 박세희(朴世熹) 등은 장형을 감하여 가까운 도(道)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김근사가 남에게 말하기를, “조광조가 죽지 않은 것은 내 힘이 크다.” 하니, 그 말을 듣는 자 모두가 미워하였다. 이날 공이 빈청에 나아가서 여러 재상에게, “화가 일어난 연유를 알지 못하니, 국사(國史)에다가 무엇이라고 적겠습니까. 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지 묻겠습니다.” 하니, 좌우 사람이 서로 보면서 감히 말을 못 하였다. 나아가서 영상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다만 본 그대로를 적을 뿐이다.” 하였다. 공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12월에 임금은 공이 반항하는 눈빛으로 과감하게 말하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고 대내에서 하교하기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문하라.” 하였다. 법사(法司)에서 핵문(覈問)하고 죄를 정하여 면관(免官)되었다. 여러 해 만에 다시 서용되어 벼슬을 참찬까지 하고 죽었다.




 

정원 전(鄭源 傳)

1495(연산군 1)∼1546(명종 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중원(仲遠). 정자순(鄭子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결(鄭潔)이고,

아버지는 현감 정유강(鄭有綱)이며, 어머니는 신찬(申澯)의 딸이다.

장령 정희등(鄭希登)의 종숙(從叔)이다.


정원은 을묘생이고 자(字)는 중원(仲遠)이며 기묘년에 급제하였다. 한림으로 있다가 물리침을 당해 외관(外官)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기도 하였다. 외 자(外字)는 산 자(散字)가 옳다.

보유 : 기묘년 겨울에 한림으로 뽑혔다. 경진년 봄에 김충암(金冲庵)의 조옥(詔獄)에서 망명(亡命)한 사안을 사초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논박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계미년에 다시 한림이 되었다. 언관이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관으로 제수한다는 것으로 탄박하여, 드디어 서경(署經)을 하지 않고 기한을 넘겨서 산관(散官)으로 되었다. 정유년에 비로소 높은 요직에 올랐고 을사년에 승지로 있다가 창성(昌城)에 귀양갔다. 정미년에 사사(賜死)되고 적몰(籍沒)당했다가 지금 임금 경오년에 직첩(職牒)과 가산을 돌려받았다.




 

이구 전(李構 傳)

생몰년 미상.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성지(成之), 호는 연경당(燕敬堂). 용궁(龍宮) 출신.

국(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흥(文興)이며, 아버지는 세준(世俊)이다.


이구는 □□생이고 자(字)는 성지(成之)이다. 기묘년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있다가 물리침을 당했다.

보유 : 말미를 고하고 용궁(龍宮) 본가에 돌아갔다가 와서 진계(進啓)하기를, “신이 근일 시골에 있으면서 민정(民情)을 염탐하니, 향약(鄕約)을 시행한 뒤에 풍속이 순후하여지고 조금씩은 향방(向方)을 아는 듯하였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행한다면 장차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이 돌아오는 도중에 보니, 십여 개의 짐바리가 오는데 각 고을에 도착할 때마다 민간의 마소를 몰아다가 운반하도록 하는데 인솔해 오는 자의 꾸지람이 몹시 혹독하고 급했습니다. 신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은즉 사인사(舍人司)에서 구청(求請)한 약재와 무역한 물건이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기에, 일국의 묘당에서 여러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주구(誅求)하는 것이 대중없고, 하급 관리는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작폐(作弊)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체 금단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문에 사인 민수천(閔壽千)ㆍ소세양(蘇世讓)을 추문(推問)하여서 삼자(三資)를 빼앗고 파직시켰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에 공은 한림으로서 정원에 숙직하다가 승지 등과 함께 조옥에 갇혔는데, 다음날 석방되었다. 이에 언관이 논계하기를, “지금 바야흐로 양남에 도적이 부쩍 일어나고, 향약을 적절하게 시행하지 못해서 자주 모이게 하고 지나치게 형장을 가해서 민정이 어수선합니다. 전날 한림 이구가 ‘장차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게 되겠다.’ 고 한 것은 망령된 아룀이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향약도 드디어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공은 10여 년을 시골에 살다가 죽었다.




 

허백기 전(許伯琦 傳)

1493(성종 24)∼?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진(汝珍), 호는 삼송(三松)·호재(浩齋). 추(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讚)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정(楨)이며, 어머니는 유조(兪造)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허백기는 □□생이고 자(字)는 여진(汝珍)이다. 기묘년에 급제하였으나 물리침을 당해서 외관(外官)으로 되었고 세상에 겨우 용납되었다.

