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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醉無歸(불취무귀)正祖의 건배사

칠봉인 2020. 6. 20. 20:36

不醉無歸(불취무귀)正祖의 건배사
   "취하지 않은자,돌아갈 수 없다"

우리민족의 술에 대한 이야기와 정조의 술버릇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자주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시고 죽자 식으로 이뤄지는 술 문화입니다.
이게 참 유래가 깊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이나

<후한서>에도 우리 조상들의 음주가무가 무지막지함을

지적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뭔가 종족특성 같은 느낌일까요.

물론 자연을 벗 삼아서 운치 있게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읊고, 풍류를 즐기는.이런 모습 선비들이

술 마시는 바람직한 법도이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주량을 배려하지 않고

함부로 술을 권하는 건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지요.
그런데 이게 말이 그렇다는 거고.실제로

잘 지켜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저런 운치 있는 술자리는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며 조선의 술 문화를 대차게 깐 일도 있지요.

선비들이 이런데 일반 백성들이라고

깔끔하게 먹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임금 중에서도 술버릇이 참 안 좋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正祖입니다. 학구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술을 참 오지게 마셨습니다.

물론 평소에는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그런 게 맞기는 한데,

어쩌다 가끔 한 번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하지요.
더군다나 정조의 술버릇은 타인을 무진장 피곤하게 만드는

술 권하기.실록에서 정조 16년(1792) 3월 2일 기사를 한 번 보지요.

정조가 과거에 급제한 유생들을 모아두고 잔치를 연 적이 있습니다.

잔치를 시작하자마자 정조가 원대한 포부를 밝힙니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대학교 MT같은 곳에서 교수님이 말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무려 주상 전하의 말입니다.
더군다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때 정조는 왕의 비서격인 승지에게 잔을 돌릴 것을 명하고,

또 다른 승지에게는 잔을 잘 돌리는지 감시까지 하게 합니다.
당연히 유생들은 빼지도 못하고 마셨겠지요.
이렇게 잔치가 한창이던 때, 유생 중에 오태증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오씨 집안이 술 잘 마시기로 이름이 높았나 봅니다.

오태증의 할아버지가 숙종 대에 활동한 오도일이란 사람이었는데

신하들이 할아버지 이름을 언급하며 손자도 술 잘 마신다고 칭찬했지요.
큰 잔으로 다섯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정조가 말합니다.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오태증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잔을 주어라." 결국 오태증은 정조가 준

다섯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고 완전히 만취해버립니다.

몸도 못가누고 곯아 떨어지지요. 정조는 또 흐뭇해하며,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 조에 고 판서 (오도일)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음.
뭐가 미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정조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마셨습니다.

정조 술버릇의 또 다른 희생자가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술을 잘 못 마셨던듯한데 정조가 워낙에

술을 권해서 자주 곤혹을 치러야 했지요.
한 번은 정조가 옥으로 만든 필통에 술을 가득 따라서

정약용에게 권한 적이 있습니다.
이 필통을 오늘날 필통 사이즈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두꺼운 붓이 여러 개 들어가는 필통인 만큼 매우 큽니다.
게다가 임금이 뭐 막걸리 같은 거 마시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조선 시대에는 알코올 도수 40도가 넘는 증류식 소주가

최고급품으로 인식됐는데 이때 필통에 담긴 술도 소주였습니다.

그러니까 정약용은 보드카를 바가지만한 그릇에 가득 담아 마신 꼴입니다.
거기다가 정조가 뭐 이걸 홀짝홀짝 마시게 한 것도 아니고

원샷을 하게 시킵니다. 어쩌겠습니까.
임금이 까라면 까야지. 정약용은 이걸 원샷하고 바로 정신을 잃어버리지요.

이날의 경험이 정말 곤욕이었는지 정약용은 훗날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했다’라 적어놨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술 마시는 걸 멀리하고 특히 원샷만큼은 피하라고

강조하지요. 또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다 탁 털어 넣는데 그들이 무슨 맛을 알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술 마시는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폭사(暴死)하기 쉽다.
주독(酒毒)이 오장육부에 배어들어 가 하루아침에

썩어 물크러지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일이다."

  -<다산시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