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어쩌구 저쩌구

[조선시대 사랑채]

칠봉인 2018. 1. 23. 10:10

[조선시대 사랑채]

조선시대 나그네 머물던 사랑채,

손님 대접하고 친목 도모하던 장소
열화당 등 문화재로 보전하고 있죠

여행할 때 호텔이나 여관 등 전문 숙박업소에서 묵지 않고

일반 가정집에서 머무르는 것을 '민박'이라고 해요.

현재 농어촌 지역에선 일반주택에서 내국인과 외국인을 상대로 민박업을 할 수 있는데,

도시 지역에선 오직 외국인을 대상으로만 민박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답니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도시 지역 주택에서도 내·외국인 손님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공유 민박업'을 실시하기로 하고 관련 규정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집을 떠나 먼 길을 떠나거나 여행을 할 때 주로 어디서 머물렀을까요?

◇"하룻밤 묵어 갈 수 있겠소?"
"이리 오너라~." "뉘시온지요?"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묵어가도 괜찮을지 주인께 여쭈어 보거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드라마를 보면 종종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가

어느 기와집 대문 앞에서 그 집 하인을 불러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집을 나선 나그네가 어느 양반집을 찾아가 하룻밤 잘 곳을 청하는 장면이지요.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기 쉽지 않았어요.

평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생계를 위한 일에 매달려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살던 곳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날 일이 많지 않았지요.

먼 길을 나서 다른 곳에서 숙박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거나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기예를 보여주는 사람들, 이름난 산과 계곡 등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선비들이었지요.


"손님, 저희 주인 나리께서 묵어가도 좋다 하십니다. 어서 사랑채로 드십시오."
여행길에 나선 나그네들이 낯선 지역에서 숙박을 한 곳은 양반집의 사랑채라는 곳이었어요.

사랑채는 바깥주인, 즉 그 집의 남자 주인이 생활하는 곳으로 집의 구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은 대문 옆에 붙어 있는 하인들의 행랑채 뒤에 독립적인 건물로 따로 지어졌지요.

사랑방과 대청마루, 누마루, 서고(書庫) 등으로 구성됐는데 자녀들을 교육하거나 이웃·친지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쓰였어요. 또 외부에서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여 민박 같은 기능을 했지요.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나그네가 묵어가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았답니다.

그 이유는 나그네를 통해 다른 지역 소식과 최신 정보를 듣기도 했고,

그들을 홀대했을 때 혹시나 지역에서 자기에 대한 평판이 나쁘게 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에요. 또 멀리서 온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여겼지요.

◇조선시대의 이름난 사랑채들

조선시대 수많은 나그네가 드나들어 이름이 난 양반집 사랑채로는

열화당, 녹우당, 운조루, 노안당 등을 들 수 있어요.

현재는 대부분 국가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해 보전하고 있어요.

열화당(悅話堂)은 강원도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사랑채 이름으로,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 뜻이에요.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형이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과

그 후손들이 생활한 집이랍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이내번의 손자인 이후가

1815년 지었는데, 당시 전통문화를 보전하고 사회 담론을

만들어내는 산실 같은 역할을 하였지요.

전남 해남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은 유명한 시조인 '어부사시사'를 지은

조선 중기 문신(文臣) 윤선도가 살았던 집의 사랑채로,

효종 임금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해남으로 옮겨온 것이에요.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초록비가 내리는 집'이란 뜻인데,

뒤편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초록색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에요.

운조루(雲鳥樓)는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전남 구례 오미리에 있는

류씨 가문의 큰 사랑채 누마루예요. '구름 속 새처럼 숨어 있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영조 때 류이주란 인물이 낙안군수로 있을 때 지은 집으로

선교장처럼 규모가 매우 큰 '99칸 양반집'이었어요.

'노년을 편안하게 지낸다'는 뜻의 노안당(老安堂)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집이었던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었어요.

원래 운현궁은 창덕궁 건너편에 있는 규모가 작은 집이었지만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그를 대신해 정치를 하자 '궁'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진짜 궁궐처럼 규모가 커졌지요. 이후 10여년간 흥선대원군이 최고 실세로 군림하면서

경복궁이 아닌 노안당에서 모든 나랏일을 논의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노안당을 '흥선대원군의 정치 사랑방'이라고 불렀답니다.

 

☞숙식과 술 제공하던 주막

서민들이 묵어가던 숙박시설로는 주막이 있었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거나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방랑객들이 이곳에서 묵었지요. 주막은 술이나 음식도 팔고

잠도 재워주는 곳으로 오늘날로 치면 술집 겸 식당 겸 여관이라고 볼 수 있어요.

대체로 장터나 큰 길목, 나루터 등에 있었는데 시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큰 마을에도 많아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생겼지요


'기타 > 어쩌구 저쩌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不經一事 不長一智 (불경일사 부장일지)  (0) 2018.01.29
오동나무  (0) 2018.01.27
奬忠壇 (장춘단 )  (0) 2018.01.23
君君 臣臣(군군 신신)  (0) 2018.01.23
친구  (0) 2018.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