보유 : 스스로 호재(浩齋)라고 호(號)하였고, 또 삼송(三松)이라고도 하였다. 벼슬은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박소 전(朴紹 傳)

1493(성종 24)∼1534(중종 2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수학했다




박소는 계축생이고 자(字)는 언주(彦冑)이다.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였으나 과거에 오르지는 못 하였고, 기묘년 봄 식년과(式年科 4년 만에 보이던 정기 과거)에 장원하였다. 이 때문에 물리침을 면했고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다. 뒤에 다른 일로 파직되어 시골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보유 : 무인년 식년 초시에 합격하였다. 또 별과 천목(別科薦目)에는 독실(篤實)한 뜻으로 옛것을 좋아하며 또 문조(文藻)가 있다는 것이었다. 기묘년 식년시에 뽑혔으나 뒤에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죽었다. 아들 박응남(朴應男)ㆍ박응복(朴應福)은 문과에 합격하였고, 박응순(朴應順)은 국구(國舅 왕비의 아버지)로서 추숭(追崇)되었다. 사간 박언주는 솔직하여 거짓이 없고 안팎이 꼭 같았다. 보는 자는 모두 옥인(玉人)이라고 일렀고, 함양(咸陽) 임건(任楗)과는 가장 깊게 사귀었다. 경인년에 동료와 함께 김안로를 제거하기로 논의하여 다음날에 계달(啓達)하기를 약속하였다. 그때에 권예(權輗)가 대사간이었고, 채무택(蔡無擇)이 정언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함양에게 가서 이 일을 말하니 함양이, “자네와 동석한 자는 모두 믿을 만한가.” 하였다. 언주는 무택이 김안로의 당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요량하지 못했으므로 깜짝 놀랐다. 정언부터 먼저 축출하기를 꾀하려고 대사간의 집에 가니, 정언이 벌써 권의 집에 와 있었다. 이미 한패로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다음날 언주는 파직되었다.




 

권장 전(權檣 傳)

1489(성종 20)∼1529(중종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보(濟甫), 호는 우암(寓庵)·제촌(霽村). 계경(啓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곤(琨)이고, 아버지는 생원 사빈(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딸이다.

우찬성 충재 벌(橃)의 동생이다.


권장은 □□생이고 자(字)는 제보(濟甫)이며, 기묘년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박사로 있던 중 물리침을 당해서 외임(外任)으로 있었는데, 술을 한껏 마시고 분해하다 죽었다. 곧 권벙(權橃)의 아우이다.

보유 : 별과 천목(別科薦目)에, 뜻이 소박하고 자질이 순후하여 꾸밈을 일삼지 않으며, 학문이해박하고 효제(孝悌)와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다가 별과에 추천되어 먼저 발탁되었고, 식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되었다. 사화가 있은 뒤에 박사로 승진되었으나 물리침을 당해 용궁 현감(龍宮縣監)이 되었고 술을 한껏 마시다가 죽었다




 

김필 전(金珌 傳)

생몰년 미상.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자수(子修), 호는 모기재(慕箕齋). 정경(定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漑)이고, 아버지는 교감(校勘) 맹강(孟綱)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강희안(姜希顔)의 딸이다.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김필은 □□생이고 자(字)는 자수(子修)이며 기묘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신사년 옥사(獄事)에 연루되었으나 요행히 면한 후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에도 사람만 보면 문득 미친 말을 하였다. 오직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밤낮으로 책을 보았다. 배고파도 먹을 것을 찾지 않았고 추워도 옷을 찾지 않았다. 밥을 주면 먹고 옷을 주면 입을 뿐 인사(人事)를 아주 폐하였다.

보유 : 기묘년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다. 신사년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명록(名錄)에 김자(金子)라는 사람이 있었던 까닭으로 공이 김씨라 하여 갇혔으나 증거가 없었으므로 용서되었다. 본디 안씨 집[安家] 형제와 서로 친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놀라 실성하였고 드디어 병인(病人)이 되었다.




 

성수종 전(成守琮 傳)

1495(연산군 1)∼1533(중종 28).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옥(叔玉).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이며,

어머니는 김극니(金克?)의 딸이다. 수침(守琛)의 아우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성수종은 을묘생이고 자(字)는 숙옥(淑玉)이다. 기묘년에 급제하였으나 미움을 받아 방목(榜目)에 이름이 삭제되어 과거에 떨어졌다.

