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은 뭐해용?/주변에 가볼만한곳

기념물

칠봉인 2010. 3. 11. 21:06

가야산 산성

  • 가야산성
    • 伽倻山 山城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143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산 56-2
    • 규모 : 둘레 7.2km
    • 재질 : 석재
    • 시대 : 미상(임진왜란시 개축)
    • 지정일 : 2003년 5월 22일
    •  
    • 이미지  지도
  • 상세내용
    이 산성은 가야산의 정상인 칠불봉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용기골의 좌·우로 상아덤과 재골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처음 축성한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자료에 기록이 남아 있다. 
    대가야의 이궁(離宮)으로 추정되고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 백성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의 명을 받아 승장(僧將) 신열(信悅)을 시켜 개축하였으며, 난중에는 인근 백성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 숙종(肅宗)때 근처에 독용산성(禿用山城)이 수축됨에 따라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퇴락하였다.

    성벽은 전체 길이가 약 7.2㎞가 되지만 대부분 무너졌으며 일부 현존하고 있는 곳은 평균 높이 1.5m 내외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안의 면적은 약 2.1㎢이다.

    2000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 따르면 성내에는 동·서·남·북의 성문을 위시하여 암문(暗門), 치성(雉城), 망루(望樓), 장대(將臺), 7개의 샘과 1개의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용기사지(龍起寺址), 백운암지(白雲庵址), 일요암지(日曜庵址) 등의 건물지가 남아 있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수륜~고령간 → 백운분소(승용차 40분소요) → 가야산성(도보 1시간 30분소요)
  •  

    도산서당(부 고산숙)

    • 도산서당
      • 道山書堂(附 高山塾)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59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511
      • 규모 : 2棟
      • 재질 : 목재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일 : 1985년 10월 15일
      •  
    • 이미지  지도
  • 상세내용
    이 서당의 기원은 1799년(정조 23) 우졸(愚拙) 홍우범(洪宇範)이 모옥 3칸을 세워 죽림재(竹林齋)라 하고 향학의 장으로 삼았던 데에 있다. 
    1806년(순조 6) 그 후손들이 서당을 확장하여 대방재(大榜齋)라 개칭하고 누구나 배울 수 있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 후 운영을 계승한 홍우범의 조카 홍영(洪瑩)이 서실부족으로 문중의 뜻을 얻어 1860년(철종 11)에 다른 곳에 서당을 신축하여 도산서당이라 하였다.

    한편 1872년(고종 9)에 기존의 대방재를 개축하였는데, 이때 성산이씨 원석(圓石) 이문승(李文升)이 입계(立契)하였으며, 이름을 고쳐 고산숙(高山塾)이라 하였다.
     
    나지막한 기단 위에 조성된 서당은 팔작지붕 건물로 평면은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이 둘 있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구조로 되어 있으며, 좌측방은 삼성당(三省堂), 우측방은 경운당(耕雲堂)이라 하였다. 
    또한 온돌방 뒷벽에는 반침(半寢)이 설치되어 있는데, 반침을 받치는 기둥이 각형 화강석주를 사용한 것과 온돌방 앞 툇마루가 중앙 마루보다 1척(尺)정도 높게 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 서당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실시하여 평등교육의 단초를 열었으며 많은 인재들을 양성함으로써 국가 및 지역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선남면 → 문방리 (승용차 20분소요)
  •  

