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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田渡 (삼전도)비

칠봉인 2018. 4. 6. 22:52
三田渡 (삼전도)비

[번역문]

황제께서 십만 군대로 동방에 원정오니
천둥 같은 기세에다 범처럼 용맹했네.(중략)

우리 임금 복종하여 다 함께 귀순하니
위엄 때문 아니요 덕에 귀의한 것이라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푸시고
온화한 낯빛으로 창과 방패 거두셨네.(중략)

우리 임금 돌아오니 황제의 은덕이요
황제께서 군대 돌려 우리 백성 살리셨네.(중략)

우뚝한 비석이 한강가에 서 있으니
만년토록 조선 땅에 황제의 덕 빛나리라.

[원문]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中略) 我后祗服, 相率以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中略)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中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대청황제공덕비(大淸

                                              皇帝功德碑)


        해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나루

에 주둔한 청 태종(淸太宗) 홍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행하며 항복을 고하였다.

태종은 왕자들과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를 포로로 잡아가면서 항복을 받은 자리에

전승을 기념하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바로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삼전도비 전면. 용두, 비신, 귀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 5.7m, 비신 3.95m, 폭 1.4m의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비를 어느 누구도 대청황제공덕비라 부르지

않았다. 건립 당시부터 후대의 각종 문헌에 이르기까지

비석이 있는 삼전나루의 이름을 따라 그저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렀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거북한 치욕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이상 누군가는 이 치욕의

비문을 지어야 했다. 역사의 오명을 짊어지는 일을 누가

맡을 것인가? 1637년 11월 25일, 인조는 비문을 지을

사람을 추천하라고 비변사에 명을 내렸다.

장유(張維), 이경전(李慶全), 조희일(趙希逸), 이경석(李景奭) 등 네 사람의 명단이 올라왔다. 장유는 모친상을

이유로 사양했고 다른 이들도 각자 나름의 이유를 댔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후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이경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비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조잡하게 써서 1차로

탈락했고,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비문은 청나라에 보내

최종적으로 이경석의 비문이 채택되었다.

  먼저 비석에 필요한 석재를 마련해야 했다.

처음 준비한 것은 비석 상단의 용두(龍頭)와 몸통인 비신(碑身)을 포함하여 높이 10척 5촌으로 준비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에 최종 보고하는 과정에서 비석의 크기가 변경되어 비신 12척에 용두 2척 2촌으로 그 규모가 커지게 된다. 그에 따라 석재를 다시 마련해야 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도 비신의 크기에 맞게

교체해야 했다.

 이전에 제작된 삼전도비 귀부. 현재는 귀부만 남아 있고

    용두와 비신은 다른 용도로 사용된 듯하다.

비문은 세 가지 문자로 기록하였다. 정면은

청나라 문자와 몽고 문자이고 후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인 오준(吳竣)이 쓰고,

비문 위에 전서(篆書)로 쓴 ‘대청황제공덕비’란 비액(碑額) 글씨 일곱 자는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이렇게 새긴 다음 비면의 ‘황제(皇帝)’자는 황금빛 니금(泥金)을 입히고 나머지 글자는 주홍색으로 칠을 하여 1639년 12월 8일에 모든 공역을 완료했다.

그 후로 청나라 사신은 조선에 올 때마다 한강을 건너가

이 비석과 남한산성을 둘러보며 조선의 종주국임을

과시했다.

삼전도비는 1895년 조선이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면서 훼철되어 땅속에 파묻히게 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광복 후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또다시 땅속에 묻혔다. 1963년에 대홍수로 인해 땅 위로 드러나기는 했으나

인근의 빈터로 이전을 거듭하다 2010년이 되어서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현재의 석촌호수 서호(西湖) 언덕으로

돌아왔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와 송파대로 사이의

호수 안이 본래의 위치로 추정되었으나 물속이라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호숫가 언덕으로 옮긴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곳에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이 흐르고 있었고, 송파강 이북의 땅인 현재의 잠실지역은 강 북쪽의 광진구 자양동에 붙어 있었다. 그 뒤로 여러 차례 홍수를

겪으면서 새로운 물길인 신천강(新川江)이 생겨나 잠실지역은 섬이 되었고 1970년대에 들어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송파강을 매립하고 신천강을 확장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당시 송파강의 일부를 매립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바로 석촌호수이다.

  삼전도비가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에는 비석 곁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린 부조물(1982년 김창희 조각)이 있고 그 아래에는 동판(銅版)에다 병자호란 당시의 내력을 적어 놓았다. 그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수난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이

 

 같은 오욕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

 

  록 민족의 자존을 드높이고 자주, 자강의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부조물은 이전하면서 함께 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를 대체할 만한 그 어떤 문구도 비석 주위에는 찾아볼 수 없다.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고 싶은 마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삼전나루의 옛터에 철쭉이 가득하다.

봄을 맞아 이른 아침부터 놀이기구를 타는 어린 학생들의 즐거운 비명과 호숫길에 꽃구경 나온 청춘 남녀의 다정한 모습들 곁에서 삼전도비는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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