보유 : 국조 이래로 범죄자를 공신적(功臣籍)에서 삭제하고, 《선원록(璿源錄)》에서도 삭제한 일이 있었으며, 문ㆍ무과에 공평하지 못한 시취(試取)가 있으면 파방(罷榜)하는 일은 있었으나 방목에 명자(名字)를 삭제하는 일은 없었다. 과거에 응시한 사람 중에 성수종이란 자가 기묘년 별시에 합격하였는데 논의하는 자가 대책(對策)의 문리(文理)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목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는데,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보유 : 별과 천목(別科薦目)에는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천과(薦科)에 응했으나 낙제하였다. 10월 별시 전시(殿試)에 안당(安瑭)이 공거(貢擧)를 영솔하면서 남곤(南袞)ㆍ조정암(趙靜庵)과 함께 시소(試所)에 있었다. 한 시권(試券)을 보고 서벽(西壁)에서는 이중(二中)으로 매기려고 하였는데, 동벽(東壁)에서는 주저하면서 삼중(三中)으로 적었다. 정암이, “이와 같은 문조(文藻)는 성(成)모가 아니면 능히 짓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 삼중으로 과거에 참여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잘못을 정암에게로 돌리면서, ‘미리 과거 제목을 알렸고, 글뜻도 연속되지 않는 것을 사정(私情)으로 시취(試取)했다.’는 구실로 방목에서 삭명(削名)하였다. 대개 미워서 물리친 것이었다. 지금 임금 병인년에 공의 아들 성이(成耳)가 글을 올려서 원통함을 아뢰었더니 특명으로 홍패(紅牌)를 주고 방목에도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이약수 전(李若水 傳)

1486(성종 17)∼1531(중종 26).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 충주 출신.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이약수는 □□생이고 자(字)는 지원(止源)이며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다.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형장을 맞고 귀양갔다.

보유 : 이약빙(李若冰)의 형이다. 문장이 호한(浩汗)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되지 못했고 공천(公薦)에도 벼슬하지 못했다. 별과 천목에는 학행이 조촐하고 재주가 풍속을 다듬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대책(對策)을 지었으나 낙제하였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관학(館學)의 여러 학생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워서 물밀듯이 예궐(詣闕)하였는데,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정부 바깥 행랑에 모였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유생 신명인(申命仁)이 앞장서서 부르짖기를, “향도(鄕徒)들도 소장(疏章)을 올려 원통한 것을 호소하려 하는데, 하물며 우리 유생이 해돋을 때 모여서 한낮이 되도록 소장을 초(草)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공이 드디어 붓을 잡아 글을 초하니 여러 학생이 몰려들어서 이름을 적었다. 상달하려 하였으나 궐문을 지키는 자에게 거부당하였다. 여러 학생은 의분이 일어나 문을 밀치고 함부로 들어갔다. 여러 학생 중에는 혹은 상처를 입어서 흐르는 피가 낯을 덮은 자도 있었고, 혹은 망건이 벗겨져서 머리털이 흐트러진 자도 있었다. 궐정에서 통곡하니 소리가 대내(大內)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잡아 가두도록 명하였다. 공이 소두(疏頭)로서 먼저 잡혀가니 여러 학생이 옥으로 몰려와서 갇히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원토(園土 옥)가 비좁고 쇠사슬도 또한 모자라서 목에다 새끼를 맨 자가 종루 아래에 둔취(屯聚)하였다. 금부에서 계하기를, “사람은 많고 옥은 작아서 가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신도 또한 계하기를, “유생이 다만 진심을 드러내어 아뢰려던 것이고, 사체(事體)를 몰랐던 것이니, 우선 추문(推問)하지 말고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여 사(赦)하게 되었다. 신사년에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서기(書記)에 공의 이름이 있었으므로 고문을 받고 평해(平海)로 장류(杖流)되었다가 예산(禮山)으로 옮긴 다음 죽었다.




 

조광좌 전(趙廣佐 傳)

1483(성종 14)∼1521(중종 16).

본관은 한양(漢陽). 일명 광좌(光佐). 자는 계량(季良). 도총제 모(慕)의 증손으로, 군수 훈(勳)의 아들이다.


조광좌는 계묘생이고 자(字)는 계량(季良)이다. 정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천(薦)에 의하여 지평이 되었다.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형장을 맞고 죽었다.