    독용산성

    • 독용산성 입구
      • 禿用山城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105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 42-1일원
      • 규모 : 둘레 7.7km
      • 재질 : 석재
      • 시대 : 가야시대(4세기경 추정)
      • 지정일 : 1995년 1월 14일
      •  
    • 이미지  일반영상  지도
  • 상세내용
    이 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의 줄기에 쌓은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7.7km(높이2.5m 평균폭넓이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산성으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성의 축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여 년전 가야시대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 발견되었다. 숙종원년(1675) 관찰사 정중휘가 주청하여 개축하였다.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절석(切石)하여 축조하였는데, 막돌흩은층쌓기를 하였으며 사이사이의 공간에는 잔돌끼움 쌓기를 하여 성벽의 틈새를 메꾸는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성벽의 축조방법은 협축법(夾築法)과 편축법(片築法)이 고루 사용되었으며, 계곡을 지나는 성벽의 경우에는 단(段)을 지워 성벽 쌓기를 실시하여 급경사에 따른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문·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무너지고 없어져서 돌무더기와 그 옛터로 짐작되는 건물지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개축할 당시 독용산성은 둘레가 4,581보(步)이고, 여장(女墻)이 2,405첩(堞)에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서남북의 네 포루(砲樓), 동문(東門), 수구문(水溝門), 남소문(南小門)등이 있었고, 합천(陜川), 거창(居昌)의 군병(軍兵)과 군향(軍餉)을 배속하는 등의 규모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때에 성을 관리하기 위하여 객사(客舍), 동·서창고, 군기고(軍器庫) 등의 건축물이 갖추어 졌으나, 조선 말기에 군사적인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들이 허물어져 현재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한 군기고(軍器庫)에서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으며, 웅장하였던 성곽일부와 아취형의 동문을 최근 복원하였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가천면 -> 금봉리(승용차 40분 소요) 
  •  

    성주 옥성리 의열각

    • 의열각 내부
      • 星州 玉星里 義烈閣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145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산 72-3
      • 규모 : 1棟
      • 재질 : 목재
      • 시대 : 근대
      • 지정일 : 2003년 8월 14일
      •  
    • 이미지  일반영상  입체사진  지도
  • 상세내용
    이 건물은 일제에 저항하다 자결로 순국한 이경환(李慶煥, 1902~1929)의사(義士)와 남편을 따라 자결한 그의 부인 성산 배씨(星山裵氏)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의열각(義烈閣)이다.

    이경환 의사는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교토(京都)를 방문했을 때 한국침략의 부당성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철폐를 요구하는 직소장(直訴狀)을 제출하려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통을 겪은 뒤 귀국한 후, 1929년 11월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탄식하여 목을 매 자결하였다. 부인 성산 배씨도 남편이 죽은 지 3일 만에 뒤따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경환 의사는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대가면소재지( 승용차10분소요)
  •  

    성주 해평동 측백나무

    • 측백나무 전경
      • 星州 海平洞 側栢나무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49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993-3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일 : 1984년 5월 21일
      • 수량 : 1주
      •  
    • 이미지  지도
  • 상세내용
    이 나무는 수령(樹齡)이 약 320년 정도로서 다섯 개의 가지 중 한 가지가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으며 수형(樹形)이 기이하게 생긴 명목(名木)으로서 잘 보호되어 온 나무다.

    나무가 식재된 것은 조선 현종 9년(1668) 때 여효증(呂孝曾)이 충청도 임천군수에 봉직하고 낙향할 때 그 곳 주민들이 선물로 준 것을 가져와 이곳 만연당(漫然堂) 뜰에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경술년(庚戌年, 1910)에는 사흘 동안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측백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常綠針葉樹)로서 관목(灌木) 또는 교목(喬木)으로 중국 및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단양(丹陽), 달성(達城), 안동(安東), 영양(英陽) 등지에서 자라고 있다. 
    절벽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주택과 마을 주변에 많이 심고 있다.

    측백나무의 나뭇잎은 약재로 쓰여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하며 나뭇잎의 발육상태와 색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벽진면 → 수촌리(승용차 15분소요)
  •  

    심산 김창숙생가

    • 심산김창숙생가 전경
      • 心山 金昌淑生家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83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04
      • 규모 : 1棟
      • 재질 : 목재
      • 시대 : 조선말기
      • 지정일 : 1991년 5월 14일
      •  
    • 이미지  일반영상  지도
  • 상세내용
    이 가옥은 독립운동과 교육진흥에 일생을 바친 심산(心山) (金昌淑,1879~1962)이 출생(1879년 7월 10일)한 생가인데, 선조로부터 세거(世居)해 온 전래의 건물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고, 현 안채 건물은 고종 38년(1901)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생가는 청천서당(晴川書堂)에서 우측으로 약 100m거리에 위치하며, 장방형 토석담을 두른 내에 안채와 1991년에 건립한 사랑채, 판각고(板刻庫) 등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김창숙의 호는 심산·벽옹,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조선 선조조의 명신이며 학자인 동강(東岡) 김우옹의 후손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기 이전부터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하고, 강점된 후에는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일제에 의해 투옥되어 가진 옥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유도회를 조직,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총장을 역임하였다.

