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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君 臣臣(군군 신신)

칠봉인 2018. 1. 23. 09:11

君君 臣臣(군군 신신)

(군왕은 군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이 말은 논어 안연편(論語 顔淵篇)에 나온다.

제경공(齊景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정치란 무엇입니까(問政)?

공자 답변하기를,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했다.

즉 군왕은 군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란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 위치에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구실을 착실히 할 수 있는 도덕풍토의 성숙함을 마련해가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다워야 한다”는 어휘 속에는 가장 이상적인 극치(極致)의 아름다움이

보편적 가치로 자리매김 되어 있음을 귀띔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설원 군도편(說苑 君道篇)에서 보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연나라의 소왕(燕昭王)이 곽괴(郭愧)에게 묻기를,

연나라는 국토가 협소하고 인구규모도 작다.

연나라의 주변을 외워 싸고 있는 열강들의 틈새에서 생존해갈 수 있는 길이 있는가?

(地狹人寡 存之有道乎?). 곽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왕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은 스승이다 (帝王之臣 其名臣 其實師也).

군왕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은 벗이다  (君王之臣 其名臣 其實友也).

패왕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은 손님이다 (覇者之臣 其名臣 其實賓也).

위국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은 포로다  (危國之臣 其名臣 其實虜也).

여기에서 귀띔해주고 있는 것은,

첫째 연소군 자신이 제국 왕국 패국 위국(帝國 王國 覇國 危國) 중,

       어떤 유형의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인가를 먼저 반성하라는 것이고,

둘째 군왕이 어떤 유형의 군왕이냐에 따라서 신하의 역할과 개념이 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군왕이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그 휘하의 신하들은 이미 준비된 신하로서 군왕의 스승다운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국토의 규모나 인구의 많고 적고를 떠나서 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왕이 현군다운 학덕을 갖추고 있다면 학덕을 지닌 신하들은 군신간에

        격의 없는 소통통로를 통하여 의견교환 및 정보수수(授受)의 가능성을 높여갈 수 있다.

        따라서 부민강국(富民强國)의 국기(國基)를 다져가게 될 것인바.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패주치하(覇主治下)의 신하들은 나그네와 같아서

묻는 말에만 답변하는 형편이기 대문에 직언이나 충언으로서

범안진간(犯顔進諫)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패주의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모든 일이 패주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만족으로 여기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의 경우에는 군왕이 신하를

마치 포로인양 구사(驅使)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하를 스승처럼 받든 나라는 주(周)나라다.

주의 문왕과 무왕은 양대에 걸쳐서 강태고망(姜太公望)을 사보(師父)로 모셨다.

주나라가 중국 역사의 큰 맥락을 이어갈 수 있는 기간국(基幹國)으로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었다.

 

신하를 벗처럼 여긴 경우는 당태종이다.

당태종이 중국 역사상 강성문화대국(强盛文化大國)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당태종과 위징(魏徵)이라는 군신간의 관계가 충성과 신의의 덕목으로 밀착될

수 있었던 친구이상의 정렬이 상통했기 때문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신하를 나그네처럼 존대했던 사례는 제환공(齊桓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제환공에 있어서 관중(管仲)은 주인과 존경받는 귀빈관계 이었다.

제환공이 패주(覇主)가 될 수 있게끔 보필을

잘 했던 것은 물론 관중의 공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관중이 위징의 경우와 근본적으로 상이했던 것은, 위징의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고 충간하기를 주저하지 안 했다.

 

이에 비하여 관중은 재환공의 질문에 선답(善答)을 주었을지언정, 목숨을 내걸고

직간했던 일이 없다. 그것은 제환공에게 있어서 관중은 귀빈과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를 포로처럼 여긴 군왕은 진시황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육국통합을 획책하고 있었던 진나라는 분명히 전시중의 위국(危國)이었다.

위국(危國)인 진(秦)나라에 있어서 이사(李斯)와 조고(趙高)는 진나라 출신이 아니었다.

이사는 초나라 사람이고 조고는 조나라 사람이다.

진시황에게 붙들려서 영상이 되고 궁내장(宮內長)이 될 수도 있었지만

진시황의 쇠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포로에 지나지 안 했다.

포로의 기본적 생태는 기회만 나면 탈출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탈출기회는 진시황이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부터 과거의 충성심은 간데없고 왕세자를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진행했었다.