보유 : 공은 천을 여러 번 받았고 전임(轉任)되어서 형조 좌랑이 되었다. 별과 천목에는 식견이 해박하고 행검이 순실하며 일을 주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으나 낙방하였다. 벼슬이 지평이었으나 12월에 삭탈당했다. 신사년에 송사련이 바친 서기(書記)에 공의 이름이 있었으므로, 형장을 맞다가 운명하였다.




 

윤광령 전(尹光齡 傳)

1492년(성종 23)∼미상.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수(彦叟)이고, 호는 나재(懶齋)‧나은(懶隐)이다.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조부는 윤필상(尹弼商)이고, 부친은 윤숙(尹俶)이다.




윤광령은 임자생이고 자(字)는 언수(彦叟)이며 갑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천과(薦科)로 형조 정랑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정유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보유 : 공은 공천(公薦)으로써 여러 번 옮겨져서 현감이 되었다. 별과 천목(別科薦目)에는 심행(心行)이 구차스럽지 않고 재기(才器)와 명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장(試場)에 들어왔으나 대책(對策)을 짓지 않았다. 12월에 형조 정랑을 삭탈당하고 비인(庇仁)에 귀양가서 살다가, 정유년에 석방되어 다시 서용되었고 임천 군수(林川郡守)가 되었다. 체임(遞任)되어 부정(副正)에 임명된 다음 죽었다. 스스로 나옹(懶翁)이라 호(號)하였다. 임천의 부로(父老)가 공이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 무덤 앞에 와서 제 하였으니 그 사랑을 끼친 것이 이와 같았다.




 

의사 안찬 전(醫師安瓚 傳)

?∼1519(중종 14).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황중(黃中). 1517년(중종 12) 12월전의감(典醫監)

안당(安瑭)의 천거로 전의감주부가 되었고, 다음해 의학교수로 천거되어 의원생도를 교습하였다.

1519년에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림들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장류되어가던 도중

연서역(延曙驛)에서 죽었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의사 안찬은 의술에 정통하고 이학(理學)에 더욱 정(精)하니 선비들이 벗하였다. 죄에 연루되어 장배(杖配)되었는데 연서역(延曙驛)에서 죽었다.