    김창숙은 전생을 독립운동과 민족문화 창달·국민교육에 크게 이바지한 민족 지도자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대가면 → 칠봉리 (승용차 15분소요)
  •  

    월회당

    • 월회당 내부
      • 月會堂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48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890-3
      • 규모 : 1곽
      • 재질 : 목재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일 : 1984년 5월 21일
      •  
    • 이미지  일반영상  지도
  • 상세내용
    이 건물은 조선 중종11년(1516)에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1481~1553)이 향토제자들에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론하고 이를 시행하기위한 강회소(講會所)로 창건한 건물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여희림이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알렸는데, 그 이듬해인 중종 12년(1517)에 전국에 여씨향약을 시행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로써 전국적으로 향약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여씨향약의 발상은 중국 송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사는 여씨(呂氏)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여대중(呂大中)·여대방(呂大防)·여대약(呂大約)·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鄕里)를 위해 자치행동규범으로 만든 것인데, 남전현에서 시작되었다하여 ‘남전향약(藍田鄕約)’이라 불리기도 했다.
    향약의 주요 내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등의 조약(條約)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주자(朱子)가 수정을 해‘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만들었다.

    월회당의 일곽의 구성은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의 월회당,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전사청(典祀廳),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고직사(庫直舍)와 솟을삼문으로 이뤄져 있다.

    월회당이란 이름은 월일강회(月一講會)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인데,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모여 향약강회를 가져야 된다라는 훈계조로 만든 이름으로, 그 강회에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게 했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벽진면 → 수촌리(승용차 15분소요)
  •  

    해동청풍비

    • 해동청풍비
      • 海東淸風碑
      • 구분 : 도지정 기념물 제 82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478-2
      • 규모 : 1基
      • 재질 : 화강암
      • 시대 : 1936년
      • 지정일 : 1990년 8월 7일
      •  
    • 이미지  일반영상  입체사진  지도
  • 상세내용
    해동청풍비는 1936년 전국 유림들이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 1860~1911)의 충절을 기리고,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선생은 자는 진여(進汝), 호는 자하(紫下), 관향(貫鄕)은 인동(仁同)이며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다 39세 때 학문에 뜻을 두고 수학한 이래 43세 때 유학(儒學) 경서(經書)를 두루 통달한 다음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비분강개하여 향촌사회에 항일의식을 고취하던 차 같은 해 12월 7일 성주경찰서에 감금된 뒤 12월 9일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1911년 1월 5일 옥중에서 순국할 때까지 음식을 거부 한 채 일제의 잔혹한 위협과 집요한 회유에도 동요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해동청풍비는 평평한 바닥돌 위에 비신을 세운 간단한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높이가 320㎝, 넓이 110㎝, 두께 45㎝이다. 
    1936년 전국 유림에서 뜻을 모아 세웠으나 그 이듬해에 일제가 파괴해 버린 것을, 광복 후 조각들을 찾아 모아 다시 세웠으며, 비문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썼다. 
    이 비 옆에는 1937년 왜경이 비를 파괴하려하자 자결로 항거한 부인 박씨의 기열비(紀烈碑)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위당(爲堂) 정인보(鄭演普)가 짓고 김우진(金禹鎭)이 썼다.
  • 관광코스
    성주버스정류소 → 대가면~벽진면간 → 봉계리 (승용차 15분소요)
  •  
     

    '방문객은 뭐해용? > 주변에 가볼만한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록문화재  (0) 2010.03.11
    문화재자료  (0) 2010.03.11
    도지정문화재  (0) 2010.03.11
    관광문화유적  (0) 2010.03.10
    공룡바위  (0) 2010.03.10