그러나 둘 다 죽는다. 그리고 진(秦)나라도 멸망한다.

그것이 진시황(秦始皇)과 진나라의 사례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위의 내용을 다시 간추려본다면 다음과 같이 약술(略述)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 재앙(帝王)이라는 어휘에 관해서 과민반응을 들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제왕을 전제군주(專制君主)의 이미지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의 경우,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제왕적 리더십을 지닌 사람은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면,

세종대왕(世宗大王)과 같은 인물의 등장이나 정조대왕(正祖大王)과 같은 인물의 등장도

반드시 배제돼야 한다고 보아야할 것인가?

이분논법에 따른다면 그런 유형의 인물은 제왕적이기 때문에 마땅히 배제돼야 할 것이다.

 

만의 하나 그러한 논법이 옳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판단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왕의 본질을 연원적(淵源的)으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다만 과거 군주국가채제하의 군왕이었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질론적인 시각애서 설명을 한다면,

 

황(皇)은 명일자(明一者)를 말하는 것이다.

명일자라는 것은 일(一)로 통하는 이치의 세계를

명료하게 이해고 체득한 인물임을 말한다.

때문에 태극(太極)이 一로 통하고, 마음의 극점(極點)이 일로 통하며,

사물의 존재법칙인 유물유칙(有物有則)의 근원도 一로 통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유교(儒敎)에서 겨냥하는 집중관일(執中貫一)이나,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포원수일(砲元守一)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묵도친일(默禱親一),

그리고 회교에서 말하는 청진반일(淸眞返一) 및

불교에서 외치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

모두 한 결 같이 一로 상통하고 있다.

 

그래서 一이라는 것(一者)은 만(萬)에 대칭되는 것이 아니며(一不對萬),

만(萬)이라는 것은 一이 나누어진 한 부분(萬者 一之分也)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논리로서도 一은 萬의 근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천하의 유일한 치자(治者)를 천황(天皇)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를 천자(天子)라고 일컫는 까닭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제(帝)에 관해서 알아본다. 제(帝)는 찰도자(察道者)를 말한다.

찰도자는 우주질서의 운행원리를 터득하기 위해 정확하고

정밀하게 살필 줄 아는 이를 이르는 말이다. 전후상하(前後上下)의 무한대

공간개념을 우(宇)라하고 왕고내금(往古來今)의 무한대 시간개념을 주(宙)라고 한다.

그래서 지대무외(至大無外)라는 말로 우주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즉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 우주 이외에 다른 공간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다.

 

그와 같은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고 있느냐하는 것을 우리는 천도(天道)라고 한다.

천도는 수시로 바뀌는 상태로 움직이면서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질서정연하게 변전(變轉)해가고 있다.

해와 달이 바뀌는 것을 음양(陰陽)의 변화라고 하며,

음양은 다시 사상(四象)으로 분화하고 사상은 또 팔괘(八卦)로 발전하여

그것이 64효(爻)로 세분화한다. 이에 관하여 체계 있게 정리해놓은 기록을

일컬어 주역(周易)이라 한다. 주역을 일컬어 마치 점술학(占術學)인양

일부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주역은 최고 최귀(最古最貴)의 통치실학으로 보아야 한다.

 

해를 중심으로 한 태양력(太陽曆)과,

달을 중심으로 한 태음력(太陰曆),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절충해서 만들어 놓은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을 사용하여

임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계절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지혜를 일깨우고

각종 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최대한의 안정을 도모해간다.

자연은 영원불변의 순환법칙(循環法則)을 바탕으로 하여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통해서 만물의 생성(生成)과 소장(消長)의

질서를 연출하는가하면, 24절기(節氣)의 특성을 알려서

모든 생류(生類)로 하여금 생존추구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5일을 단위로 하는 72후(候)는 1년간의

생활을 자연과 더불어 함께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생활 메뉴를 제공하고 있다.

 

즉 기후풍토 면에서 연중 180일간을, 소한(小寒)에 매화가 피어나는 것을 비롯하여

5일 간격으로 꽃을 피우고 아울러 5일 간격으로 열매를 맺게 함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수확하고 유통할 수 있도록 지혜를 유도하였으니 이를 화신풍(花信風)이라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시장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는“오일장”이 여기에서 연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풍십우(五風十雨)라는 우순풍조(雨順風調)현상은 시화연풍(時和年豊)의

징후를 알리면서 자연과 더불어 순리에 따라 서로 화평하게 살아가기 위한

선인심성(善人心性)을 길러갈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임금(帝)은 이와 같은 자연운행의 도(道)를 살펴서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치자(治者)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帝)를 찰도자(察道者)라 말하는 것이다.