척언(摭言) : 의원 안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의서(醫書)를 널리 보아서 의술이 매우 정묘하였고 이학에는 더욱 정하였다. 증세에 따라 시약(施藥)하고, 이치를 참작하여 막힘이 없었다. 남의 질병을 들으면 비록 옛 처방에는 없는 것이라도 병으로 인해 생각을 일으켜 다스리는데 효험을 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병을 묻는 자가 그의 문전에 몰려들었고, 살려낸 사람도 매우 많았다. 한 남자가 새벽에 나들이를 갔다가 도중에 갑자기 두 눈이 붙어서 스스로 눈을 뜨지 못 하였고, 손으로 만져 보면 아교칠로 붙인 것 같았다. 그대로 장님이 되었으나 모두 병의 원인을 몰랐다. 안찬이 풀이하기를, “눈은 폐에 속한 것인데, 폐가 병들었기 때문에 눈이 닫힌 것이다.” 하면서 폐를 치료할 약을 가르쳐 주었다. 그 사람이 그 약을 먹었더니 얼마 아니 되어 눈이 점점 떠지며 평상시와 같아졌다. 또 한 여인이 하루는 음문이 갑자기 아프더니 얼마 후에는 소와 말의 털과 같이 누렇고 검은 것이 서로 섞여서 음문에서 물처럼 솟아나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안찬이 풀이하기를, “털이란 것은 혈(血)의 나머지이다. 혈이 병든 까닭으로 이런 괴이한 일이 있는 것이니 먼저 혈을 다스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약을 받아 먹었더니 오래지 않아서 털이 그치고 평상시와 같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의술이 정하고 식견이 원대하여 용렬한 의원으로서는 미칠 바 아님을 탄복하였으니, 대저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이러므로 한때 중하게 여겨졌고, 진신(縉紳)들도 모두 그와 교유하였는데, 같은 계급의 사람은 매우 꺼리고 미워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기묘년 변이 일어났을 때에 찬성 이항(李沆)이 대사헌이었는데, 안찬이 당인(黨人)과 교제하였다는 이유로 잡아와서 국문하였다. 수일 동안 형장을 받은 다음 하루는 외지로 유배되었는데, 연서역에 이르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이 모두 의술로 이름이 세상에 높았으나 마침내 앙화를 받았으니, 명예를 다투어서 서로 도모하는 것은 사(士)라는 무리도 그러한데 하물며 딴 기술이리오. 안찬의 죽음도 괴이하다 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보유 : 을해년에 안정민(安貞愍)이 전의서 제조(典醫署提調)로 되었다. 안찬을 천거해서 훈도(訓導)로 삼고 나이 젊은 의생(醫生)에게 《소문(素問)》ㆍ《난경(難經)》 등 의서를 배우도록 하니, 박세거(朴世擧) 등이 후일에 모두 명의가 되었다. 어떤 부인이 하루는 아침에 양치질을 하는데 혀끝에서 피가 줄줄 나와서 연일 그치지 않았다. 지혈(止血)약을 많이 썼으나 그치지 않아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안찬에게 가서 물으니 안찬이 말하기를, “급히 용뇌 소합 향원(龍腦蘇合香元)을 복용하라.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구원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 사람이, “속병에는 반드시 그 소합 향원을 먹지마는, 피가 나와서 그치지 않는 것을 낫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하니, 안찬이 풀이하기를, “혀는 심(心)에 속한 것인데 혈에 열이 있으면 끓는다. 지금 이 부인은 평소에 마음을 많이 썼으므로 심기(心氣)가 극히 더워졌고 피가 끓어올라서 혀로 막 나오는 것이다. 만약 피가 다하고 심이 허한 때에 사기(邪氣)가 틈을 타게 되면 구하지 못할 것이다. 심을 다스려서 열을 없애면 피는 저절로 그칠 것이다.” 하였다. 과연 네 개를 먹었더니 흐르던 피가 저절로 그쳤다. 의술이 정묘해서 증세를 묻고 시약하는 데 비록 간곡하게 성심껏 하였으나, 훈도하는 여가에 병을 문의하고 진맥을 받으려는 자가 문과 골목을 메워서 두루 잘 접응하지 못했고, 집은 비좁은데 객이 많아서 또 예모를 갖추지 못하니 헐뜯고 나무람이 다투어 일어났다. 경진년 정월 헌부(憲府)에서 처음에는 안찬이 방리 도약정(坊里都約正)으로 있으면서 형장을 남용했다는 죄목으로 잡아 가두었는데, 국문할 때는 당인(黨人)과 사귀어서 조정 일에 간여했다는 것이었다. 까닭에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묻는 대로 자복하였다. 정암(靜庵)과 같은 죄로써 형조(刑曹)로 넘겨졌고 결장(決杖)한 다음 용천(龍川) 배소로 떠나게 되어 드디어 구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들 안자명(安自命)은 역관(譯官)으로 벼슬이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주1]편작(扁鵲)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명의(名醫). 진(秦) 나라 태의령(太醫令) 이혜(李醯)에게 시기하는 바 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름은 진월인(秦越人)이다.

[주2]창공(倉公) : 한(漢) 나라 사람. 이름은 순우의(淳于意). 태창장(太倉長) 벼슬을 했으므로, 창공이라 한다. 의술이 정통하여 사람의 생사를 알았으며, 문제(文帝) 때에 사람의 병을 치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형을 당할 뻔하였다.




하정 전(河挺傳)


하정은 □□□□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김식(金湜)을 숨겼다는 것으로 이신(李信)의 옥사에 관련되어 베임을 당하였다.

보유 : 공은 현감이 되어 잘 다스린다는 성적(聲績)이 있었다. 포장(褒獎)되어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승진되었고 여러 번 승지로 의망(擬望)되기도 하였다. 사화가 일어난 뒤에는 공에게 착한 정사를 베푼 일이 없다고 계자(階資)를 낮추어서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삼았다. 이신이 고발하기를, 대성(大成 김식의 벼슬)이 도망하는 중에 칠원의 동헌(東軒)에 가서 하정과 함께 유숙하고 나갔다는 것이었다. 금오랑(金吾郞)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금오랑이 창녕 현감(昌寧縣監) 성희문(成希文)과 칠원으로 달려가니 공은 이미 도망한 다음이었다. 당시 재상은 도사(都事)와 현감이 고의로 석방하여 도망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극변(極邊)에 장류(杖流)하였다. 공이 잡혀 궐정(闕庭)에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는데 대성과 논의한 일에 대해 날마다 신문을 받고 형장 4백여 대를 맞았다. 거짓 자복하여 죄를 받았고 가산을 적몰당했다. 만력(萬曆) 원년(元年) 계유 11월 4일 지금 임금이 하교하기를, “원통함을 풀고 억울함을 씻는 것은 왕정(王政)의 큰 일이니, 본인의 존몰(存沒)과 시대의 고금(古今)은 논할 것이 아니다. 하정은 기묘년에 칠원 현감으로 있었는데, 대성인 김식과 하룻밤 같이 잤다는 이유로 간인(奸人)의 독한 손길에 빠져 그 자신은 중한 죄를 입었고 적몰까지 당했다. 사림의 원통함이 50년이나 지났건만 하루나 같다. 지금 공론이 신장되어서 기묘년 여러 현인(賢人)이 이미 소설(昭雪)하는 은전(恩典)을 입었으나, 오직 하정만이 고르게 시행되는 혜택을 입지 못 하였다. 일은 피차가 없는데 은택이 같지 아니하여 선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하여금 구천에서 원통함을 머금게 함은 당시에 살피지 못한 일이었다. 이것은 사림을 보호하고 억울한 죄를 신설(伸雪)하려는 뜻이 자못 없는 것이다.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적몰했던 가산을 돌려주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연관(經筵官) 신점(申點)이 하정의 억울한 죽음을 극력 아뢰었고 또 간원(諫院)에서 논계하였으므로,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다.




 

홍순복 전(洪舜福 傳)


홍순복은 임자생이고 자(字)는 유이(緌以)이다. 김식(金湜)의 제자로

이신(李信)의 옥사에 연루되어 베임을 당했다.

보유 : 사화가 일어나던 날 유생들이 올린 소장(疏章)에 공의 이름이 세 번째에 있었으므로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경진년에 이신이 고발한 말에, “김대성(金大成)이 도망하면서,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집정(執政)한 자를 제거하려 모의를 했다.” 하였으므로, 공이 고문받았다. 자복한 것으로는 장류(杖流)하는 것이 당연하였는데, 대간은 공이 공초하는 말이 불공하며 당시의 국정을 많이 나무랐다 하여 사율(死律)을 더하도록 청하였다. 형을 집행할 때에 새끼[索]가 썩어서 두 번이나 끊어지니 공이 감형관(監刑官)을 돌아보면서, “그대가 왕명을 받들어 형 집행하는 것을 감독하면서 썩은 새끼로써 목을 매느냐.” 하고, 낯빛도 변하지 않았다.




 

심풍 전(沈豐 傳)


심풍은 갑인생이고 자(字)는 호보(浩甫)이다. 김식(金湜)의 표제(表弟)로 장류(杖流)되었다.

보유 : 대성(大成)의 외고(外姑) 아들이며 문인(門人)은 아니었다. 대성 부인의 생일이라 하여 그 집에 갔는데, 마침 관(官)에서 김덕수(金德秀 김식의 아들) 형제를 체포하려다가 못 잡았고 가동(家僮)들도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공이 잡혀 갔다. 이신에게 보이니 이신이, “저놈은 대성이 친신(親信)하던 척질(戚姪)이다.” 하였다. 국문할 때에 말할 바를 모르고, “심정(沈貞)을 칼질하려고 모의하였다.” 하고 공초하였다. 철산(鐵山)에 장류(杖流)되었다가 무진년에 사면되었다. 80여 세를 누리고 죽었다.




 

박연중 전(朴連中 傳)

박연중은 김식(金湜)의 제자인데, 도망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보유 : 박연중은 학도(學徒)는 아니고 김덕순(金德純 김식의 아들)의 아내 이씨의 유모의 의자(義子)로서 일찍이 대성의 집에 살던 자이다. 김덕수(金德秀) 등과 동시에 도주하였다. 애초에 이신이 고발하면서, “박연중은 효용(驍勇)하고 강건하다.” 한 까닭으로 더욱 급히 체포하려 하였다. 사면된 후에도 오히려 나오지 않았다.



추록(追錄)


 

구수담 전(具壽聃 傳)

1500(연산군 6)∼1549(명종 4)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천로(天老). 강(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참의 신충(信忠)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頤)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현감 의영(宜榮)의 딸이다.

형은 수복(壽福)이며, 조광조(趙光祖)의 조카사위이자 문인이다.