왕(王)은 통덕자(通德者)를 말한다.

통덕자라는 것은 위로는 천리(天理)로 통하고, 알로는 사물과 통하며,

사회적으로는 국민과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이를 자조자 천조 또는 신조라고 한다(自助者天助<神助>).

돌이켜보면 그 말은 천소이조자 순야(天所以助者 順也)라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즉 하늘이 돕는다고 하는 까닭은 인간이 하늘의 이치에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치에 따라 순리적으로 살아간다면 재앙을 입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위로는 천리(天理)에 따라 천도(天道)가 건재하고,

알로는 사물마다 스스로 존재하는 유물유칙(有物有則)이라는 법칙에 떠라

생성소장(生成消長)하는 질서가 엄존한다.

천도와 질서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은 최적조화(最適調和)의 원리를 존중하고 아울러

이체조화의 원리를 존중하면서 조화와 상생의 덕성(德性)을 소중히 여길 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각에서 본다면,

 

황제(皇帝)는 황(皇:明一者)과 제(帝:察道者)의 결함어(結合語)로서,

이를테면 황제는 명일찰도자(明一察道者)를 말하는 것이요.

제왕(帝王)은 제(帝:察道者)와 왕(王:通德者)의 결합어로서,

이를테면 제왕은 찰도통덕자(察道通德者)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황제와 제왕에 대한 위격(位格)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이든, 제왕이든, 권력을 지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치자(治者)라는 인식 이전에,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춘 지도자이며

아울러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는 지도자임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이른바 외왕내성(外王內聖)과 외관내현(外官內賢)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외왕내성은, 최고지도자일수록 외면적으로는 통치자인 왕이지만

내면으로는 성인다워야 한다는 뜻이며.

외관내현은, 각료 등 공직자일수록 외면적으로는 행정을 전담하는 관료이지만

내면으로는 현인 군자(賢人 君子)처럼 높은 수준의 학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고훈(古訓)으로 전해지고 있는

군군신신(君君臣臣)의 논리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생각컨대 다음과 같은 모형을 바탕으로 하여

그 모형에 역사적인 사실을 조명해본다면,

아마도 회고와 반성이라는 시각에서 음미의 여지를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A형:君君 臣臣------ 군왕이 군왕답고 신하가 신하다운 경우.

B형:君君 臣不臣---- 군왕은 군왕다운데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경우.

C형:君不君 臣臣---- 군왕이 군왕답지 못하지만 신하는 신하다운 경우.

D형:君不君 臣不臣--- 군왕은 군왕답지 못하고 신하도 신하답지 못한 경우.

 

A형은 치세(治世)에 해당하며, 世宗시대가 이에 부합한다.

B형은 간신이 상대적으로 많은 不安定平世로서 正祖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C형은 부덕한 宣祖시대 일부 충신에 의하여 구국한 壬亂期가 이에 해당한다.

D형은 왕위 찬탈 위해 간신에 의한 인재살상이 많았던 世祖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의 정국에 대한 국민적 여망은 군군신신(君君臣臣)시대의 전개다.

정직과 신의와 청렴의 덕목으로 상징되는 박근혜정부는

군군(君君)의 기반을 상당한 수준에서 다져가고 있다는

국민적 신뢰가 여론상 높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신불신(臣不臣)의 음영(陰影)이 외교현장에서 불거졌는가하면,

정가 일각에는 아직도 기대미달의 그늘이 서려있다는 일반적인 우려사항이

되도록 빨리 제쳑(除斥)되기를 바라는 국민적 기대가 간절하다.

 

대학(大學)에서 보면 작신민(作新民)이라는 말이 나온다.

백성들로 하여금 새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덕정(德政)을 펴간다는 뜻이다.

작신민을 하기 위해서는 먼서 자신(自新)하라 했다.

자신은 스스로 자기혁신을 생활화해간다는 뜻이다.

어떤 경우에도 신불신(臣不臣)의 눈총(十目所視)과

지탄(十手所指)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自新)해야 한다는 것을

대학을 일별(一瞥)하면서 한번쯤 음미해보는 것은 어떠할는지

대학 일독을 권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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