구수담은 경신생이고 자(字)는 천로(天老)이며, 무자년에 급제하였다. 수찬(修撰)으로 있으면서 기묘년의 당인(黨人)을 다시 서용하기를 청하였다가 당시 재상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 이어 용천(龍川)으로 귀양갔다.

보유 : 구수복(具壽福)의 아우이다. 계사년에 수찬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야대(夜對)에 입시하여, 당인이 죄없이 오래 폐출되었음을 극진하게 논란하고 거두어 서용하기를 청하였다. 뒤에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갔다. 그러나 기묘ㆍ경진ㆍ신사년에 귀양간 사람과 입거(入居)한 양천(良賤 양민과 천민) 모두 60여 호(戶)가 동시에 석방된 것은 모두 공이 그들의 원통하고 민망한 정상을 힘껏 아뢴 데에 연유한 것이었다. 정유년에 김안로가 패한 뒤에 다시 서용되어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을사년에 이기(李芑)에게 미움을 받아 또 갑산(甲山)에 귀양갔고 기사년 지금 임금 초년에 사면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준경 전(李浚慶 傳)

1499(연산군 5)∼1572(선조 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

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탄수 이연경 문인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이준경은 기미생이고 자(字)는 원길(原吉)이며, 신묘년에 급제하였다. 수찬이 되었다가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파직되었다.

보유 : 정유년에 다시 서용되었는데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판서에 이르렀다. 정묘년 6월에 중국 사신 허국(許國) 등이 융경황제(隆慶皇帝)의 등극 조서를 가지고 국경에 이르렀는데, 명종(明宗)이 승하하였다. 나라 안팎이 법석대고 술렁댈 즈음인데, 공이 수상(首相)으로서 유조(遺詔)를 받들어 지금 임금을 맞이하여 세우고 조서를 반포하게 하니 상하가 안연(晏然)하였으므로 중국 사신도 탄복하였다. 그 뒤에 보우(普雨)를 죄주고 원형(元衡)을 내치며 원왕(冤枉)함을 풀어 주고 폐정(廢政)을 혁신한 것은 모두 공이 보좌한 것이었다. 수상을 사퇴하고 한가롭게 살면서 수년 동안 병을 조리하였다. 죽음이 임박하자 소장(疏章)을 올려 당시 정사에 힘써야 할 점을 힘껏 아뢰고 죽었다.




천거과(薦擧科)


홍패(紅牌)에 다만 별시 현량(別試賢良)이라고 적은 것은 당시 조정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

당시 논의에,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과거 한 길뿐이다. 구두(句讀)만 아는 선비를 모아서 조금 나은 것을 비교하는 까닭으로, 큰 덕을 가진 뛰어난 학자는 봉필(蓬蓽)에서 생을 마치면서 문달(聞達)하기를 구하지 아니한다. 유일(遺逸)된 인재를 찾아서 조정에 포치(布置)한다면 비록 3대의 아름다운 정사가 이루어졌다고 이를 것이나, 선왕의 법을 경솔하게 변경할 수는 없는즉 논사(論思)하는 임무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구애되는 바가 많다. 그러니 추천으로 뽑아 시취(試取)해서 한(漢) 나라 때의 좋은 법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온 조정이 합청(合請)하였다. 조정암(趙靜庵)도 또한 논계(論啓)하기를, “전하의 지극한 다스림이 오래도록 아직도 효과가 없는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한 까닭입니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하면 인재 얻기를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임금이 서울과 외방에 명하여 재예와 행검을 겸비하여 임용할 만한 사람을 심사하였더니 총 1백 20명이었다. 기묘년 4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을 과시(科試)한 다음 28명을 취하여 순위를 따지지 않고 서용하였는데, 홍문관에 채용된 자는 18명이었다. 11월 사화가 일어난 뒤에 당시 재상이 생각하기를 청의(淸議)하는 사람은 천과(薦科) 출신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하나씩 잇달아서 탄핵하고 제거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대간을 부추겨서 그 과거를 혁파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보통 문과에는 초시(初試)를 뽑아 전시(殿試)에서 친림(親臨)하는 것이니, 천과에서 다만 문과를 파방(罷榜)하라.” 하였다. 을사년 6월 인묘(仁廟) 말년에 이 과거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과거에 오른 사람으로서 생존한 자가 14명인데, 파방된 뒤에 혹은 다른 과거에 올랐거나 혹은 외관에 보임되었고 한직에 있는 자가 11명이었고, 교리(校理) 이연경(李延慶), 칠원(漆原) 김대유(金大有), 한림(翰林) 신준미(申遵美)는 마침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문정왕후(文正王后)가 수렴(垂簾)하게 되자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이 인심을 수합하고자 왕명을 사칭하여 복과(復科)한 것이라 하였다. 드디어 우의정 이기(李芑)를 부추겨서 10월 10일에 계청하여 그 과거를 도로 파방하였는데, 실상은 인묘(仁廟)를 미워한 것이었다. 무진년 10월 8일에 뇌성벽력이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삼공(三公) 이준경(李浚慶) 등이 재변(災變)으로 인해 복과하기를 청해서 곧 윤허되었다.




무인년 6월 5일. 문과 천거 사목(文科薦擧事目) 중종 13년이다.

전지(傳旨)하기를, “정사를 하는 급무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 첫째이니, 현인을 추천하는 책임은 오직 재보(宰輔)에게 있다. 사방으로 준예(俊乂)를 부르는 데에는 입에 먹던 것을 토하고 감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 잡고서 맞이하였으니, 옛날 어진 정승은 모두 이것을 급무로 하였다. 구하는 데에 길이 있는 것이지 어느 세대라고 어찌 사람이 없으랴. 나는 정사에 임하여 잘 다스리기를 원하여 어진 이 구하기를 목 마른 데 물 구하듯 급하게 하였다. 지금 1기(紀 12년)나 되었으나 치적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진 인재를 혹 빠뜨림인가, 주의(注擬)할 때에 매양 사람이 모자란다는 탄식이 있으니 어찌 깊이 개탄할 바 아니리오. 여러 현철한 신하의 보좌를 힘입어서 거의 태평한 다스림에 이르고자 하나니 정부에서는 나의 마음을 알아서 널리 순방하여 내가 급하게 여기는 뜻에 부응하라.” 하는 이 말을 의정부에 내렸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함께 논의한 계목(啓目)에, “역대의 인재를 취한 법은 규모와 제도가 각자 달라서 다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서한(西漢) 때의 효렴(孝廉)ㆍ현량(賢良) 등 과거가 가장 근고(近古)한때의 일이며 또 선거하는 방법은 사책(史策)에 상고할 수 있습니다. 원삭(元朔) 5년에 군국(郡國)ㆍ현관(縣官)에게 조서를 내려, ‘문학을 좋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정교(政敎)를 공경하게 받들고 향리 사람에게 순하며, 나가고 들어감이 들은 바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영(令)ㆍ상(相)ㆍ장(長)은 바삐 소속한 이천석에게 알려 신중히 살피게 하고, 어사(御史)ㆍ사예(司隸)ㆍ주목(州牧)은 해마다 재능이 훌륭한 사람과 사행(四行)을 갖춘 사람 각 한 사람씩을 천거하라.’ 하였습니다. 사행이란 것은 순후(醇厚)ㆍ질박(質撲)ㆍ겸손(謙遜)ㆍ절검(節儉)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국의 훌륭한 인재가 모두 경사에 도착하면 천자가 난간에 임하여 친히 책문(策問)한다.’ 하였습니다. 선발하는 절차가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지금도 이 법을 본받아서 재예와 행검이 겸비되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명망과 실덕(實德)을 심사하여 널리 천거하게 합니다. 서울에서는 4관(館)에서 전적으로 주관하여 유생이나 조사(朝士)를 물론하고 다 성균관에 천거하며, 성균관에서는 예조에 전보(轉報)합니다. 중추부(中樞府)ㆍ육조ㆍ한성부ㆍ홍문관에서도 또한 아는대로 들어서 예조에 이문(移文)합니다. 외방(外方)에서는 유향소(留鄕所)에서 본읍(本邑)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면 감사는 다시 잘 살펴서 예조에 이문하도록 합니다. 예조에서는 서울과 외방에서 천문(薦聞)한 바를 수합하여 성명과 행실을 갖추어 정원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며, 전책 집사(殿策執事)가 때에 맞추어 계품(啓稟)합니다. 그 사이에 명망과 실덕이 어긋나는 사람을 속여서 천거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스러우니, 그 사람을 천거하도록 주장한 사람의 성명도 아울러 기록하여 후일 검토할 때에 증빙이 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여,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기묘년 4월 10일(중종 14년)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거둥하여 책문 제목(策文題目)을 명하였고,

서울과 지방에서 천거된 이가 1백 2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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